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여섯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바다를 향한 집념의 화신, 러시아 표트르 대제 이야기②

마침내 러시아는 21년간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전쟁 중에 스웨덴과 접경지역에 위치한 네바 강 유역 늪지대를 확보하였다. 그곳은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여서 전쟁에서 전략적 중요도가 컸다. 뿐만 아니라 발트 해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 (자료출처:SBS,송병건의 그림속 경제사) 18세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위치

표트르는 그곳에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러시아의 번영을 위해서는 바다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유럽으로 가는 창’을 열어 젖히고 싶었다. 도시 건설은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표트르는 새 수도를 폐쇄적이고 전통에 얽매인 장소가 아닌 선진 유럽으로 향한 관문에 만들고 싶었다. 전통적 공기가 가득한 크렘린(Kremlin)을 대신해 서구 향기가 풍기는 신식 공간으로 옮기고 싶었다. 이곳을 통해 러시아를 부흥시키고 싶었다. 

1703년 표트르가 새 수도를 건설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이 계획을 무모하다 못해 미친 짓으로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땅은 스웨덴과의 전쟁이 한창인 때에 포격거리에 들어가는 최전방이었으며, 짐승들만 어슬렁거리는 늪지대였다. 800년 역사를 지닌 제국의 수도이고 영토의 중심이었던 모스크바(Moskva)를 두고 수도를 옮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오랜 전쟁으로 새 수도를 건설할 재정도 비어있는 상태였다. 

슬라브 전통주의자 귀족들은 반대했다. 그렇지만 표트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전통으로의 회귀 그리고 과거로의 퇴보를 의미했다. 그는 반대 의견을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물리쳤다. 심지어 아버지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외아들이자 황태자인 알렉세이를 처형하기까지 하였다. 바다를 향한 그의 집념을 꺾을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지선(알렉산드르 베그로프,1891)

1703년 5월 표트르는 네바 강변에 ‘표트르의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라한 그 집에서 8년을 거주하면서 새 수도의 건설을 지켜보았다. 표트르는 평범한 항구도시를 원치 않았다. 유럽인들이 앞 다투어 몰려올 수 있는 화려한 최신식 도시를 원했다. 

그렇게 오늘날 ‘북방의 베니스(Venice)’로 불리우는 새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건설이 시작되었다. 늪지대 전체를 돌로 메우는 도시 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바 강 유역에서는 돌을 구할 수가 없어 늪을 메울 많은 돌은 다른 지역에서 옮겨 와야만 했다. 핀란드, 폴란드, 독일 등에서 돌을 가져왔고 심지어 이탈리아, 우랄, 중동에서도 들여왔다. 귀족들은 계속되는 세금에 시달려야 했고, 일반 백성들은 춥고 습기찬 건설 현장에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 (자료출처:러시아관광개발위원회)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더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은 큰 희생을 동반했다. 이 새로운 도시는 불과 3년 동안에 약 15만 명 가까운 노동자를 삼켜 버렸다. 러시아 역사학자 클류체프스키(Klyuchevskii)는 “수많은 전쟁과 전투 기록을 살펴보아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면서 죽어나간 노동자 숫자만큼 많은 희생을 치른 적은 없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장 밥티스트 렘블랑 등 유럽의 유명한 건축가를 불러 들였다. 물 위에 500여개의 아름다운 다리를 놓았다. 베르사이유 궁전 등 유럽의 유명한 건축물을 전부 참고하였다. 수도 건설은 유럽의 ‘근대성’을 담아내려는 눈물어린 시도였다. 이 도시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러시아 문화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상징이고 기호였다.

