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서른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바다를 향해 열어 두었던 비밀의 창, 데지마   

몽골 침입이 일본에 남긴 트라우마  

에도시대였던 1853년 6월 3일 오후. 에도만 입구 우라가 앞바다에 4척의 낯선 배가 나타났다. 그중 2척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증기선이었다. 배는 언제라도 발포할 수 있도록 전투태세를 갖추고 에도만으로 들어섰다. 닻을 내리자마자 우라가 봉행소 경비선이 다가왔다. 그리고 양쪽 배에서 사람이 나와 네덜란드어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 (자료출처:flickr.com) 페리 함대 “흑선”

이 장면이 일본이 반강제로 개항당하는 순간이었다. 겉을 검게 칠한 큰 배를 일본은 ‘흑선(黑船)’이라 불렀다. 배는 미국에서 온 2,000톤급 서스케해나호였고, 함대 대장은 페리(Perry) 제독이었다. 페리는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로 돌아가라는 일본 측 요구를 거부한 채, 막부의 심장부 에도만을 측량하는 등 위협을 가하였다. 결국 미국 대통령 친서를 막부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개국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으로 일관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페리에게 강제로 개항을 당하였고, 그때부터 외국 문물을 억지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그랬다. 그렇지만 흑선 사건과 강화도 조약과의 시간 차는 23년에 불과했다. 이날 일본이 무방비 상태에서 개국을 당했다면 이 짧은 기간에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 도쿠가와 막부는 페리 함대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다. 페리 함대 방문 사실, 방문 시기, 심지어 끌고 오는 함선 이름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부 직할지이던 우라가 봉행소에 통역사까지 배치하여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200년 넘게 쇄국정책을 쓰고 있던 막부 정권에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몽골의 일본 침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몽골은 1274년, 1281년 2회에 걸쳐 일본을 침입하였다. 섬나라 일본 역사에서 외부로부터 침입은 최초였다. 두 번 모두 카미가제(神風) 덕분에 물리쳤지만, 열도에 외부세력이 침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인 머릿속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항상 바깥세상을 경계하고 상황을 파악하여, 그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교훈을 뇌리에 새겨놓았다. 이때부터 일본은 비록 울타리를 치더라도, 바깥세상을 항상 주시하는 습성이 생겼다. 

대문은 닫았지만, 비밀의 창은 열어놓다 

흑선이 출현하기 약 200년 전. 1639년 도쿠가와 막부는 포르투갈선에 대한 입항 금지 명령을 내리면서 쇄국을 시작하였다. 종교적 색채가 없던 네덜란드에게만 무역을 허락했는데, 그 대신 두 가지 의무를 부과하였다. 하나는 상관장이 매년 에도를 방문하여 쇼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풍설서》를 정기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의무였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풍설서” 외국 문물 유입

《풍설서》란 유럽,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정세를 담은 일종의 해외 정보보고서였는데, 나가사키로 입항하는 배는 모두 제출해야 했다. 풍설서는 두 군데로부터 제출받았는데, 네덜란드 상관으로부터 받는 것을 ≪네덜란드 풍설서≫라 했고, 중국 상인으로부터 받는 것은 ≪당선 풍설서≫라 하였다. 해외에서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가 있을 때는 막부가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토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막부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사안에 대해서《별단 풍설서》라는 특별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막부는 이를 통해서 페리의 흑선이 일본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처럼 막부는 개국 훨씬 이전부터 해외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고, 대응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막부가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펼치면서도 외국 문물과 국제 정세에 익숙할 수 있었던 데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 

