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사람-박윤정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문득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물론 이야기에 담긴 감동 때문이겠지만. 솔직함, 이것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는 세상에 없는 것 아닐까. 꾸밈없이 나열된 언어들 속에서 기자는 요즘 세상에 좀처럼 보기 힘든 진정한 한 명의 여성 산악인을 만났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냄새 심하지만 밀착력이 좋아요”

Q 산에 오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지요?
등산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산악부에 들어가면서부터예요. 공부와 관련된 특별활동은 싫고 왠지 산악부가 눈에 들어와 친구를 꼬드겨 가입했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산악부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인생에서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되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지리산 칠선계곡을 산악부 선생님들 세 분과 함께 올랐던 기억이 나요. 가끔 그때 사진 속의 제 모습을 보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데… 정말 힘들게 올랐던 것이 생각나요. 특히 불암산과 수락산 산악마라톤을 했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생애 처음으로 다리가 풀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등산할 때 왜 배가 고프기 전에 먹어야 하는지 몸으로 처절하게 경험했던 때가 바로 그 산악마라톤이었어요. 산악부 가입 덕분에 그렇게 재미있게 고등학교 3년을 보낼 수 있었죠.

Q 박충길 씨가 박윤정 씨를 추천하면서 추천 이유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산을 대하고 늘 진중한 모습이 좋아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산악회 후배로서 좋게 보아주시니 가끔 힘들 때는 이런 말씀이 힘이 돼요. 등반하면서 궁금한 것들, 책을 보면서 의문 나거나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선배와 자주 토론하다보니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제가 또 성격이 진지한 편이거든요.

Q 박윤정 씨가 하는 등반 스타일은 어떤 것인가요?
직장 생활 초년생 때 우연히 등반잡지를 보다가 코오롱등산학교 광고를 보고 96년 봄에 정규반에 들어가 암벽등반에 대해 배웠어요. 그리고 수료 후 바로 산악회에 들어가 선배들로부터 암벽등반과 빙벽등반 그리고 등반장비에 의존해서 오르는 인공등반을 배웠죠. 바위도 오르고 얼음도 오르고 흙길도 걷고요. 총체적이라고 할까요.

Q 오늘 소개해 주실 장비와 장비에 얽힌 사연은?


글쎄요. 이 질문을 받고 제가 갖고 있는 장비를 쭉 훑어보았는데요. 장비마다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있어 새삼 놀라웠습니다. 그 중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아무래도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하고 너무나 중요한 암벽화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는 FIVE TEN 이라는 브랜드의 뉴튼이라는 신발을 오래 신었고 또 선호하는데요. 이 신발이 아니면 다른 암벽화는 심리적으로 불안해요. 그래서 등반할 때는 거의 대부분 뉴튼을 신어요. 지금은 New 뉴튼이라는 오렌지색의 신발로 업그레이드했는데 그것 말고 그 전단계인 연두색의 뉴튼이라는 신발을 소개합니다. 다른 신발보다 같은 기간 신어도 이 신발은 유독 냄새가 심해서 주기적으로 빨아주어야 되는데 그래도 고무창이 세심하고 밀착력이 좋아서 저는 이 신발을 좋아해요.
4~5년 전인데 한번은 인수봉 하늘길의 마지막 피치를 끝내고 확보지점에 자기 확보를 하고 뒷사람을 빌레이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왼쪽의 다른 루트로 한 선등자가 올라와 확보를 하고 또 잠시 후 제 오른편에서도 누군가 올라와 자기확보를 하는데 세 명의 선등자 모두 다 뉴튼을 신고 있는 거예요. 같은 확보지점에 매달려 6개의 연두색 뉴튼이 나란히...(^^) 서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어쩐지 더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참 재밌었던 것 같아요.

Q 장비에 대한 욕심은 많은 편이신가요?
장비에 대한 욕심이라, 음.. 등반을 처음 시작하다가 선등하기 시작할 때 욕심이 가장 많았어요. 지금은 장비에 대한 욕심만 생각하다간 거덜난다는 걸 20대 때 체험했기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고 현실적으로 지르려고(?) 하고 있어요.
암벽도 암벽이지만 빙벽장비는 좀 더 가격이 고가거든요. 한창 빙벽 등반에 재미 붙어 이런 거 저런 거 앞뒤 안 가리고 사던 때가 있었죠. 지금은 많이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죠”

Q 여성 산악인으로서 체력적인 면에서 조금 더 불리한 조건일 텐데요.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요즘은 많이 게을러졌어요. 주변에 등반하는 선배들 보면 아이 낳은 후에도 열정적으로 운동하며 파워풀한 등반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보면 많이 반성하게 되는데 여하간 주로 인수봉이나 설악산 같은 곳에서 멀티피치등반을 주로 하기 때문에 근력도 근력이지만 지구력에 비중을 높이 두고 운동을 하는 편이에요. 전체적으로 체중관리, 기초체력, 다리근력에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 줄넘기를 가끔 하고 실내암장을 다니고 있어요. 기초체력에는 달리기가 좋은데 달리는 걸 너무 싫어해서 그 부분이 쉽지가 않네요. (^^;)

Q 등반 중 부상의 경험이 있으신지요?
등반하다가 발목 복사뼈가 부러진 적이 있죠. 한 1년 동안 몸과 마음이 불편했어요.

