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브라 아이스바일로 눈사태 버텨

 

‘산악인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들 중 의미 있는 장비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기획은 ‘장비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산악인들의 삶과 역경들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발전했고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장비와 사람’ 이라는 제목의 이 인터뷰는 장비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산악인의 이상과 꿈, 진실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으로 인터뷰 인물이 또 다른 사람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편집자>


거벽등반 통한 등로주의의 선두주자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난봉 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 등반을 비롯해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가셔브룸Ⅳ봉까지 그는 거벽등반과 신 루트 개척이란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8천미터가 중심이던 국내 산악계에 거벽등반의 기치를 들고 자신의 등반을 펼친 그의 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김형일에게 산이란, 그리고 그의 작은 철학

지난 6월 중순, 네팔 히말라야 동부 칸첸중가(8,586m)산군에 자리한 자누봉의 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김형일 씨를 만났다. K2코리아에서 근무하는 그를 첫 인터뷰 인물로 선정한 것은 거벽등반이란 꿈을 찾아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어떤 장비를 가지고 나타날까,갑자기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지금까지 줄곧 거벽등반의 길을 걸어온 그가 처음 전문적인 등반을 시작한 것은 1990년도다. 산에 오르는 것도 좋았지만 암벽이나 빙벽등반은 그에게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특히 거벽등반은 ‘좀 더 높은 곳, 남들이 오르지 못한 곳’을 오르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가장 근접한 행위였으며 그의 꿈이기도 했다.
그가 산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벌써 21년이 다 됐다. 그간 차곡차곡 쌓인 산에 대한 생각과 경험은 이제 하나의 작은 철학이 되어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
“등산의 가치는 절대로 산의 높이에 있지 않아요. 등반루트와 오르는 과정이 중요할 뿐이죠. 자신의 한계점에 부딪혀가며 새로운 모험을 하는 산악인들의 정신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산은 ‘자연 속에서 느끼는 자신의 한계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산악인들도 자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다른 이가 오르지 못한 곳을 가고 싶거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생각은 있지만 자연을 파괴해가며 오르는 억지스런 등반은 가치 있는 등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산악 선진국들은 대부분 등정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 새로운 거벽을 찾아 신 루트를 개척하고 미등의 봉우리를 찾아 초 등정을 이루곤 했다. 국내산악계 역시 최근 들어 극지법적인 등반에서 벗어나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을 꾀하고 있다.
이런 거벽등반의 중심에 선 김형일 씨는 등로주의의 대표적인 주자라 하겠다.


# 처음으로 친구와 같은 느낌을 받은 ‘코브라’
그가 내게 보여준 것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아이스바일 ‘코브라’였다.
“양주시 가래비 믹스등반지에서 이놈을 처음 사용했어요. 장비를 두고 의인화해본 경우는 없었는데 처음으로 이놈에게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파트너 같다는, 왠지 친구 같은 느낌 말이죠. 아직까지 이름을 정하진 못했어요. 그냥 내 친구 코브라 정도(?)…” (웃음)
작년 가셔브룸Ⅳ봉 등반 중 하산 시 눈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라 그대로 밀리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에게는 코브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눈사태에도 코브라는 그를 지탱해 주었고 결국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코브라 아이스바일은 특별히 애지중지하는 장비가 되었다. 이제 코브라를 사용한지도 5년이 다 돼 간다.
“정이 많이 든 유일한 장비죠. 새로운 장비가 나오고 이 녀석이 수명을 다해도 버리진 못할 것 같아요. 다소 낡기도 했지만 저에겐 보물이에요. 정말 열심히 하는 후배에게 주고 싶은데, 낡았다고 안 받아 줄지도 모르겠네요.”
산에 대한 그의 생각처럼 장비에 대한 사연도 간단명료했다. 철학이라고 해서 장황하거나, 구구절절 애달픈 사연이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그와 함께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아이스바일 ‘코브라’. 점점 더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 등반에 관한 생각과 일상
등산 초보이기에 ‘정상에 서면 어떨까’라는 의구심에 우문을 던졌다. 그는 ‘정상에 오르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했다.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행복감은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등반 과정에서 얻은 행복감이 그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등반은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등반은 거대하고 잔혹한 자연 앞에서 자신에게 참을성과 인내를 강요하고 냉정함과 이성을 잃지 말 것을 강요한다. 이 처절한 싸움을 끝내고 돌아오면 새삼 일상의 사소한 일들도 모두 처음인 것처럼 설레는 것일까? 그는 원정을 끝내고 나면 오래된 친구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너무도 행복하다고 했다. 그것은 삶의 극한 상황에 이르러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즐거웠던 추억과 행복이듯이 그 행복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등산이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등반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가”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등반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단지 해가 갈수록 이전보다 못한 체력을 느낄 때 고민을 하게 되죠. 또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그때는 가혹하리만치 체력 훈련을 하곤 해요. 아마 체력이 닿는 순간까지 나이와 체력에 맞는 산을 찾아서 등반을 할 것 같아요.”

