서울시가 조선시대 신권(臣權)의 상징인 '의정부'가 있던 자리이자 사대문 안 문화유적의 핵심 장소인 경복궁 앞 옛 육조거리 중앙 관청터 15,627.7㎡에 대한 첫 발굴조사를 이달부터 본격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이래 지금은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관광버스 주차장, 도로 등으로 이용되고 있어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돼버린 아스팔트 아래 의정부 터의 옛 모습을 150년 만에 밝혀내고 되찾기 위한 것이다.

▲ (자료출처:서울시) 1890년 촬영한 육조대로의 사진과 1908년 제작된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상 관아 위치 및 구조 "외삼문 – 내삼문 – 당상대청(중심건물) - 후원(연못과 정자)” 구조를 잘 보여준다.

현재 세종대로 일대 옛 육조거리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를 위시한 조선의 주요 중앙 관청들이 자리했던 서울의 핵심 가로로,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육조대로 주요 관청터에 대형 고층건물들이 자리하면서 역사적 경관이 대부분 훼손됐다. 하지만 의정부가 있던 자리는 1909년 내부 청사 2층 신축을 비롯해 여러차례 공사가 진행됐어도 지하층과 중층 이상 건물신축은 거의 없어 지하 유구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할 것으로 추정된다.

▲ (자료출처:서울시) 1901~1902년 육조대로

발굴조사는 종묘, 한양도성 등 서울의 중요 유적을 발굴한 바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수행하며, 이달부터 내년 10월까지 약 14개월간 진행된다.

서울시는 발굴조사 기간 동안 기존의 폐쇄적인 방식이 아닌, 개방형 펜스를 설치해 시민 누구나 발굴 현장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또, 정기적으로 '생생 설명회'를 개최해 발굴과정을 시민들에게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 (자료출처:서울시)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이후의 육조대로

이번 발굴조사는 총 3단계(학술연구~발굴조사~재정비)로 추진되는 '의정부 터 발굴 추진사업'의 두 번째 단계다.

서울시는 발굴조사에 앞서 (재)역사건축기술연구소와 작년 6월부터 1년여 간의 종합적인 학술연구를 실시, 의정부 터를 발굴‧정비하기 위한 학술적 근거를 마련했다.

▲ (자료출처:서울시) 의장 중정부의 가심 건물인(당상대청) 정본당

학술연구를 통해 의정부를 비롯한 당시 관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축 구성(외삼문‧외행랑-주요건물-연못‧정자가 있는 후원)과 의정부의 주요 건물 3채(정본당‧협선당‧석화당)의 규모와 배치(복도로 연결된 구조) 등을 고증, 의정부가 관청 가운데 가장 높은 격식을 자랑하는 건축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울시는 설명했다.

특히, 의정부의 주요 건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당시 영‧좌‧우의정의 근무처였던 '정본당‘(정면 7칸, 측면 4칸)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최초로 고증했으며, 의정부 후원에 있던 정자가 1925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사실도 이번 학술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냈다.

▲ (자료출처:서울시) 의정부와 마주보고 있던 삼군부의 주요건물인 청헌당, 총무당, 덕의당 의정부는 삼군부와 유사한 형식으로 지어졌으나, 주요건물인 석화당, 정본당, 협선당은 이보다 더욱 격식이 높았다.

학술연구 당시 필지조사에서 전문가들은 육조대로와 접한 의정부 전면 부분이 세종대로 아스팔트 아래 묻혀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지난 '13년 공원 내 조형물 설치를 위해 실시한 부분발굴 결과 의정부와 관련이 큰 유구‧유물이 출토돼 의정부 유구의 잔존 가능성이 더욱 높게 전망된다.

한편, 의정부는 1400년(정종 2년) 정종이 처음 설치한 이후 1907년 내각 신설로 폐지될 때까지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이 국왕을 보좌하며 6조의 업무 등 국가정사를 총괄하던 조선시대 최고 정치기구였다.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에 그 실권이 넘어가고 화재로 인해 청사도 이전돼 그 위상이 떨어졌으나 고종 즉위 이후 대원군의 왕권강화 정책에 따라 삼군부 및 6조 관청과 함께 재정비가 이뤄져 본래 위치에 중건되고 그 위상도 회복됐다.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