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스물 세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중세 유럽을 먹여살렸던 물고기, 청어와 대구 

언뜻 보면 기독교와 물고기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예수님 탄생지가 유목지대인 예루살렘이고 성경에도 유목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 속에서는 의외로 물고기와 관련된 비밀코드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五甁二魚)의 기적이 등장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빵과 물고기는 이후에도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연결되어 여러 그림 속에 나타난다. 

3세기 로마 카타콤인 칼릭스투스(Calixtus)에 그려진 프레스코에는 식탁위에 빵과 물고기가 가득한 바구니가 등장한다. 또 한때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의 6세기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등장한다. 유명한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도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먹는 음식 메뉴는 물고기이다. 

▲ (자료출처:Google) 6세기 그려진 최후의 만찬

또한 육식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누가 복음 24:42~43)”이 장면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제자들 앞에 부활한 예수께서 생선을 먹는 모습이다.
이처럼 물고기는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로 기독교에서 신성하게 여겨졌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물고기를 먹는 것은 예수의 육신을 먹고 예수와 일체가 되는 행위로 간주 되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유럽에서도 한때 물고기에 대한 폭발적 수요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중세 때 기독교 관습 때문이었다. 육식 습관은 게르만족이 로마를 점령하면서부터 유래되었다. 유럽 중북부 내륙 지방에 살았던 게르만족은 대부분 가축을 길러 식량으로 삼는 육식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 정착되었다. 이후 기독교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중세 천 년 동안 유럽인의 가치관과 문화를 지배하였다. 기독교 전파에 따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얽힌 금욕주의 식문화가 자연스럽게 유럽 전역에 같이 전파되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졌던 사순절은 중요한 날이었다. 이 40일 동안은 저녁 식사를 제외하고 단식을 하였다. 특히 금요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날로서 경건한 마음으로 고난을 함께해야 했다. 

▲ (자료출처:Google)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순절)

중세 기독교 관습에 따르면 더운 피를 가진 동물 고기를 먹는 것은 탐욕스러움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금요일은 육식을 엄격히 금했다. 심지어 금요일에 육식을 하면 처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물고기는 더운 피를 가진 음식에 해당되지 않았고 금요일에도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식을 금지하는 날은 금요일 뿐 아니라 여러 성일(聖日)로 확대되었다. 한때는 이 금지일이 일 년의 절반이 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육식을 못하는 날에는 유럽 전역에 물고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어부들은 금요일에 생선수요를 맞추기 위해 수요일과 목요일에 물고기를 잡았다. 심지어 루이의 14세 금요일 만찬에 올릴 신선한 생선을 구하지 못한 요리사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서는 앞마당에 연못을 파는 곳이 많았다. 시장에서 미리 가져온 생선을 신선하게 보관하거나 자체적으로 생선을 길러 금요일 식탁에 올리기 위한 용도였다. 유럽 전역에서 시장은 목요일만 되면 생선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적 식문화에 부응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물고기는 대구와 청어였다. 이 물고기들이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가 중세인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들이 대량 포획이 가능한 엄청난 개체 수를 자랑했고, 두 번째는 상하기 쉬운 물고기를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저장 방법이 개발되어 멀리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이름처럼 입 큰 고기인 대구(大口, cod) 이야기를 해 보자. 대구가 상업용으로 널리 이용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 놈은 질병과 추위에 강하고 다산성이다. 게다가 얕은 해안에 서식하며 식탐이 강해 잡기가 쉽다. 또 느리게 헤엄치면서 생긴 흰 살에는 지방이 거의 없고 단백질이 풍부하다. 그리고 잡은 대구는 버릴 부위가 없을 정도로 이용 가치가 있다.

중세 대구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바스크족(Vasco)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피레네 산맥 일대인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서남부에 살고 있는 비밀스런 민족이다. 바스크족은 언어와 혈통이 유럽인과 완전히 다른 민족이다. 산악민족이면서 오랫동안 근처 비스케이만(Bay of Biscay)에서 고래를 잡던 해양 민족이다.   

