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스물 다섯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부드러운 황금' 모피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의 후예들

영화 ≪인터스텔라≫는 지구의 종말을 그리고 있다.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는 지구를 버리고 대체 행성을 찾아 떠나는 비장한 장면이 나온다. 마치 성경 속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푸른 별 지구의 미래는 이 영화에서처럼 생물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변할 것인가?

▲ (자료출처:flickr.com)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지구 생태계는 이제까지 다섯 차례의 대량 멸종을 경험했다고 한다. 대량 멸종(mass extinction)은 동식물종의 75% 이상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을 가져온 것은 운석과의 충돌이나 급격한 기후 변화, 수면 상승 등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지적하듯이 인류는 다른 동물 종에게 치명적인 종이다. 인류는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를 떠나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이를 증명하였다. 인간이 이동하고 도착하는 정착지마다 학살과 멸종이 이어졌다. 가는 곳마다 대형 동물, 그러니까 먹을 거리가 좀 있는 동물은 모두 사라져갔다. 유라시아를 거쳐 아메리카로, 태평양의 섬을 지나 호주로, 가는 곳마다 결과는 비슷했다. 

대항해 출항 신호는 대량 멸종의 전초였다

하지만 이것도 유럽인이 배를 타고 대항해에 나서기 시작한 16세기 이후와 비교하면 별것 아니다. 탐험의 깃발이 올라가자 멸종의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제6의 대량 멸종이 본격화되었다. 이전의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나 인간에 의하더라도 국지적 형태로 진행된 것과는 달랐다. 바다를 통하여 전 지구적으로 항해하여 나아갔고 다양한 종에 걸쳐 광범위한 참극이 시작되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 전에도 유럽에는 동물 학살이 있었다. 서식지 파괴나 식용으로, 스포츠나 볼거리를 위해서, 보온이나 장식용으로 야생 동물을 죽였다. 인구가 늘면서 다양한 동물이 유럽에서 사라졌다. 소의 조상인 오록스, 유럽 들소, 날지 못하는 바닷새 오크, 카스피 호랑이, 바바리 사자, 유럽 표범과 큰 곰 등이 멸종되었다. 생존한 종들도 그 수가 심각히 줄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신대륙 아메리카 들소”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은 신대륙으로 쇄도하였다. 최초로 아메리카, 호주, 태평양의 섬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새롭고 풍부한 자연에 놀랐다. 1658년 오대호에 도착한 프랑스인은 “물고기와 철갑상어가 잔뜩 있어 연대 하나를 한 달 먹일 식량도 몇 시간이면 구할 수 있다”고 적었다. 도끼 자루를 던져도 철갑상어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또 18세기 말 호주에 도착한 쿡(Cook)은 “물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그물을 뚫을 지경이고, 새들은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잡기가 식은 죽 먹기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럽인이 도착한 모든 곳에서 살육이 시작되었다. 들판을 가득 메웠던 아메리카 들소가 대부분 사라졌고, 몇 시간 동안 하늘을 빽빽이 메우며 날아갔다는 나그네 비둘기(북아메리카 새의 1/3을 차지하던 종으로 10조 마리 정도로 추정됨)도 1914년 멸종되었다. 호주에는 유럽에서 들여온 소, 양, 돼지, 낙타가 토종 야생 동물을 대치했다. 몇 마리 들여왔던 토끼가 5억 마리로 늘어났고 운반용으로 들여온 낙타는 호주 사막으로 뛰쳐나가 아랍의 낙타 수 전체보다 많아졌다. 이렇게 인간의 필요에 따라 들여온 가축이 예상치 못한 재앙으로 발전하였다. 

부드러운 황금을 찾아 나서다 

‘검은 황금’후추를 찾아 떠났던 콜럼버스의 후예들은 이제‘부드러운 황금’으로 불리던 모피에 매료되었다. 모피는 유럽에서 수요가 넘쳐났고 그만큼 큰 돈벌이가 되었다. 로마시대부터 모피는 유럽에서 교역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중세 초가 되자 모피가 보온을 위한 용도뿐 아니라 신분을 상징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귀족이나 왕실에서 수요가 폭증하였다. 헨리 8세가 입는 가운 하나에 350마리 담비 가죽이 쓰였다거나 리처드 2세는 한 해에 10만 마리의 다람쥐 가죽을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자료출처:Google) “스텔라바다소 남획 및 멸종”

16세기가 되자 남획으로 유럽에서 모피 동물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자 러시아 지역까지 담비, 여우, 비버, 다람쥐를 찾아 나섰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개척하게 된 것은 모피 때문이었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18세기 말에는 북태평양 베링 해의 해달, 물개 가죽으로 눈을 돌렸다. 1750년~1790년 사이 25만 마리 해달을 잡았다. 몸무게가 코끼리보다 무거웠던 스텔라바다소도 이때 발견하였으나 27년 만에 멸종하였다.   