일본이 서양인과 최초로 접촉했던 것은 16세기였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이 표류하여 조총을 전래하였고, 1549년 선교사 하비에르가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이때만 해도 전국시대 혼란기였던 일본은 외부에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막강한 중앙 정부가 없어, 지방 세력들이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교역을 하였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이때 다양한 서양 문물과 문화가 유입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들자 국제정세가 돌변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 지배권을 확립했고, 청나라도 중국 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조선은 오래전부터 사대교린과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자유롭고 개방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국가가 관리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도쿠가와 막부가 처음부터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았을 때, 네덜란드, 영국에 친서를 보냈고, 양국은 1613년까지 히라도에 상관을 설립했었다. 그러다가 1637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은 막부가 쇄국으로 돌아서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나가사키 시마바라 지역은 포르투갈과 교역이 활발해 기독교 신자가 많았으며, 지역 영주도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던 중에 백성에 대한 수탈과 종교 박해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막부는 기독교를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였고, 포교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1639년 포르투갈이 추방되었으며, 막부는 쇄국정책으로 돌아섰다. 해외 통교 금지, 기독교 금지, 무역 관리 등 국가 관리체제를 강화하였다. 포르투갈이 떠난 자리는 네덜란드가 차지했다. 네덜란드는 상호이익을 위한 교역 외에 포교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바다를 향해 열어두었던 창, 데지마

그렇다고 막부가 외부로의 창을 완전히 닫은 것은 아니었다. 외국과 무역을 위해 열어 두었던 비밀의 창이 있었다. 바다를 향해 열어 두었던 창은 항구도시 네 곳이었다. 류큐(오키나와), 홋카이도, 조선, 중국 및 네덜란드와 교역을 위해서 사쓰마(薩摩), 마쓰마에(松前), 쓰시마(対馬), 나가사키(長崎)를 각각 열어두었다. 

그중에서 나가사키는 유일한 정권 직할의 무역항이었다. 나가사키에는 바다 위에 세워진 인공섬‘데지마(出島)’가 있었다. 원래 데지마는 외국 상인을 한 장소에 격리시켜 기독교 전파를 막고, 무역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1936년 완공되어 추방당하기까지 포르투갈 상인이 사용했고, 이후 네덜란드 상인이 옮겨왔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데지마”

데지마는 돌로 바다를 메워 부채꼴 모양으로 만든 인공섬이었다. 면적은 1. 3㎢(3,969평)로서 주위를 울타리로 둘러쳐 외부와 접촉을 막은 형태였다. 출입은 북쪽에 놓여진 다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내부 시설로 일본측 관리시설, 외국인 상관 및 주거 시설, 창고 등이 있었다.

일본측에서는 막부에서 파견한 관리 아래 무역 실무와 상관관리를 담당하는 관리가 상주하였다. 네덜란드 측에서는 상관장, 창고장, 서기, 의사, 조리사 등이 상주하였고, 대부분 선원은 정박한 선상에서 지내야 했다. 이처럼 일본인 데지마 출입과 네덜란드인 외출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데지마 출입이 엄격했지만, 일본인은 이국풍 생활과 풍습에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네덜란드인이 데지마 관리를 초대해 양식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었다. 관리는 통오리, 소시지, 카스텔라 등 메뉴에 놀랐고,  포크, 나이프, 스푼을 가지고 식사를 하는 모습에도 놀랐다. 또 원형 테이블에 여럿이 둘러앉은 모습도 생경했다. 

네덜란드 상인이 데지마에서 소를 잡아먹기도 했다. 일본은 불교 영향으로  1,200년간 육식이 금지되었는데, 이로 인해 곤란을 겪던 네덜란드인은 바타비아에서 소를 싣고 와 도살하여 먹었다. 이후 서양식을 권장하면서 1868년 일본에서 육식이 해금되었다. 

이처럼 데지마가 바다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할지라도, 음식, 복식, 물품 등 문화적 전파는 자연스럽게 울타리를 넘어 열도로 퍼졌다. 외국 상인 통제 목적으로 설립했던 격리 시설이 일본 근대화의 디딤돌이 될 줄은 막부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빵, 덴뿌라, 메리야스도 그 시절의 전래품

16세기 하비에르 신부가 일본에 도착한 이래 서양 풍습과 음식이 전래되었다. 이 시기 전래 된 서양의 물건이나 풍습은 ‘낭만 병풍’이라는 풍속화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목에 주름 모양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 모자와 망토를 걸친 수도사가 등장한다. 또 위는 부풀리고 아래는 폭이 좁은 바지를 입고, 발에는 긴 양말을 신고 있는 모습도 있다. 

