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사람-유학재

“지금은 못 박을 때나 쓰죠^ ^”

종로5가의 한 등산 장비점에서 유학재 씨를 만났다. 이번에 소개해 줄 장비에 대해 묻자,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금세 무엇인가를 들고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나온다. 얼핏 보면 망치처럼 보이기도 한 그것은 그가 특별하게 여기는 장비인 로우알파인의 ‘아이스 해머’였다.

“형일 씨가 추천했다고 하기에 고민하다 결국 이 해머를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좀 비싼 거였거든요. 내가 6개월이나 돈을 모았는데도 모자라서 선배에게 조금씩 빌려서 산 기억이 나네요. 이름은 로우(Lowe)의 ‘아이스 해머’고 제프 로우라는 산악인이 만들었어요. 내가 존경하는 산악인이기도 한데 나랑 등반 스타일이 비슷했죠. 장비업체인 트랑고 다닐 때는 1년에 한 번씩 제프 로우를 만나서 장비 이야기도 많이 하고 술도 마셨어요.”

장비가 많이 낡았네요. 언제 사용하셨어요?

▲ 아이스해머
“많이 낡았지요. 벌써 몇 년이 되었나 싶어요. 한참 전성기 때 함께 했던 장비라, 그 당시의 등반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찌릿찌릿해져요. 1988년에 설악산 토왕성폭을 오를 때 사용했어요. 헌데 지금은 빙벽이 아니라 집에서 못 박을 때 사용하니(웃음), 가끔은 추억이 떠올라 이 해머를 들고 빙벽을 오르기도 하지만 어느새 새로운 장비가 손에 익어 사용하기가 수월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 해머를 만지고 있자면 많은 추억들이 떠올라요. 맥킨리원정대의 대원으로 발탁돼 원정이란 꿈을 안고 설악을 펄펄 날아 다녔지요. 누구에게나 가장 빛나는 때가 있지요, 그래서인지 이 해머에 가장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

잠시 동안 그의 시선이 로우 해머에 머물렀다. 아마도 그해 그가 올랐던 토왕성폭 1시간 38분 등반이라는 기록의 순간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에게 장비는 무엇일까?.

장비에 대한 욕심은 많으신가요?
“그럼 물론이지요. 장비에 대한 욕심이 무척 많은 편이라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바로 산으로 가서 테스트 해보고 싶어지곤 해요. 여자들이 신상품 옷보면 좋아하고 그렇잖아요. 그런 것이라 똑같다고나 할까? 내가 쓰던 장비는 지금 사용하지 않더라도 보관하며 장비를 수집하고 있는데, 역사적인 장비에서부터 신제품까지 다 모아보고 싶거든요. 최근 모아 놓은 장비들을 쭉 펼쳐놓고 보니까. 빌레이 장비만 40가지가 넘더라고요(웃음).”

산악계에서는 손재주가 제법 탁월하시다고 하던데요?
“손재주라기보다 장비를 분해해 살펴보고 나면 이렇게 하면 더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랬지요. 평상시 가지고 있던 호기심이 장비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지요.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 내가 직접 장비를 개발할 때는 장비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사실 스트레스가 좀 심하기도 했어요.”
그는 국내 암벽등반 장비업체인 트랑고스포츠에 입사해 17년을 근무하며 아이스바일과 암벽등반용 기구, 확보용 장비 등을 개발해 장비 업계에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그의 손재주와 더불어 등반가들에게 좀 더 안전하고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려는 노력 덕분이다. 그 덕분에 국내 장비 업계 역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등반가이며 장비 개발자이기도 했던 그는 왜 산에 다니기 시작했을까?

90년대 초반부터 알파인등반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이유가 있으신지요.
“사실 알파인 스타일이라고 못 박기보다는 그런 부류를 좋아한고 봐야 하겠죠. 내 스타일에 맞기도 하고 워낙 몸이 약하기 때문에 장시간 등반하기는 어렵거든요. 그래서 신속하게 오르고 내려오는 게 좋아요. 그런 가운데 내 몸에 좀 부화를 주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를 즐기는 편이거든요.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고통이 클수록 몸에서 느끼는 희열과 감동이 커지거든요.”