한편 북아메리카도 유럽인의 탐욕스런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피를 갈구하던 러시안 모피상들은 베링 해를 넘어 러시아령 알래스카로 진출하였다. 또한 대서양을 건너 온 유럽인이 북아메리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하게 한 개척의 원동력은 비버 모피였다. 강과 하천에 득실대고 있던 아메리카 비버는 덫으로 잡기가 쉬웠고 유럽 비버보다 몸집이 컸기 때문에 모피 량도 많았다. 

캐나다를 최초로 탐험했다고 알려진 인물인 카르티에(Cartier)는 사실 모피상이었다. 그는 1534년 원주민과 처음 접촉했을 때 비버 가죽을 교환했다. 유럽 모피상들에게 캐나다는 비버가 득실거리는 기회의 땅이었다. 곧 조직적인 학살과 교역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직접 잡기도 했지만 원주민이나 부랑자를 고용하여 대량으로 비버를 사냥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비버 모피”

1840년 한 여행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체를 싹쓸이했다. 미시시피에서 서쪽의 콜로라도까지, 북쪽의 빙하지대에서 멕시코까지 비버 사냥꾼은 모든 계곡과 강에 덫을 놓았다”곰, 여우, 들 토끼, 담비, 수달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유명한 캐나다 유통회사인 허드슨 베이 컴퍼니(HBC)도 당시 영국이 만들었던 모피 회사가 기원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비버 가죽에 대한 이권을 놓고 7년 동안‘비버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패배한 프랑스가 캐나다에서 지배력을 상실하고 물러났다. 이로 인해 캐나다는 지금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동부 퀘백주 등에서는 프랑스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바다에서 나타나는 멸종의 징후

유럽인의 동물 학살은 바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의 경제성을 가진 동물은 고래였다. 바스크족이나 북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래를 잡아왔다. 그러나 상업적 목적으로 대규모 포경이 시작된 것은 16세기 이후 유럽인에 의해서였다. 석탄과 석유를 사용하기 전 포경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고래 기름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비싸게 팔려 나갔다.

▲ (자료출처:stock.adobe.com) “바스크족의 포경 산업”

17세기 말부터는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뉴잉글랜드에서 포경이 시작되었다. 초기 연안에서 수염고래나 북극고래를 잡았다. 이후 향고래가 품질 좋은 기름을 다량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포경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의 포경선은 이제 혼 곶을 돌아 태평양까지 진출했다. 

19세기 미국의 포경은 이제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했다. 세계 최대 포경의 전진기지였던 뉴잉글랜드 항구들에는 포경선과 고래처리 공장으로 가득했다. 

1864년 모선에서 포를 쏘아 고래를 공격할 수 있는 작살포를 발명하였다. 이 발명은 포경의 산업화 시대를 열었고 빠르게 헤엄치는 대형종까지 멸종위기로 내몰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래들의 고향인 남극 바다에는 포경포를 갖춘 포경선과 거대한 가공선이 가득하게 되었다. 이들 움직이는 고래 공장은 경제적 이윤이 바닥에 이르기까지 학살을 지속했다. 

한편, 바다에서도 모피를 찾아 나섰다. 바다표범, 물개 등은 18세기 후반에 남대서양과 남극해에서 살육당했다. 육지에서 새끼를 낳고 키우는 습성을 이용해 해안에 올라오는 것을 때려잡았다. 배 한 척이 한 철에 몇 만 마리를 죽였다. 한 지역이 멸종되면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식은 비버의 경우와 비슷했다. 이후 남인도양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고 다시 호주 지역으로 옮겨갔다. 