▲ (자료출처:Pixabay) 여름궁전의 삼손 분수

1712년 표트르는 수도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마침내 바다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관문, 즉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완성된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는 ‘베드로’의 Peter와 ‘도시’를 뜻하는 –burg가 결합된 단어이다. 즉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이다. 또한 ‘표트르의 도시’(‘베드로’의 러시아식 이름이 ‘표트르’임)이기도 했다. 표트르에게는 이 도시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었다는 천국행 열쇠와 같았던 것이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표트르 대제 청동기마상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황제의 여름 궁전은 우아함으로 유명하다. 그 곳 정원 분수대 중앙에 거대한 삼손과 사자상이 있다. 삼손은 사자의 주둥이를 찢고 있는데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 승리하여 관문을 차지한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공교롭게 스웨덴의 국장(國章)은 수사자이다. 또 하나는 네바 강변에 서있는 표트르의 청동 기마상이다. 네바 강을 바라보며 말 위에 올라탄 표트르가 말발굽 아래 큰 뱀을 밟고 있는데, 뱀은 낡은 러시아 전통을 의미하기도 하고 천도를 반대했던 구귀족들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표트르는 러시아 동쪽의 바다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많았다. 1725년 그는 스웨덴 출신 해군장교였던 비투스 베링((Vitus Bering)에게 “러시아의 끝이 북아메리카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지를 확인하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베링은 약 9,000㎞를 육로로 걸어 시베리아를 횡단한 뒤, 캄차카 반도에 도착하였다. 떠나온 지 3년이 지난 1728년 7월 마침내 바다로 탐험에 나섰다. 육지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결과 시베리아의 동쪽 끝에 도달한 베링은 그 곳이 아시아의 끄트머리이고 해안선이 시베리아 서쪽으로 꺾여 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즉,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는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후에 그곳은 그의 이름을 붙여 베링해협(Bering Straits)으로 불려진다. 

▲ (자료출처:네이버지식백과) 베링 탐사대 1~2차 탐험지도

1733년 베링은 두 번째 탐험에 나섰다. 아시아의  건너편에 땅이 있는지 알아보고, 땅이 있다면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두 척의 배를 만들어 1741년 6월에 출발한 탐험대는 5개월 동안 탐험했다. 그러던 중 폭풍우를 만나 조난당하면서 캄차카 반도의 동쪽 500km에 있는 코만도르스키 제도(諸島)의 무인도(후에 ‘베링 섬’으로 명명)에 좌초했다. 살을 찢는 듯한 추위와 칼날 같은 바람을 막기 위하여 선원들은 모래 구덩이를 파고 움집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선원 중 절반인 3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2월 8일 베링도 죽고 말았다. 

두 번째 탐험에서 베링 탐험대는 시베리아 끝에는 더 이상 땅이 없고 곳곳에 섬(알류산 열도)이 있으며 건너편에 얼음으로 덮여 있는 큰 땅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러시아는 사람을 보내어 그 땅을 통치하기 시작하였으니 그곳이 지금의 알래스카(Alaska)다.

120여 년이 지난 1867년.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하여 단돈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팔았다. 그 후 엄청난 석유와 지하자원이 발견되었고, 더구나 미국이 알래스카를 소련을 상대로 한 군사 기지로 사용하였으니, 죽은 표트르와 베링이 하늘에서 통탄할 일이었다.

그런데 베링 탐험대가 조난당했을 때 신기한 동물을 발견했다. 탐험대는 괴혈병과 굶주림으로 전멸 직전이었다. 그 때 일행 중 한 명이 얕은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해양 동물을 발견하였다. 마치 전복한 보트가 뒤집혀 이리저리 떠다니는 듯 했다. 10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동물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굶주린 탐험대는 코끼리보다 더 크고 순한 이 동물을 잡아먹었고 극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 (자료출처:Encyclopædia Britannica, Inc.) 스텔라 바다소(steller’s sea cow)

이 동물이 지금은 멸종한 해양포유류의 일종인 스텔러바다소(Steller's sea cow)였다. 탐험대 일원이었고 발견했던 과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George Wilhelm Steller)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스텔라 바다소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주기로 한다.).

또한 근처에는 다른 해양포유류도 있었는데 바다에 사는 수달인 해달(海獺)이었다. 해달은 다른 해양포유류와 달리 두꺼운 지방층이 없고 보온을 위해  두껍고 빽빽하게 나 있는 체모에 의존한다. 탐험대는 세상에서 가장 보온성이 좋은 해달의 가죽을 벗겨 추위를 견뎌냈다. 탐험대는 스텔러 바다소 고기와 해달의 가죽 덕분에 추운 겨울을 겨우 버틸 수 있었고 이듬해 캄차카의 기지로 생환하였다.

▲ (자료출처:https://forumarctica.ru/the-forum/about-st-petersburg/)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전경

누구보다 바다를 사랑했고 바다를 통해 러시아를 세계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했던 개혁의 화신 표트르 대제. 그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고 러시아의 영광으로 실현되었던 도시. 바다로 진출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치러야했던 수많은 땀과 희생이 깃들어 있는 곳, 상트 페테르부르크!
표트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이 갖추어야할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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