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아홉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지팡구(Japan)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 서인도를 만나다②

1492년 8월 3일 캐럭선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와 캐러벨선 핀타호(Pinta), 니나호(Nina) 등 3척에 탄 90명의 탐험대가 팔로스항을 떠나 대서양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 탐험대의 총 4차례 항해 중 첫 출항이었다. 

▲ 자료출처: National geographic_ 콜럼버스 탐험대의 배(왼쪽부터 니나호,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먼 바다를 항해하는 방법은 아랍 상인들과 유대인으로부터 전해졌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다우 삼각돛을 갖추고 히팔루스의 계절풍을 이용하여 인도양을 건너다녔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가 역풍을 거슬러 가는 항해술을 유럽에도 들여왔고 이를 이용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가 이미 개척된 상태였다. 

최초로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했던 캐러벨선(Caravel)은 크기가 작았고 대양을 항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후 거대한 마스트 세 개를 세우고 가로 세로 돛 여러 개를 단 캐럭선(carrack)이 등장하였다. 아랍에서 유래한 지중해의 라틴세일(Lateen Sail, 삼각돛)과 북유럽 코그선(cog)의 가로돛이 결합된 형태였다. 이 배는 크기가 커서 식량과 물자를 많이 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삼각돛을 이용해 자유롭게 방향을 바꾸면서도 사각돛을 이용해 먼 거리를 빠르게 나갈 수 있었다.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블랙펄 호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 나오는 해적선 블랙 펄(Black Pearl)이나 인터셉터(HMS Interceptor)가 대부분 캐럭선이거나 이를 개량한 갤리온선이었다. 캐럭선은 배안이 깊고 넓으며 대포를 장착해서 포문을 통해 포탄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강한 서풍을 피하기 위해 아프리카 서북쪽 연안의 카나리아 제도에 들러 휴식을 취한 콜럼버스 탐험대는 곧바로 서쪽으로 향했다. 당시의 항해 기술로는 배의 위치나 항해한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는 어려웠다. 단순한 형태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모래시계로 거리를 측정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탐험대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항해했다. 

탐험대는 북위 28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서진했다. 북위 40도 근처에는 바람이 많고 불안정하여 항해하기 힘든 수역이었다. 반면에 적도 부근은 무풍지대이기 때문에 배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탐험대가 북위 28도를 따라 서진하여 육지를 발견한 것은 행운의 여신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순조롭던 항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이틀 전인 10월 10일이었다.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휩싸인 선원들이 반기를 들고 귀항을 주장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에게 황금의 보상을 상기시키며 하루만 더 가보자고 간신히 설득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월 12일 새벽, 핀타호의 선원 로드리고가 “티에라! 티에라!(육지다! 육지다!)”를 외쳤다. 스페인을 출항한지 69일, 중간에 경유한 카나리아를 출발한지 33일 만에 마침내 미지의 섬에 도착했고 콜럼버스는 이곳을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의미의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이름 지었다.

섬에 도착하여 원주민을 만난 콜럼버스는 그날의 《항해일지》에 “……그들은 남자든 여자든 벌거벗은 채 다녔다. 그들은 체격이 좋았으며 아름다운 육체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무기라는 개념자체를 알지도 못했다.”고 적고 있다. 

▲ 자료출처: 다음백과사전_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역사화

섬에는 처음 보는 식물이 많았는데, 그 중에 원주민들이 잎을 말아 불을 붙이고 연기를 마시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토바코(Tobaco)’라 불렀다. 그 외에도  감자, 옥수수, 토마토, 고추, 땅콩, 호박 등이 있었다. 탐험대는 이어서 황금을 찾아 현재의 쿠바, 아이티에 해당하는 섬을 탐험하였다. 콜럼버스는 쿠바를 중국의 일부라 생각하였고 자신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몇 몇 섬을 탐험한 콜럼버스 일행은 아시아 항해를 증명하는 금과 은, 몇 가지 동식물, 그리고 7명의 원주민을 데리고 1493년 3월 13일 팔로스항으로 돌아왔다. 

아시아를 발견한 콜럼버스는 비록 많은 황금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했지만 유럽에서 유명해졌고 지위도 크게 향상되었다. 그로 인해 2차 항해는 1493년 9월 25일 선박 17척에 인원 1500명의 대규모로 출발했다. 이제 엄청난 황금을 찾으려고 왕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아시아로 향하게 된 처음 구상은 도착지에 상관을 설치하고 금, 향료 등을 구입한 후 돌아와 이익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현실은 경제가 발달한 곳이 아니라 그런 식의 교역이 불가능했다.  