▲ (자료출처:Google) “낭만병풍”

우리가 속옷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메리야스’가 이때 등장했다. 사실‘메리어스’는 양말을 뜻하는 포르투갈어인데, 신축성 있는 옷을 나타내는 용어로 확대되어 지금도 쓰이고 있다. 발에 신던 양말이 현재는 속옷으로 변신한 것이다. 

화투도 전래 되었다. 화투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이 그려진 48장의 서양식 트럼프‘카르타’에서 유래하였다. 서양인이 즐기던 카르타를 일본식으로 변용하였다. 즉, 계절마다 꽃을 정하여 각 네 장씩 만든 카드를 ‘꽃 카르타’라 불렀는데, 이것이 화투(花札)의 유래였다. 

서양 음식도 전래 되었다. 1569년 프로이스 신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별사탕과 양초를 진상하고 포교를 허락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별사탕의 일본식 이름인 ‘콘페이토(金平糖)’는 포르투갈어 콘페이토(confeito)와 발음이 같았다. 포도주와 함께 기독교 의식에 쓰이던 빵도 들어왔다. ‘빵’발음은 포르투갈어 ‘pão(팡)’을 그대로 음차하였다.  

지금도 나가사키 명물로 인정받는 카스텔라가 전래된 과정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16세기 스페인에 카스티야(Catilla) 지방이 있었는데, 이를 포르투갈어로 발음하면 카스텔라(Castela)가 된다. 일본인이 처음 보는 과자를 보고 “이 과자 이름이 무엇이오?”하고 물었더니, 포르투갈인이 “카스텔라 지방에서 만든 과자”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이름을 오인하여 오늘날까지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튀김을 의미하는‘덴뿌라’의미도 흥미롭다. 이 단어는 포르투갈어‘템포라(Tempora)’에서 기원하였는데, 육류 대신 생선을 튀겨 먹는 금요일 금식 기간을 의미했다. 금요일에 생선 튀김을 만들어 먹던 서양인을 보고 요리 이름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외에도 신대륙이 원산인 토마토,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 등도 이 시기 들어왔다.

네덜란드를 통하여 얻는 서양 지식은 점차로 네덜란드 학문, 즉‘난학(蘭學)’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은 매년 쇼군을 배알하러 에도를 방문하였다. 이들이 에도에 머무는 숙소를 ‘나가사키야(長崎屋)’라 했는데,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운 이곳에 끊임없이 일본인 방문자가 찾아왔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난학”

또 지식층에서는 나가사키가 이국적인 지식집적소로 통용되어 지식층 사이에 나가사키로의 유학이 유행하였다. 난학을 전수한 대표적인 예는 독일 태생 의사 지볼트(Siebold)였다.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 의사로 근무했던 그는 막부 허가를 얻어 나가사키에 학교를 개설했다. 거기서 진료와 의학을 가르쳤다. 이후 다방면의 자연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수제자가 몰려들어 난학을 배웠다.

이처럼 데지마는 의학을 중심으로 물리학, 천문학, 군사학 등 유럽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각종 이국 서적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였다. 이렇게 꽃을 피운 난학은 이후 메이지유신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와 이웃 일본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경제 제재 이슈 등에 더하여, 최근에는 코로나 19에 따른 입국 거부사태까지 겹쳤다. 하는 짓마다 때려주고 싶도록 미운 일본이지만, 그들에게서도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갑작스럽고 의도된 근대화였던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바탕에는 오랫동안 바다를 향한 비밀의 창을 열고, 바깥 세상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던 태도가 있었다. 

“영국과 일본은 바다가 지켜주고, 러시아는 날씨가 지켜준다”라는 말이 있다. 자기 것만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폐쇄적 환경의 섬나라. 하지만 능동적으로 바깥 세상을 주시하고, 적극적으로 바다로 진출했던 정책이 오늘의 영국과 일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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