극한 등반을 통해서 한계점에 부딪힌 경험은 있나?
“그런 경험 물론 있지요. 극한의 한계점은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있는데, 우선 등반의 난이도가 극한인지 아니면 생존의 극한이지. 난이도의 극한점은 체력을 단련함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생존의 극한에서는 죽지 않기 위한 선택을 하곤 하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순간 죽는 거예요.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마음속으로 먼저 간 아우들에게 기도를 하죠. ‘나는 아직 너희들 만나고 싶지 않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줘’라고 말이죠.(웃음) 좀 더 있다가 만나면 되잖아.”

해외 원정 등 고산에 가실 때 꼭 갖고 가시는 것이 있다면?
“부적! 이건 우리 집사람도 모르는 건데 진짜 부적을 가져가요. 난 부적에 의지하거나 하진 않지만 이 부적은 결혼하기 전 총각 때 어머님이 주신 것이죠. 어머님은 원정을 갈 때마다 새롭게 부적을 해오곤 하셨어요. 어느 순간 그것도 큰 부담이 되더라고요. 워낙 조심해라 하는 것들이 많다보니. 그래서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이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부적을 해오지 않으셨어요. 의지한 적 없지만 부적을 안 해오시니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내 부담까지 마음에 담아두시느라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그래서 그 이후론 이 부적을 갖고 가게 됐지요.”

산에 오를 때와 내려올 때의 생각은 다른지?
“내가 무슨 이유로 가는 걸까. 이처럼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며 올라가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해 있지요. 결국 내려올 때까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진 못하지만 그러면서 하나씩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내려올 때는 다신 오지 말아야지 하면서 오곤 해요. 부부처럼 ‘으이구 웬수’ 하면서도 좋은 거랑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결국 다시 가겠다는 소리지요.”

요즘 등산을 즐기는 분들이 많으신데 초보 산악인들에게는 할 이야기가 있다면?
“등산은 말 그대로 산에 오르는 행위인데 이를 잊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보여요. 자연이 만들어 놓은 환경 속에서 사람은 즐거움과 어려움을 겪으며 오르는 게 등산인데 등산을 사람 만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오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만나러 산에 가지 말고, 산을 만나러 산에 가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산은 자기가 오를 수 있는 산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경험이 생기다보면 차츰 산에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산행의 본질을 느끼며 산에 오르는 게 제일 중요하죠. 산에 갈 때는 세 가지 설렘을 갖고 가라고 말해요. 첫 번째는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이고 그 다음은 어떤 경로로 어떤 사람들과 산에 갈 것인지, 그리고 산 아래 도착해서 산을 올려다 볼 때의 설렘.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생명들을 보는 설렘. 이 세 가지만 담아오면 어떤 산을 가도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에게 산이란?
“산이라는 것이 뭐라 딱 단정 짓기는 어럽다고 봐요. 높고 험한 산을 오르다 보면 아픔과 고통들이 생기고, 그런 기억 속에 빠지면 산에 다니기 무척 힘들어지죠. 그래서 기억 대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담아 두지요. 저에게 산은 힘들었던 산인가 아니면 수월했던 산인가로 나뉘어져요. 기록은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저 열심히 내가 가고자 하는 산을 오를 뿐이죠. 산에 오르는 것이 어떤 기록을 남기기 위해 가는것이 아니라는 거죠. 기록은 추후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는 것이고, 다른 이에게 평가를 받기위해 기록을 하는 산사람은 없을 걸요. 자신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로 산에 갈 뿐입니다.”
 

유학재 Profile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88년 설악산 토왕폭(320m) 단독 등정 / 1989년 설악산 개토왕폭 초등
1990년 파미르 코뮤니즘(7,545m) 등정
1992년 알래스타 키차트나 스파이어 동벽(2,905m) 신 루트 등정
1997년 파키스탄 가셔브롬 4봉(7,925m)서벽 신 루트 등정
2001년 콩테르(6,093m)동계 북동릉 등정
2006년 이태리 도로미티 드리침네 등반 및 네팔 꽁대샤르(6.093m) 동계 등정
2008년 파키스탄 히말라야 CAC샤르(5,942m) 초등, 코리안샤르(6,000m) 등반
2009년 에베레스트 및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2010년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 MTB 라운딩
미국 시애틀 레이니어 봉(4393m) 등정

 

다음 시간에는 유학재씨가 추천한 산악인 박충길 씨의 산과 장비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속이 아주 깊은 후배죠. 산을 진지하게 대할 줄 아는 힘이 있는 사람이에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꽤 많을 거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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