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열 한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북쪽 땅으로부터 온 바다의 정복자 바이킹

잉글랜드 북동부 해안에 린드스판(Lindisfarne) 섬이 있다. 793년 6월 먼 수평선 너머로부터 몇 척의 배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빠르게 해안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거구의 사내들은 큰 도끼를 휘두르며 수도원을 약탈했다. 그리고는 배에 값진 재물을 싣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북쪽에서 온 약탈자들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해안과 아일랜드를 수시로 침략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9세기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바이킹

잉글랜드인은 기도했다. “주여, 북방인들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소서!”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약탈자들은 300년 동안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북쪽 땅으로부터 배를 타고 나타난 정복자 바이킹이었다. 바이킹하면 뿔 투구를 쓰고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잔인하고 마초적인 이미지를 얼른 떠올릴 것이다. 강과 바다를 휘젓던 그들은 어디서 온 누구이며 어떻게 한 시대를 풍미했는가? 

유럽지도를 펼쳐보면 용의 머리처럼 생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볼 수 있다. 원래 북유럽은 빙하로 덮여있던 땅이었다. 빙하가 쓸고 지나간 땅은 육지와 바다가 한데 섞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 빙하가 물러나고 숲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게르만 일족이 북쪽 땅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피오르드와 덴마크의 수많은 섬에 흩어져 살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배는 일찍부터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바이킹(viking)이란 명칭은 협만(峽灣), 내포(內浦), 후미 등을 의미하는 vik에서 유래하였다. vik는 해안선 안쪽으로 바다가 깊게 들어온 피오르드 지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바이킹은 ‘협만에 사는 사람’ 쯤으로 해석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킹은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약탈과 교역을 병행했던 노르드인(북게르만)의 일족이다. 

바이킹 전사는 관습적으로 하나 이상의 무기는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양날 도끼를 든 바이킹 전사의 모습은 영화나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도끼는 장식용 또는 매장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전투에서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실제 애용된 무기는 둥근 방패와 창이었다. 전장에서 바이킹은 용감했고 물러설 줄을 몰랐다. 바이킹 전사의 소원은 칼을 쥔 채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위대한 오딘의 궁전인 발할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바이킹은 주신(主神)인 오딘(Odin)을 숭배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왕국 아스가르드(신들이 사는 왕국)를 건설했다. 그의 아들 토르(Thor)는 천둥과 번개의 신이었다. 영화 《토르》에서 되돌아오는 망치 묠니르 때문에 주신보다 더 유명해졌다. 티르(Tyr)도 오딘의 아들이며 전쟁 신이었다. 프레이야(Freyja)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었다. 바이킹 신화에는 그 밖에도 수많은 신들이 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바이킹의 신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 “토르”

오늘날 사용하는 요일의 명칭 가운데 바이킹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있다. 수요일(Wednesday)은 보덴(Woden, Odin의 다른 이름)의 날이고 화요일(Tuesday)과 목요일(Thursday)은 티르(Tyr)와 토르(Thor)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금요일(Friday)은  프레이야(Freyja)의 날이다. 그러고 보면 요일중의 으뜸은 수요일로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바이킹은 ‘약탈’ ‘해적’ ‘야만’ 등의 단어가 어울리는 민족이었지만 실제로 탁월한 항해가이자 탐험가이며 상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먼 곳까지 항해하며 상황에 따라 약탈과 교역을 병행했다. 그들은 북해의 거친 바다로도 나아갔지만 내륙의 좁은 수로에도 배를 띄웠다. 그들은 서쪽으로 가서 야만적인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는가 하면 동방으로 가서 세련된 협상과 교역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바이킹 무덤에서는 인도의 불상, 이슬람 동전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바이킹에게 배는 정복, 교역, 운송의 수단이자 생활터전 그 자체였다. 초기 그들의 배는 폭이 좁고 용골이 없으며 돛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7세기가 되자 바이킹의 배는 변화하였다. 이전과 달리 용골과 사각의 돛을 만들었으며 양쪽에 1단의 노를 설치하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치켜 올린 선수와 선미는 동일한 형태였고 끝에 용머리 모양을 장식했다. 배 바깥 부분은 현란한 색깔의 원형 방패를 줄지어 세워 파도나 적을 막았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바이킹의 군함인 드라카르(Drakkars)

바이킹의 배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탐험, 무역, 전투 등의 다목적 선박인 드라카르(Drakkars)와 무역, 수송 및 대서양 항해에 특화된 크나르(Knarr)가 그것이었다. 드라카르는 나무 재질의 롱 쉽(long ship) 형태의 배였는데 선체가 가볍고 날렵하여 기동성이 뛰어났다. 또 유럽을 약탈할 때에 내륙 수로를 많이 이용했는데, 이 배는 흘수가 낮아 노를 저어 좁은 수로를 역류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강이 막히면 전사들이 들고 육로로 이동하기도 했다. 크나르는 수송이 주목적이어서 더 짧으면서 넓고 깊게 설계한 라운드 쉽(round ship) 형태였다. 따라서 짐을 많이 싣고 먼 섬으로 이주하거나 대서양을 항해하는데 많이 쓰였다. 