▲ 자료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_ ‘콜럼버스 탐험대의 1~4차 항해도

그러자 ‘상호간 교역’에서 ‘일방적 문명화’로 정책이 바뀌었다. 그때부터 원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고 아메리카는 식민의 대상이 되었다. 이 항해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노예보다 황금을 기대했던 왕은 무능한 총독 콜럼버스에게 더 이상 신뢰를 주지 않았다. 이제 용감한 탐험가보다는 식민지를 잘 관리하여 재물을 안겨줄 수 있는 행정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콜럼버스는 두 차례 더 항해했다. 하지만 이제 왕은 그에게서 권한을 거두었으며 그가 왕에게 황금을 가져올 가능성도 희박했다. 3차 항해(1498년~1500년)때는 남미대륙에 처음으로 근접하여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 입구를 발견하고 에덴 동산의 관문이라고 믿기도 했다. 또 새로 파견된 총독에게 식민지내 분란의 책임으로 체포, 감금된 콜럼버스는 쇠사슬에 묶인 채 본국으로 압송되기까지 하였다. 4차 항해(1502년~1504년)는 4척의 배로 초라하게 출발하여 온두라스를 발견하는 등의 미미한 성과를 거두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룩해 온 본인의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1504년 11월 그를 후원하던 이사벨라 여왕까지 죽게 되자 절망하며 지내다 1506년 5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은 다분히 유럽적인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아메리카는 2만 5천 년 전 시베리아에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던 동아시아계 이주민이 최초로 발견했다. 

▲ 자료출처: Google sites_ 수도사 브렌던의 항해

콜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에 도착했던 유럽인도 있었다. 약 570년경 아일랜드 수도사 ‘브렌던(Brendan)의 항해’가 그것이다. 그는 484년부터 577년 까지 살았고 아일랜드에서 수도원 원장을 지냈다. 그의 항해는 10세기 《수도사 성 브렌던의 항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인간이 원죄를 짓기 전에 살았던 지상낙원으로 항해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9~10m 정도의 코러클(coracle, 나무를 엮어 골격을 만들고 짐승가죽이나 나무껍질을 붙인 배)에 돛을 달고 14명의 수도사와 항해하였다. 

그들은 북해 페로 제도와 마데이라를 거쳐 서쪽으로 향하여 카리브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아메리카에 상륙하는 등 9년간에 걸친 탐험을 하였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바이킹 에릭손의 항해

한참 후 또 다른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도착하였는데, 10세기경 북유럽의 바이킹이었다. 그들은 거친 바다에 능숙했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모험을 즐기는 민족이었다. 바이킹은 850년경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아일랜드를 거쳐 그린란드로 진출하였고 500년 동안 이곳에 살았다. 1003년경 바이킹 에릭손(Leifur Eiríksson)은 크나르(Knarr, 바이킹이 사용하던 배로 속력이 빠르며 선수미가 높고 선폭이 좁은 롱쉽)선을 타고 남쪽으로 항해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전체 땅의 85%가 빙하로 덮인 그린란드에 비해 겨울에도 풀이 자라는 땅을 그들은 ‘빈란드(Vínland, 포도의 땅)’라 이름 붙였다.

한편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환관이자 장군인 정화(鄭和)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에 걸쳐 아시아, 아랍,  아프리카를 원정하였는데 영국의 역사학자 개빈 멘지스는 제6차 원정에서 정화와는 별도로 움직이던 소함대가 희망봉을 돌아 아메리카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항해가 이후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항해가 유럽인에게는 ‘위대한 신대륙의 발견’이었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참혹한 문명파괴의 서막’이었다. 유럽인은 황금을 목적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다. 코르테스(Hernándo Cortés)가 아즈텍 문명을 정복하거나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잉카 문명을 무너뜨리는 과정은 참혹하기까지 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맹견을 동원하여 파나마 원주민을 학살하는 발보아_드 브리

이를 두고 유럽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유럽인과 같은 인간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유명한 ‘바야돌리드 논쟁(Junta de Valladolid)’이다. 이 회의에서 인문학자 세풀베다는 "원주민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강압적 방법으로 통치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아메리카에서 실제로 머물러 살았던 주교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에게도 이성이 있으며, 노예로 삼거나 가혹한 처우를 해선 안 된다"고 맞섰다. 

논쟁 끝에 라스 카사스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원주민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행위가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라스 카사스는 아프리카 흑인을 아메리카 원주민 대신 노예로 삼자는 대안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노예무역을 촉발시키는 시초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아메리카의 유럽인 후예는 매년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하여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코스타리카 등 중남미 국가에서는 콜럼버스가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이지 존경할 만한 대상은 아니라고 하며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정하고 있다.

▲ 자료출처:www.change.org_ ‘콜럼버스 데이’ 반대 포스터

아시아도 오랫동안 유럽의 식민지배가 이루어졌지만 아메리카는 인종 자체가 말살되고 곳곳이 원주민 대신 유럽인으로 대체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강압적 통치에 시달리다 죽어간 한 원주민의 절규는 아메리카 정복의 역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만약 천국에 스페인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기 전 쿠바 원주민 추장 하타이가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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