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열 여섯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독도는 우리 땅, 독도는 우리 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을 노래하며 “독도는 우리 땅!”을 외쳐봤을 것이다. 새해 첫날 TV 화면에 나오는 독도 일출을 보며 가슴 뭉클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독도를 떠올리며 흥분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대한민국 사람이 있겠는가?’ 

▲ (자료출처:해양경찰교육원) 독도 해상에서 촬영한 “8.15 광복절 기념 해양영토순례”

하지만 집단적이고 감성적 관심만으로 독도를 지켜낼 수는 없다. 우리의 시각을 넘어 외부에서 바라본 객관적 접근이 필요하다.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여 끊임없이 자기네 영토라 주장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의 독도에 대한 영토 주장의 논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독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 지위나 기반은 무엇인지? 객관적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이런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하고 국제사회에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자료출처:삼척시청) 강원도 삼척에 있는 이사부 사자상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지리적 증거, 실효적 지배에 관한 증거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자료와 책자가 나와 있다. ≪삼국사기≫에 512년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나무 사자를 이용하여 우산국을 합병했다거나 ≪고려사≫에 우산국에서 조정에 진상한 기록이 있다. 

 1403년 조선 태종 때 공도정책(空島政策, 왜구의 피해를 막고 노역을 면하려 섬으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섬을 비워두고 관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지만 수토사(搜討使, 섬을 수색하여 도망자 등을 토벌하는 정부 관리)를 두어 관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이 두 번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받았고, 고종 때는 김옥균을 개척사로 임명하여 독도를 개척하였으며,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발표하여 조선의 권리를 국제적으로 공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끊임없이 자기네 땅이라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독도의 경제적·군사적 가치를 넘어서는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쿠릴열도 문제로, 남쪽으로는 중국·대만과 센카쿠 열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이 조그만 섬인 독도에 열을 올리는 숨겨진 이유를 들여다보자. 

1904년 2월. 조선과 만주의 분할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치하던 일본이 여순항을 갑자기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순항의 태평양 함대를 잃은 러시아는 당시 최강인 발트 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발트 함대는 38척으로 대규모였으나 함포 성능에서 일본 함대보다 뒤졌다. 이에 맞서는 일본 함대는 12척으로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최신예 영국제 배에 성능 좋은 함포를 장착하였다.

▲ (자료출처:美 의회도서관) “토라지로 카사이”의 1904년 여순항 전투 기록화

전투는 일본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동해 쪽으로 이동하는 발트 함대  후미를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 함대는 유명한 ‘丁’자 대형으로 순항하며 이틀 동안 포격을 가한 끝에 독도 앞바다에서 발트 함대를 전멸시켰다. 러시아는 38척 중 19척이 침몰되었고, 6,1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은 단 3척을 잃는데 그쳤다. 일본 입장에서는 최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한 빛나는 승리였다. 

당시 일본 함대를 지휘한 사람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이었다. 그는 지금도 일본에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丁’자 대형으로 적을 공격한다든가 함포 사격에 중점을 두었다든가 하는 전술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것이었다. 도고는 실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썼던 병법을 깊이 연구하여 모방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소 “넬슨 제독(Nelson)에 비하는 것은 달게 받을 수 있으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 이순신이 장군이라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렇게 볼 때 독도 앞바다는 일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곳은 북쪽의 거인 러시아를 물리친 전승 기념지이자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한 국가적 성지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에도 일본이 왜 그리 독도에 집착하는지 그들의 속내를 알 듯도 하다.

한편, 일본이 억지를 부리는 논리 중 가장 강력하게 제시하는 것이 1905년 시마네현 고시 40호인데, 이 고시에 얽힌 일화가 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강제로 개방하기까지 일본은 외부 세계로부터 빗장을 걸어 잠그고 지냈다. 안용복이 2차례나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였을 때 조선 영토임을 인정했던 것이나 ‘데지마(出島)’를 제외한 항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쇄국정책을 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1842년 대국 청나라가 영국에 아편 전쟁에서 패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일본은 바다를 열고 외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식민지 지배방식을 모방하였고 선진 기술을 도입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잇따라 승리하며 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해양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일본이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억지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시마네현 고시 40호”

독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도 시대까지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할 만한 역사적 기록도 없다. 억지는 메이지 시대를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 40호에 ‘독도는 오끼도에 속한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했다. 

그런데 고시 40호와 다케시마의 날이 탄생한 배경에는 독도 강치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독도 강치는 동북아 바다 연안에 서식했지만 멸종한 바다사자의 일종이다. 울릉도, 독도, 오끼 등 동해의 섬과 연안 그리고 오호츠크,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 분포하였다, 대항해 이후 유럽인의 모피 사냥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면서 외딴 섬까지 진출하였다.  

당연하지만 외딴 섬은 생태학적으로 취약하다. 특히 독도처럼 규모가 작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고립된 섬에 사는 동물은 단순하고 평화로운 진화의 길을 걷기 때문에 그 생태계가 외부의 충격에 연약하다. 갑작스런 외부 침입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항하거나 도망칠 줄 모를 뿐 아니라 도망칠 수 있는 공간도 없어 순식간에 멸종에 이른다. 베링 섬의 스텔러 바다소(Steller's sea cow)가 그랬고, 모리셔스 섬의 도도새(Dodo)가 그랬다. 수만 마리에 달하던 독도 강치도 일제 강점기에 유사한 운명에 처해졌다.      - 다음 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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