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스무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불법 중국어선의 원조, 황당선(荒唐船)을 아시나요?

최근 들어 중국어선의 불법 남획은 全지구적인 문제가 되었다. 중국어선은 일본, 러시아 등 동북아를 비롯해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남중국해까지 진출한 지 오래다. 심지어 멀리 남미의 아르헨티나, 칠레 앞바다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도 출몰한다. 남극해나 북극해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그들의 마구잡이식 어획은 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국을 침범하는 불법 중국어선 여러 척을 붙잡아 폭파시켜, 해양영토 수호의지를 보여준 인도네시아 여성 해수부장관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이들의 불법조업으로 가장 피해를 입는 곳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서해바다이다. 그 중에서도 서해 5도의 피해가 심각하다. 이곳은 북한과 인접하여 외국어선 조업이 원천적으로 불허되는 해역이다. 반면 중국어선 입장에서는 적발 되더라도 NLL(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도주할 수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된다.

▲ (자료출처:해양경찰청) 쇠창살 등 등선 방해물을 설치하고, 흉기를 이용하여 폭력 저항하는 불법 중국어선

이렇게 NLL 해역에서는 남북관계를 교묘히 이용한다. 기상악화를 틈타 경계선을 줄타기하며 싹쓸이 조업을 감행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삼지창을 빼닮은 쇠창살 등을 설치해놓고 등선을 방해한다. 해경 단속요원이 등선하면 도끼, 낫,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한다. 심지어는 무리를 지어 불법 조업하다가 적발되면, 도주하기 보다는 집단으로 선체충돌 등의 폭력을 행사한다. 

저항이 집단화․폭력화되면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 소청도 인근에서 故이청호 경사가 격렬한 몸싸움 끝에 선장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2016년 10월에는 중국어선 여러 척이 단속중인 해경의 단정을 고의로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조업이 허가되는 태안~제주에 이르는 서해 EEZ(배타적 경제수역)도 불법 조업은 예외가 아니다. 야음을 틈타 경계선을 넘어 들어와 고기를 잡다가 단속이 시작되면 밖으로 도주하는 숨바꼭질 조업을 한다. 여기서도 흉기를 휘둘러 등선을 방해하거나 선박 여러 척을 묶어서 집단으로 행동하는 연환계(連環計)를 쓴다. 또 선박에 대나무나 쇠창살을 설치하여 철갑선 형태로 운항하기도 한다. 우리바다를 수호하는 단속 현장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런데 근간의 문제로만 알고 있던 중국어선이 조선시대에도 우리 바다를 활개치며 해산물을 잡아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시계를 되돌려 500년 전  바다 사정을 살펴보자. 

▲ (자료출처:영국 국립해양박물관) 황당선으로 불린 17세기 중국의 정크선 상상화

때는 1500년경 조선 중기. 당시에도 서해안 일대를 침범해 어족자원을 싹쓸이하는 중국어선이 있었으니, 이 배를 황당선(荒唐船)이라 불렀다. 이때의 황당은 ‘황당하다’ 할 때의 ‘황당’과 같은 의미이다. 지금은 ‘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황당하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국적 불명의 배를 황당선이라 하였고, 국적 불명의 외국인을 황당인이라 불렀다.

황당선은 중종 35년(1540) 최초로 출현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해도 풍천부에 황당선 1척이 바람이 심해 정박하였는데, 붙잡아 조사하니 4명의 의복 중에는 중국 것도 섞여 있어…… 필시 중국 사람들일 것이다.”(중종실록 중에서) 황당선은 국적이 불분명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 배였다. 선원은 일본인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중국인이었다. 

처음에는 조선 정부도 이들을 온건하게 대했다. 상국(上國)인 명나라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또 해안방비 위주여서 바다에 나가 황당선을 잡아들일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다. 또한, 황당선 선원들은 은밀히 출항하여 불법어로를 하거나, 사(私)무역을 하는 자들이어서, 붙잡히는 경우 대부분 육로 송환을 극구 거부하였다. 이렇듯 황당선을 잡아도 뒤처리가 복잡하였다. 그래서  지방 관리들은 사건을 무마하거나 미봉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명・청 교체기를 지나도 황당선은 없어지지 않았다. 숙종 27년(1701)에는 황당선의 출몰이 한층 더 잦아지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당시 명조 회복을 위해 바다에서 활동하는 세력을 방지하고자, 1656년 해금령(海禁令,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 1661년 천계령(遷界令, 바닷가로부터 30리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내렸다. 그러다가 이 세력이 소탕되자 개방정책을 펼쳤다. 1684년 반포한 전개령(展界令)은 해금을 풀어주는 내용으로, 민간인 해상무역을 허락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동남 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이나 불법 선박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해안 일대의 수령들에게 황당선을 발견하는대로 나포하도록 하였지만, 빈약한 수군 병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당선은 수십 척씩 떼를 지어 다니면서 조선 수군이 가까이 다가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황당선의 목적은 지금의 불법 중국어선과 마찬가지로 조선 근해의 풍부한 해산물을 잡는 것이었다. 이들은 10여척씩 선단을 구성할 정도로 몰려다녔다. 배 1척에 70~80명 정도 승선하였다. 때로는 백령도, 대청도 등 섬에까지 상륙하여 노략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 (자료출처:서울대 한국학연구소,해양경찰청) 조선후기 백령진도(좌), 연환계 시위중인 중국어선(우)

