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스물한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타이타닉호 침몰에 숨겨진 비밀, 증기선 속도 경쟁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도박에서 딴 티켓으로 당신을 만난 거야”

▲ 영화 “Titanic”중 한 장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화가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分)이 타이타닉호에서 로즈(케이트 윈슬렛 分)에게 속삭이던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하던 잭은 막강한 재력가의 약혼녀 로즈에게 한 눈에 반한다. 잭은 3등칸에, 로즈는 1등칸에 승선했지만 둘은 신분의 차이를 무시한 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영화에서 잭과 함께 로즈가 뱃머리에 서서 두 팔을 벌리는 장면은 모든 연인들의 로망이 되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1912년4월10일, 첫 항해를 떠나는 타이타닉호

1997년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을 맡은, 영화 ≪타이타닉(Titanic)≫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화는 「재난속의 사랑」이라는 소재로 수많은 관객들을 전설의 타이타닉호 갑판 위로 안내했다. 스크린에는 귀족들의 영광과 금지된 사랑,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교만과 운명, 그리고 자연의 위력 앞에 무력한 인간의 존재를 감동적으로 그렸다. 영화는 아카데미 최다 11개 부문 수상,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입 총 21억 달러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1912년 4월 14일 현실에서 일어났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더 영화 같았다. 타이타닉호는 영국 사우스햄프턴에서 2,20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빙산을 피하려 급회전을 한 타이타닉호는 배의 오른편이 빙산과 충돌하였다. 그리고 두 시간여 만에 1,500여명의 승객과 함께 대서양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타이타닉호는 배수량(排水量, 물에 뜬 배가 그 무게로 밀어내는 물의 량) 4만6천톤, 길이269m, 높이는 20층으로 당시 가장 큰 배였다. 뿐만 아니라, “이중바닥, 16개 방수격실, 일정 수위가 되면 자동으로 닫히는 문” 등 최고수준의 기술이 적용되어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라 여겨졌다. 

그렇다면 왜? 배 건조기술의 총합체였으며, 누구도 침몰할 거라고 상상 못했던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것일까? 여기에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최초의 배로 볼 수 있는 기원전 3000년경 폴리네시아인의 아웃리거 카누(outrigger canoe)로부터 19세기 증기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물 위를 항해하였다. 때로는 육체적인 힘으로 힘차게 노를 저어 나아갔고, 때로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찰한 후 돛을 이용하여 전진하였다. 급기야 증기기관을 발명하였고, 증기기관에서 얻은 동력을 이용하여 배를 움직였다.  

▲ (자료출처:www.memim.com) 좌측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아웃리거”, “코그선”, “크노르”, “정크선”

그런데 수천 년 항해의 역사에서 배의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과 물건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였던 배는 더욱 그랬다. 상선은 비교적 장거리를 운항하였고 많은 화물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보다는 얼마나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래서 많은 배가 둥글고 넓은 생김새로 제작되었다. 고대 이집트 교역선은 폭이 길이와 비슷할 정도였고, 중세 북유럽 코그선(cog)도 넓고 둥근 모양이었다. 중국의 정크선(junk)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원리가 모든 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속한 이동과 회전이 필요한 전투용 배는 단거리 속도가 생명이었다. 그래서 뾰족하고 긴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최초의 전투용 배를 만든 사람들은 지중해를 벗어나 항해했던 페니키아인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전투선인 갤리선(galley)이나 바이킹의 크노르(knorr)도 순간적으로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한편, 범선을 이용하여 큰 바다를 건너는 장거리 항해는 8세기 아랍 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대륙 간 사람과 물자가 본격적으로 이동하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대항해시대 이후인 16세기부터였다. 그러나 대항해시대까지만 해도 항해에서의 속도는 큰 의미가 없었다. 대양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 자체로 항해는 성공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얼마나 많은 황금과 후추를 싣고 오느냐가 중요했지, 얼마나 빨리 항해하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이렇게 당시에는 전투를 제외하고 사람과 물건을 운송하기 위해 속도 경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대표적인 홍차운송 클리퍼선 커티삭호 그림

하지만 바다를 통한 대륙횡단이 일상화 되어버린 19세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여객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배도 속도가 중요해졌다. 산업혁명으로 증기선이 발명되었지만 증기선이 범선을 곧바로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1900년 중반까지도 범선역사의 최종버전인 ‘클리퍼(clipper)’가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며 바다를 누비고 있었다. 

클리퍼는 예리한 뱃머리에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날렵한 배였다. 배 길이와 맞먹는 높이의 마스트가 3개 있으며, 여기에 가로돛과 세로돛을 여러 개 달아 속도를 최대한 높였다. 이전까지의 기술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범선이었다. 그 이름처럼 바람을 받으면 마치 칼로 천을 찢는 듯이 물을 가르고 질주(clip)하였다.