북대서양 얼음 위에서는 하프 물범이 방망이를 맞고 죽어갔다. 새로 태어난 새끼 물범의 하얀 모피가 주로 표적이었다. 알류산 열도나 알래스카 부근에 러시아인 해달 사냥꾼이 해달이 바닥나자 바다표범으로 눈을 돌렸다. 한 마리 몸무게가 수 톤에 이르는 코끼리 바다표범은 모피가 아니라 기름을 얻기 위해 잡았다. 이런 식으로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물범류가 어림잡아 6,000만 마리가 도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는 영원히 보지 못할 경이로운 친구들

대항해가 인간에게 미친 여파가 세계의 식민지화였다면, 동물 생태계에 미친 후폭풍은 종의 멸종이었다. 탐험이라는 이름으로 전 지구적으로 행해진 살육은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가져왔다. 고립된 섬이나 지역의 환경에 맞춰 진화해 온 고유종들은 갑작스런 인간 출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멸종 동물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는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친구들은 이렇게 사라져 갔다.

▲ (자료출처:Google) “도도(dodo)새의 멸종”

멸종 동물의 상징으로 인용되는 도도(dodo)새는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었다. 새 이름이 포르투갈어로‘어리석다'라는 의미에서 왔다. 도도새가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날지도 못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도도새는 섬에 맹수가 없었기 때문에 날개가 퇴화되었고 땅에 둥지를 틀고 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을 먹고 살았다. 몸무게는 23㎏ 정도로 칠면조보다 컸다. 

1505년 포르투갈인이 당도면서 이 섬은 향료 무역을 위한 중간 경유지가 되었다. 이 새는 신선한 고기를 원하는 선원들에게 매우 좋은 사냥감이었다. 많은 수의 도도새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1681년에 마지막 새가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바다소는 베링 해 차가운 해안에 살았었다. 러시아 표트르 황제가 보낸 베링 탐험대는 북태평양 작은 섬에 조난당했다. 일행 중 과학자인 '게오르크 슈텔라'는 거기서 코끼리보다 더 큰 해양 포유류가 얕은 바다에 둥 둥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이름을 딴 스텔라바다소는 온순하여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울 만큼 온순한 초식 동물이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지방이 많고 맛있다고 전해지면서 사냥이 시작됐고, 발견 이후 27년 만에 멸종되었다. 덩치는 훨씬 작지만 그의 사촌인 메너티나 듀공도 오늘날 멸종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북해에서 멸종한 새도 있다. 큰 바다쇠오리는 펭귄처럼 생겼고 북대서양과 북극해에 서식하던 바닷새의 일종이었다. 큰 바다쇠오리는 북극곰 이외에 천적이 없었으며, 사람에 대한 공포심이 없고 오히려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이 오히려 화를 불러 사냥감이 되었고, 그 깃털과 고기 등을 얻기 위해 무분별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1844년 멸종되었다.

탐험이란 이름으로 지구 곳곳에 유럽인이 진출하면서 사라져간 동물은 이외에도 많다. 날지 못하는 커다란 바닷새 오크, 호주의 태즈마니아 주머니 늑대, 카리브 해의 몽크 바다표범, 양쯔강 돌고래 등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심지어 인간 종도 멸종되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1876년 태즈마니아 원주민들”

호주 남쪽에 위치한 태즈마니아에 살았던 태즈마니아인이 그 예이다. 1800년 초 유럽인이 섬에 도착했다. 당시 그들의 인구는 5,000~10,000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몇 만 년 동안 거기에 살고 있었지만, 유럽인과 함께 온 전염병에 취약했던 이들은 불과 70여 년 만인 1876년 멸종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였다. 유럽인의 탐험으로 수많은 인간 종족이 아메리카, 태평양, 아프리카의 섬과 밀림에서 멸종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필자가 자랐던 어린 시절의 시골은 집 주변에 많은 동물들이 살았었다. 흙담에서 구렁이가 기어 나오고 초가지붕 처마 속에는 참새가 보금자리를 잡았다. 마루 위 대들보에서 제비가 새끼를 키웠고 마당에는 새들이 날아들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두엄 밭에 맹꽁이가 울고 두꺼비가 기어 다녔다. 개울에는 자라나 온갖 물고기가 지천이었다. 뒷산에서 하늘소나 사슴벌레를 잡는 것은 꼬마들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거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귀한 몸이 되었다. 기껏 40여 년이 지나갔지만 전혀 다른 생태계 환경으로 바뀌었다. 황폐화된 자연은 마치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되돌릴 수 없다. 

여러 과학자들은 제6의 대량 멸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경고하고 있다. 제5의 대량 멸종까지와는 달리, 이번 경우는 철저히 인간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마이클 테너슨이 《인간 이후》에서 예고하듯이 멸종 리스트에는 사피엔스의 이름도 포함될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동물이 멸종하고 사피엔스만 지구 위에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스스로에게 붙인‘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사람)’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존재가 우리들 인간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