대표적인 사건이 영조 30년(1754)에 발생했던 「백령도 황당선 사건」이다. 황해 수군 책임자였던 신사언은 백령도에 상륙한 황당선의 중국인 18명을 잡아 육로를 통해 중국에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인근 10척의 배에 있던 중국인 500~600명이 떼를 지어 몰려와 백령도를 포위하며, 잡아간 18명을 달라고 겁박하였다. 그들은 이미 7명이 육로를 통해 이송된 사실을 알게 되자, 나머지 11명을 빼앗고 조선 수군 한사람도 잡아갔다. 요즘 중국어선이 연환계를 사용하며 떼 지어서 단속에 무력시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후에 영조는 황당선에 대처하지 못한 신사언을 몸소 심문하여 처벌했다. 

조정에서 황당선 처리에 대해 지방관에게 죄를 묻자, 출몰 사실을 아예 보고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다. 숙종 8년(1682) 때의 일이었다. 황당선 십여 척이 황해도 앞바다 초도라는 섬에 정박하고 며칠간 머물렀다. 하지만 이 일대의 방비를 담당한 첨사 장후량은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의 입을 단속하여 황당선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은폐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장후량을 추궁하고 군법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황당선에 대해 조선이 손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영조 12년(1736) 수군만으로 황당선에 대처하기 어려웠던 황해도 수사 이한필이 장계(狀啓, 지방관원이 조정에 올리던 보고)를 올렸다. 이를 수용하여 황해도 해주, 강령, 장연, 옹진, 풍천 등 5개 고을에 추포무사(追捕武士)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황당선을 전문적으로 추포(체포)하는 군이었다. 총 690명이었으며 매달 각 230인씩 3개조로 교대 근무하였다. 또 6~70명의 추포무사를 태운 추포선(追捕船)을 배치하였다. 이 배는 기동성이 뛰어났는데, 황당선의 약탈 행위를 막거나 이국 선박이 연안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봉쇄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서해 5도에서 중국어선을 단속하는 해양경찰과 거의 유사한 조직이었다.   

▲ (자료출처:경상북도) 조선후기 섬에 파견된 수토사들의 이름을 새긴 각석문

수토제(搜討制)도 확립하였다. 수토란 조정에서 섬에 관리를 파견, 그 형편을 조사하고, 잠입한 백성이나 황당선이 있는지 수색하여 토벌하는 것이었다. 동해는 지방관이, 서・남해에는 부사, 병사 등 정규 수군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때로 수토감관(搜討監官), 만호(萬戶) 등 임시직책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수토와 관련하여 조선이 중국에 속한 섬으로 사람을 보내 수토를 행한 특이한 기록이 있다. 연산군 6년(1500)에 있었던 「해랑도(海浪島) 수토사건」이다. 해랑도는 지금의 중국 뤼순반도 다롄시 앞바다인 해양도(海洋島)로 추정된다. 이 섬에는 부역을 피해 숨어 들어간 조선인이 중국인과 섞여 살면서 불법행위나 해적질을 일삼아 크게 문제가 되었다. 

해랑도 조선인을 수토하려는 계획은 성종때부터 있었으나, 한동안 중국 정부의 답변이 없었다. 그러다가 1500년 4월 중국으로부터 조선의 수토를 허락하는 내용의 칙서가 왔다. 이에 그해 6월 조선은 무사를 보내 해랑도를 수토하여 조선인을 쇄환(刷還, 외국 유랑 동포를 데리고 오는 일)하였다. 외국 영토에까지 가서 자국민을 소환해온 특이한 사건이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 나라간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단호함은 고금과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 (자료출처:인천해경서) 인천해경서 전용부두에 세워진 故이청호 경사 흉상

500년전 영조는 「백령도 황당선 사건」을 보고받고 이렇게 말했다. “중국배가 많기는 하지만 짧은 병기조차 없고, 백령진이 약하기는 하지만 군사와 무기가 있다. 중국인들을 뜻대로 죽일 수는 없더라도, 어찌 막을 수 없겠는가….”(영조실록 중에서)

이러한 영조의 진노는 순직한 故이청호 경사의 외침과 다르지 않으리라. “저 수평선을 넘어오는 외국어선들을 보면 피가 끓습니다. 이 바다가 누구의 바다인데.....”(인천해경서 전용 부두, 「故이청호 경사」 흉상 글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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