바이킹 배의 특징 중 하나는 속도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유연하고 가벼운 선체는 파도를 타고 넘으며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또한 돛대가 정중앙에 달려 전진 후진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게다가 배의 앞뒤 형태가 똑같아서 좁은 바다나 강으로부터 약탈을 감행한 후 배를 돌리지 않고 후진으로 신속하게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했다. 

다른 특징으로는 우현 뒤쪽에 키 역할을 하는 별도의 노를 달았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쉽게 방향을 조종하였다. 배를 항구에 댈 때 조종하는 사람은 키가 있는 우현에 앉아 키가 손상되지 않도록 반대쪽인 좌현을 항구에 붙였다. 이 관습이 오늘날에도 이어져 배를 조종하는 우현을 ‘스타보드(starboard, 즉 steering board)’라 하고 배가 항구에 닿는 좌현을 ‘포트(port)’라 한다. 

바이킹은 나침반이 없이 항해하고 해와 별을 보고 위치를 파악했다. 때로 수정석의 일종을 태양에 비추어 빛의 갈라짐을 보고 방향을 찾기도 했다. 항로를 잃어 육지를 찾고자 할 때에는 까마귀를 날려 날아간 방향을 보고 항로를 잡았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1903년 노르웨이에서 발견된 바이킹의 배 무덤

바이킹은 배를 중요시했다. 중요 인물의 장례를 치를 경우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유해와 함께 매장하는 배 무덤(viking grave)의 흔적이 오늘날도 남아있다. 또한 거친 바다를 항해할 때 그들의 주신인 오딘의 보호를 받기 원했다. 그래서 배를 처음으로 바다에 진수할 때 살아있는 노예나 동물의 피를 재물로 바쳤다. 세월이 흘러 산 제물을 바치는 관습은 끊겼다. 하지만 오늘날 진수식에도 포도주를 배의 몸체에 부딪쳐 깨뜨리는 의식이 남아있다. 피를 대신하여 붉은 포도주를 주신 오딘에게 바치는 전통인 것이다. 

바이킹이 북쪽 땅을 떠나 약탈을 시작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9세기 이후 급격한 인구 증가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특유의 관습도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바이킹은 일부다처제로 많은 아이를 낳았는데 장자 상속제 전통으로 인해 장남을 제외한 남자는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나서야 했다. 또 중죄를 지으면 추방당하여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런 이유로 바이킹은 8세기부터 끊임없이 이웃 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차츰 민족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민족 간 고유의 활동영역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바이킹은 노르웨이계, 스웨덴계, 덴마크계(데인)로 갈라졌다. 

노르웨이계는 거친 북해를 건너 서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들 일부는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 아일랜드 해안을 공격하였다. 초기에는 여름에 약탈을 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자 해안에 전초기지를 만들어 현지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내륙 깊숙이 들어가 약탈을 했다. 이들은 인구가 희박한 스코틀랜드 북부, 셰틀랜드 제도 등 외진 곳에 정착해 살았다. 이를 근거지로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는 물론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비야까지 약탈했다. 

섬인 아일랜드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839년 바이킹은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식민도시 더블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다스렸다. 그런데 851년 또 다른 바이킹인 덴마크계가 상륙하여 아일랜드인과 힘을 합쳐 대항했다. 두 바이킹족이 남의 땅에서 제 집처럼 싸움을 벌였다. 1000년경 마침내 아일랜드인이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는 사이 켈트 문화와 바이킹 문화는 뒤섞였고 많은 바이킹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노르웨이계는 또한 북극 근처의 새로운 섬을 발견하고 개척했다. 815년경 일부가 페로 제도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항해하였고 아이슬란드를 발견하였다. 982년경 바이킹 ‘빨간 털 에리크(Eric the Red)’는 죄를 짓고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당하자 낯선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그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그린란드(초록의 땅)’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름처럼 푸르지 않았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 북쪽 해안에서 바이킹의 정주 유적 '랑스오메도우(L’Anse aux Meadows)‘ 역사 지구

에리크의 아들 에릭손(Eriksson)은 1000년경 그린란드로부터 남쪽으로 항해하여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앞서 아메리카에 도착하였고 ‘빈란드(포도가 자라는 땅)’라 불렀다. 지금의 캐나다 래브라도, 뉴펀들랜드 지방이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랑스 오 메도우(L'Anse aux Meadows) 유적이 남아있다. 