산을 찾아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도 43살이 됐다.
아직 독신인 그는 “결혼은 빨리 하고 싶지만 수시로 원정을 떠나야 하고 산에 오르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미루고 있다”고 했다. “여성 산악인과 만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산에 오르려면 독해야 해요. 독한 사람은 저 하나로 충분할 것 같아요. 다른 뜻은 없어요. 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호연지기는 가르치겠지만 전문 산악인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이는 아마 굴곡진 등반의 경험들을 거치며 깨달은 것인지 모르겠다. “산에 오르는 일이 놀이다”라고 했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는가 보다. 그는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등반에 몰입하고 믿음으로 오르는 것이다. 3%의 가능성을 30%로 만들어 놓고 등반을 시작하는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 산악인)처럼 말이다.
그는 등반할 때면 꼭 어머님께서 만들어주신 벽조목 목걸이를 챙겨간다. 세상에 어머니의 기도만큼 든든한 힘이 되는 것이 있을까. 세상의 모든 아들들을 위한 기도… 그것은 그 어느 것보다 강하고 끈끈한 힘을 주는 자일이며 사랑이 아닐까?
올해 10월 그는 촐라체 아라캄체를 1박 2일간 속도 등반으로 오를 예정이다. 이어 내년 3월에는 초오유를 알파인스타일로 도전할 계획이며 이어 파키스탄 히말라야로 눈을 돌려 K2 와 카라코람 히말라야에 미등봉으로 남아있는 가셔브룸Ⅴ(7,133m)에도 도전장을 던질 예정이다.
이정은 기자 jung@baccro.com


김형일 Profile

1999년 캐나다 부가부 스노패치 스파이어 등반
2001년 쿰부 히말라야 로체 샬(8,400m) 동남릉과 로체(8,516m) 등반
2004년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 등반
2005년 트랑고타워 네임리스타워 신 루트(The Crux Zone Ⅶ 5.9 A4) 개척
2006년 로체(8,516m) 남벽 동계 등반
2008년 아딜피크(5,300m) 신 루트(For our father VI, 5.11a, M7) 개척
2008년 카라코람 히말라야 레이디핑거(6,200m) 등반
2009년 스팬틱 골든피크(7,027m) 신 루트 Dream 2009(VI, WI4, M7) 개척
2010년 카라코람 히말라야 가셔브룸V (7,133m)봉 등반 / 2011년 자누(7,710m) 동벽 등반
 


다음 시간에는 산악인 유학재 씨의 산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김형일 씨가 가장 존경하는 국내 산악인으로 유학재 씨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산 선배님이시죠.(웃음) 어감이 좀 이상한가요? 산악회에서 알게 된 분인데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어주는 훌륭한 산악인이라고 생각해요. 현대적인 등반을 추구하며 이를 묵묵히 실천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금 당장 소개해 주겠다며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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