바스크족은 오랫동안 고래를 잡아왔다. 고래를 잡으러 떠났던 일족이 북아메리카에서 엄청난 대구 어장을 발견했다. 물 속에 대구가 얼마나 많은지 그위를 밟고 걸어다녀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이들이 어디서 많은 양의 대구를 잡아오는지 알지 못했다. 캐나다를 발견했다고 알려진 카르티에(Cartier)가 16세기 동부에 처음 당도했을 때 천 여척의 바스크족 배가 이미 조업하고 있었다고 한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바칼라오

이들은 고래에 적용했던 염장 기술을 대구에 적용하였다. 이렇게 소금으로 염장한 대구를 스페인에서는 바칼라오(bacalao)라 부른다.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진 염장 대구를 물에 불리면 부드러워지고 풍미가 배가 된다. 지금도 바스크족의 도시 스페인 빌바오(Bilbao)에서는 그들의 소울푸드 바칼라오가 최고의 요리로 꼽힌다.  

바이킹도 대구를 잡아 저장했다. 태양빛이 적은 북해에는 소금이 없어 염장이 어려웠다. 그래서 북해의 찬바람에 그대로 말려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만들었다. 딱딱한 상태의 대구는 상하지 않고 장기가 보관하기 편리했다. 이것을 부스러뜨려 씹어먹으면 훌륭한 식량원이 되었다. 마치 몽골군이 말린 육포를 씹으며 세계를 정복했듯이 바이킹도 말린 대구를 싣고 항해와 정복활동을 벌였다. 

▲ (자료출처:Google) 혹동고래 와 청어떼

한편, 청어는 정어리와 닮았고 기름기가 많은 등푸른 생선이다. 겨울철 별미인 과메기 재료로 청어를 사용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꽁치가 대신하고 있다. 청어는 수백만 마리에서 수억 마리까지 군집을 이룬다. 자연 다큐 등을 보면 청어 떼를 발견한 혹등고래가 아래에서 나선형으로 돌면서 뿜어낸 거품으로 벽을 만들어 청어 떼를 가둔 뒤 수면 쪽으로 올라가며 삼키는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

청어는 중세 유럽에 증가하는 물고기 수요를 해결하고자 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이나 근해에 물고기를 잡아 수요를 감당하였다. 그러나 점점 물고기 구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먼 바다까지 나가 청어를 잡기 시작했다. 청어에 특히 관심을 가진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저지대에 자리잡은데다 “더치 페이(Dutch pay)”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천연 자원이 부족했다.

청어는 발트해와 북해에서 잡혔는데 기름기가 많은 등푸른 생선이라 쉽게 부패하였다. 잡은 후 24시간 이내에 처리하지 않으면 상해버렸다. 그래서 여러 날을 조업하거나 많은 양을 잡아 저장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널린 청어를 얼마나 잡느냐보다는 상하기 전에 청어를 얼마나 빨리 처리해 저장하느냐가 관건이었다.

▲ (자료출처:Hilmar Johan nes Backer, 1821) 14세기 네덜란드 어부 빌렘 벤켈소어

그런데 1358년 빌 렘 벤켈소어(Willem Beukelszoon)라는 한 어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여 네덜란드에 부를 안겨 주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단시간에 많은 청어를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내장을 단번에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발명하였다. 빠른 속도로 내장을 베어내고 염장하여 통에 보관하게 됨으로써 장기간 그리고 다량의 조업이 가능해졌다. 네덜란드에 다른 행운도 찾아왔다. 주로 발트해에서 산란하던 청어가 15세기 초 기후변화로 대량으로 북해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코 앞에서 손쉽게 청어를 잡게 되었다. 

중세 네덜란드 경제를 일으켜 세운 것이 청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때 전 국민의 1/5이 청어잡이에 종사할 정도였다. 1620년에 네덜란드 선박수는 2천 척이 넘었는데 대부분 100톤 전후의 청어잡이 배였다. 이렇게 수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이 발달하였다. 

나아가 선박 건조에 있어 표준화와 경량화를 통해 적은 선원으로 많은 화물을 나를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이렇게 되니 네덜란드는 화물선 제작과 운송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해운업이 발달하면서 이에 연관되는 금융업, 보험업도 함께 발전하였다. 연관 산업의 발전은 결국 자본주의 맹아인 최초의 주식회사, 즉, 동인도회사를 탄생시켰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네덜란드가 “청어의 뼈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가면 어디서나 청어 절임인 하링(haring)을 먹을 수 있다. 썬 양파를 곁들이거나 빵에 싸서 먹는 대중적인 요리이다. 하지만 처음 시도하는 외국인에게는 비릿하고 삭힌 청어 냄새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코를 막고 인상을 찌그리며 장열하게 시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마치 처음 맛보는 삭힌 홍어에 진저리를 치듯이. 그러든 말든 네덜란드 사람들은 손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즐긴다. 하링은 그들의 역사와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고향 같은 음식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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