Q 미혼이신데 어떤 신랑감을 만나서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하길 꿈꾸시는지요? 
 저는 지금 미혼이지만, 특별히 결혼생활에 대해 꿈꾸고 있는 것은 없어요. 30대 후반을 향해 달리다보니 현실적이지 않을 수 없잖아요 ^^ 다만, 20대 때는 결혼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나이도 들었고 주변 사람들, 특히 결혼한 친구나 언니들과 가끔 이런 저런 결혼생활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서로를 배려하고 상대를 이해하려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겠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정~~~~말 사랑하는’ 이란 부분이에요. 나이는 제쳐두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하면 되는 것이 결혼이겠죠?

Q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등반이 있다면?
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등반이라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인수봉에 ‘궁형길’이라는 길이 있거든요. 한창 신나게 등반할 때 이 ‘궁형길’의 마지막 피치를 자유등반으로 끝내겠다고 마음먹고 ‘궁형길’에 목을 맨 적이 있었죠. 결국에는 귀바위 직전 피치의 자유등반은 실패했는데 그때 열정을 떠올리며 올해 다시 도전해볼까 해요.

Q 산에 갈 때는 어떤 마음과 기분이 드시나요?
산에 가서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즐겁게 등반을 마칠 수 있는 건 암벽등반하는 별난 딸을 항상 걱정하시는 부모님 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깨닫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요. 그간 짧지 않은 시간, 등반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마음, 자신감 결여 같은 것이 있어요. 그런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다짐 같은 것을 항상 해요. 언젠가 제 선배님께서 ‘바위를 느껴라’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등반하다가 잘 안되고 어려워지면 ‘바위를 느끼라는데 도대체 그건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막막할 때 산을 떠올리면 위로가 돼요”

Q 본인에게 산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질문은 종종 저 자신도 생각해보곤 하는데 산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질문은 쉬워도 막상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저는 어릴 때는 이에 대한 답변이 굉장히 막연했는데 30대가 되니까 산은 제게 ‘정말 절친’의 의미가 있구나 싶어요. 무엇이냐 하면 20대 때는 마냥 해맑고 삶이 단순했는데, 30대가 제겐 사춘기인지 30대 앓이를 좀 심하게 한 편이죠. 그래서 가끔 어쩔 때 그냥 막 기분이 막막하거나, 외롭거나 할 때가 있는데 그때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은 제 마음속에 산이 떠올려질 때죠. 그렇게 마음 속에 떠올려지는 산이 저에게 큰 위로가 돼요. 그냥 막연히 산이 아니라 제 마음이 들떠지도록 떠올려지는 산의 그림이 있거든요. 향수 같기도 한데... 산은 제게 그런 의미죠.

Q 산 말고 관심 있는 분야가 있나요?
산에 다니다 보면 종종 약초 같은 것을 보는데, 봐도 저게 약초인지 뭔지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아요. 도라지도 잘 모르고 그 흔한 당귀도 잘 모르겠어요. 산수유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꽃이나 나무, 식물을 포함한 그런 것들을 알고 싶어요. ^^ 또 그거 말고 관심분야가 있다면 술을 좋아합니다. 특히 와인 같은 거요.  

Q 다시 태어나도 산사람이 될 생각이 있나요? 또 앞으로 계획하시는 일이 있다면?
아마 다시 태어나도 산에 다닐 것 같습니다. 취미삼아 시작한 등반이었는데 이쪽으로 돈을 벌어볼까 하고 몇 년 전쯤 생각을 시작했어요. 그 시작을 함께 하는 선배님들이 대전에 류진선 선배, 그리고 완주에 이왕영 선배, 이기열 선배, 남식 선배, 한모영, 창섭형, 복진형 등등이 계셔요. 이 일이 잘 돼서 좋아하는 일로 나도 행복하고 주변 사람도 즐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정은 기자 jung@baccro.com


박윤정 Profile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04. 1. 31~2. 1 제3회 에델바이스배 빙벽등반대회 출전(난이도 5위)
·2004. 2. 8 제8회 설악산 빙벽대회(난이도 8위)
·2005. 1. 22~23 제1회 노스페이스 아이스클라이밍 페스티벌(난이도 8위)
·2005. 2. 5~6 제9회 설악산 빙벽등반대회(난이도 12위)
·2005. 2. 19~20 코오롱스포츠배 제5회 전국빙벽등반경기선수권대회(난이도9위)
·2005. 7. 5~7. 20 키르키즈공화국 악수(Aksu)북벽(5,217m) 등반
·2007. 9. 21 ~ 10. 11 중국 사천성 다오고오(5,422m) 등반
·2008 제1회 충북도지사배 전국빙벽등반대회 출전(난이도 2위)

다음 시간에는 박윤정 씨가 추천한 김성기 씨를 만나 봅니다. “등반을 잘 하려면 운동을 해야하는데, 생각만 있고 시작을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몰랐거든요. 그때 기본틀을 확실히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어요. 등반 경력이 오래 되어서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있을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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