당시 클리퍼는 세계 곳곳을 연결하는 운송수단이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아편을 운반하는 「오피엄 클리퍼(opiumclipper)」, 호주에서 유럽으로 양모를 운반하는 「울 클리퍼(woolclipper)」,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뉴욕에서 남미 끝단 ‘혼곶(CapeofHorn)’을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혼 클리퍼(hornclipper)」 등이 있었다. 운송 항로별로 곳곳에서 속도경쟁이 펼쳐졌다. 속도는 곧 돈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 유럽으로 홍차를 운반하는 「티 클리퍼(teaclipper)」가 가장 유명하였다. 

홍차 운송(tea race)은 1849년 항해조례가 폐지되면서 영국의 독점에서 자유 경쟁으로 바뀌었다. 새로 수확한 좋은 품질의 차를 최대한 신속하게 운반하는 배는 큰 이익을 남겼고 명성도 쌓을 수 있었다. 중국 남부에서 런던까지, 홍차를 실은 쾌속 범선들의 치열한 속도경쟁이 벌어졌다. 클리퍼가 도착하는 런던의 템즈 강변에는 스릴 만점의 레이스에 열광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그 중에 영국의 유명한 위스키 이름으로 명명된 「커티삭호(Cutty Sark)」와 「서모필레호(Thermopylae)」의 레이스는 유명하다. 이때 서모필레호의 평균 시속이 26km였다고 하니 쾌속선의 왕좌로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클리퍼의 속도경쟁은 어떠한 차 광고보다도 큰 효과가 있어 홍차 소비량을 급증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런던에서 아시아까지 항로가 대폭 단축되자 홍차 운반경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는 클리퍼의 시대가 저물고 증기선의 시대가 도래했다. 초기 증기선은 커다란 마차바퀴처럼 생긴 외륜(外輪)을 배 양쪽에 달고, 증기기관을 이용해 이를 회전시켜 항해하였다. 외륜식 증기선을 이용하여 항해하는데 최초로 성공한 사람은 1807년 ‘로버트 풀턴’ 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증기선은 검은 연기를 뿜으며 석탄을 마구 먹어대고 종종 폭발사고를 일으키는 괴물 정도로 인식되었다. 기관을 움직이는데 많은 석탄이 필요했고, 먼 바다에서 고장이 나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초기 증기선은 대부분 돛을 달고 있었다. 증기기관만으로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배는 1838년 「시리우스호(Sirius)」였다. 범선으로는 40일이 넘게 걸리던 항로를 18일만에 횡단하였다. 이후 증기선이 대형화되면서 1840년경 스크류 방식이 도입되었다.

▲ (자료출처:영국 Daily-mrror지) 1929년 1면에 실린 독일 여객선 블루리본 수상 기사

유럽과 아메리카를 다니는 증기선의 정기항로가 성장하면서 선박회사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었다. 회사들은 자사 여객선의 이미지와 평판을 높이는데 주력하였다. 이에 더해 민족국가 개념이 생기면서 여객선 속도경쟁에 불을 붙였다. 승객들도 매년 더 빠른 속도를 요구했고, 느린 선박에 대해서는 등을 돌렸다.

그런 가운데 북대서양을 가장 빠른 평균속도로 주파하는 증기선에 파란색 리본을 수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블루리본(blue-ribbon)이었다. 이를 수상한 배는 블루리본을 배의 마스트(mast, 배의 중심선 상의 갑판에 수직으로 세운 기둥)에 자랑스럽게 달고 항해했고, 승객들은 이런 배를 타고 싶어 했다. 블루리본의 파란색은 영국 기사의 최고단계인 가터(garter) 훈장의 색깔이며, 영어로 ‘blue blood’는 고귀한 혈통을 의미했다. 

블루리본의 보유를 둘러싼 경쟁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국가 간 자존심 대결로까지 번졌다. 1897년 독일 여객선 「빌헬름 데아 클로제호」가 12노트 속력으로 블루리본 상을 받았다. 이에 영국은 선박회사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여 「모레타니아호」를 건조하였고, 1909년 26노트의 속력으로 블루리본 상을 되찾아 왔다.   

여객선 타이타닉호도 바로 그런 속도경쟁의 파고 속으로 내몰렸다. 초호화・최고속 타이틀 획득의 강박에 사로잡힌 배는 암흑의 바다 위를 질주했다. 타이타닉호의 순항 속도는 약 21노트(시속 39km) 정도였지만, 빙산의 존재를 알고도 무모하게 22.5노트(시속 41km)의 속도를 유지했다. 근처의 다른 배로부터 빙산에 주의하라는 무선연락을 받았으나 이마저도 무시했다. 결국 타이타닉호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 (자료출처:영국 인디펜던트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묘사한 그림

블루리본 타이틀을 외치며 '자연에 대한 기술의 승리'로 인식되었던 타이타닉의 항해는 결국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경고'로 끝을 맺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하는 태도는 오만이 아닌 겸손이라는 것을 큰 대가를 치르고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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