한편 또 다른 바이킹인 덴마크계(데인)는 서남쪽 바다를 통해 서유럽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잉글랜드 남부, 프랑스 서북부,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로 진출했다. 이들은 프랑스 북부해안으로부터 센강을 거슬러 올라가 3차례나 파리를 점령하였고 여러 내륙 도시를 약탈하였다. 수년간 프랑스 내륙을 휘젓던 바이킹은 마침내 센강 하류에 정착하여 프랑스 왕과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노르망디 지역을 봉토로 받고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잉글랜드로 간 덴마크계도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처럼 템즈 강을 따라 내륙으로 전진하면서 약탈했다. 9세기가 되자 잉글랜드 동쪽 해안지대를 대부분 지배하였다. 이렇게 잉글랜드 내에 바이킹이 지배했던 광대한 지역(또는 바이킹의 법)을 ‘데인로(Danelaw)’라 한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동쪽으로 진출한 스웨덴계 바이킹

10세기 이후 잉글랜드와 바이킹 간 승부가 엇갈리다가 1016년 덴마크계 바이킹인 크누트(Cnut)가 승리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공 윌리엄이 영국을 침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노르망디 공국도 9세기에 프랑스를 침공한 바이킹이 세운 공국이었다. 결국 노르만 정복은 잉글랜드 땅 안에서 바이킹 끼리 싸움을 벌여 좀 더 일찍 유럽화한 바이킹이 승리한 사건이었다. 

서쪽 바이킹이 영국과 서유럽을 공략하는 사이 스웨덴계 바이킹은 동쪽으로 진출했다. 슬라브족의 땅인 발트 해 연안,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그곳이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흑해와 비잔틴 제국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흑해를 건너 아랍 및 동방의 실크로드와도 교역하였다. 

슬라브인은 스웨덴계 바이킹을 ‘배를 젓는 사람’이란 의미로 ‘루시(Rus)’라 불렀다. 루시의 지도자 류리크(Rurik)는 슬라브인의 요청으로 드네프르 강과 볼가 강 사이의 광활한 슬라브 족의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곳이 러시아의 기원이 된 키예프 공국이었다. 러시아 왕족은 대대로 류리크 가문의 후손이었다. 러시아(Russia)는 ‘루시인의 땅’, 즉 바이킹의 땅을 의미한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올라우스 마그누스(Olaus Magnus)의 『북방민족의 역사』에 등장하는 삽화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내륙은 수많은 큰 강과 호수가 있다. 바이킹은 바닥이 낮고 가벼운 드라카르를 이용하여 내륙을 통항했다. 발트 해에서는 네바 강을 거슬러 모스크바로 갔다. 거기서 드네프르 강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항해했다. 또 볼가 강으로 항해하면 카스피 해를 통해 이슬람 상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내륙의 강은 급류와 협곡이 많아 항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킹은 불굴의 전사였다. 그들은 폭포를 만나거나 강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배를 들거나 통나무를 밑에 깔고 밀면서 전진하였다. 배가 실제 산으로 갔던 것이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배가 산으로 갔던 적이 또 있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였다. 당시 비잔틴은 선박의 침입을 막고자 방어선인 골든 혼을 가로질러 굵은 쇠사슬을 걸어 바다를 봉쇄했다. 하지만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수많은 배를 끌고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산등성이를 넘어 쇠사슬 안쪽으로 침공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 요새는 함락되었다. 

바이킹 문화는 한때 야만적이고 투박하며 음습한 문화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바이킹의 문화를 본받아 해양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의 예를 기억해야 한다. 영국은 바이킹의 실체와 장점을 읽고 이를 이어받아 해가지지 않는 번영을 이루었었다. 

최근 바이킹 및 북유럽 신화를 주제로 하거나 미화한 작품들이 다양한 장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환타지 영화인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 그리고 《드레곤 길들이기》 등은 바이킹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되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자연환경의 북유럽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바이킹의 도전과 개척정신이 현대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이킹은 모험을 즐기는 용맹한 해양 민족의 표본으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하고 있다.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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