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충남 아산의 충무교육원(나라사랑)
충남 아산의 충무교육원(나라사랑)

먹는 거보다 움직이는 게 적으면 살이 찌고, 마음먹은 거보다 실천이 적으면 걱정이 찐다. 주체할 수 없이 찌는 걱정을 빼기 위해 현충사 옆 충무교육원을 보면서 해암리 게바위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는다. ‘충무교육원’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만들었고 충무공 정신을 함양하는 교육 장소이다. 이곳의 방문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대한민국은 희망이다.

 

해암리 게바위  이정표
해암리 게바위  이정표

게바위를 향해 가다가 내비게이션이 상세하지 않아 무심코 지나쳤다. 유턴하여 반대 방향으로 달리다 보니 또 지나쳤다. ‘와따리 가따리~’ ㅠㅠ 게바위 입구 안내 표지가 도로 위에 있지 않고 작은 이정표로 매달려 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져 지나친 것이다. 골목 입구에 작은 표지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면서 학창시절에 체력의 등급을 매기던 체력장 검사의 ‘왕복 달리기’가 생각났다.^^

 

정자가 보이는 비탈길
정자가 보이는 비탈길

골목길을 들어서자 골목 삼거리가 나왔다.  안내판이 없어서 복불복 우회전을 했는데 게바위 반대 방향이었다. 유턴하여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니 비탈길이 나오면서 왼쪽으로 기념 식수와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왼쪽 대각선으로 검은색의 게바위가 보였다. 이곳에 들어서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골목길 입구에서 게바위까지의 시퀀스와 공간 설치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것 같아 우려가 됐지만, 지자체에서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하고 걱정을 접었다.

 

아산 게바위가 크게 보이는 사진
아산 게바위가 크게 보이는 사진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 있는 ‘게바위’는 바위가 생긴 모양이 게(蟹)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주로 배를 고정하거나 어부들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해신당(海神堂)으로 쓰였다. 해안가였던 이곳은 삽교천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해안가 펄의 상당 부분이 육지화가 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게바위는 매몰되어 사라졌고 인근에 흡사하게 생긴 현재의 바위가 ‘게바위’가 되었다. 당시 백의종군 길에 올랐던 이순신 장군은 이곳 해안가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영접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 초상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 초상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는 아들이 모함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한성(서울)으로 압송됐다는 소식에 와병 중인 여든셋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만나러 여수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바닷길로 아산을 향하던 중 태안 앞바다에서 4월 11일 사망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틀 후인 4월 13일에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곳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영접하여 시신을 운구해 아산 집으로 돌아와 빈소를 마련했지만, 백의종군 신분인지라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어머니 영전에서 통곡하며 다시 남쪽으로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내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자 하였지만 오늘에 이르러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 정유년 4월 19일 난중일기 중.

어떤 연구자는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의 시신을 운구한 게바위에서부터 아산 집까지의 동선은 공무가 아닌 사적인 용무이기 때문에 백의종군 길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왜곡되지 않은 역사만 미시적 또는 거시적으로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만약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생각이 한결같다면 한 사람 빼고는 다 잉여 인간일 테니까 말이다.

<잠깐만>
백의종군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장수가 계급장을 떼이고 흰옷을 입고 군대에 종속되어 얼차려나 엎드려뻗쳐 등 시쳇말로 ‘뺑뺑이’를 도는 것으로 아는데, 실제로 흰 옷을 입고 군 복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없는 상태(보직해임 또는 근신)에서 군 복무를 계속하는 것을 관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정해진 경비와 봉급 그리고 수행원(압송)도 있었다. 물론 이때 공을 세우거나 왕이 결정하면 복직이 된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두 번 했다. 
첫 번째 백의종군은 1587년 함경도에 있는 조산보 만호 시절, 녹둔도(두만강 하구 동해에 있는 섬) 둔전관을 겸하고 있을 때이다. 지금은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북쪽이 연해주와 연결되어 있고 러시아 영으로 되어있는데, 오늘날까지 귀속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한 미수복 영토이다. ‘만호’라는 관직은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했고 다스리는 백성의 가구 수가 만개 정도이면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쓰였으나 차차 가구 수와 관계없이 품계나 직책 등으로 쓰였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이번 기획 탐방의 코스로 1597년 4월 1일 의금부(종각)를 출발하여 권율 장군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합천까지 간 것인데, 8월 3일 진주에 있는 손경래의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충정도·전라도·경상도)에 재임명되면서 백의종군은 120여 일 만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가장 짧은 백의종군은 5일이 있다.

 

중앙에 보도블록으로 벽을 쌓은 사진
중앙에 보도블록으로 벽을 쌓은 사진

<돌발퀴즈>
이순신 장군이라면 게바위에서부터 아산 집까지의 거리를 백의종군 길에 포함했을까? 안 했을까? 

선공후사(先公後私). 즉 공과 사의 구별이 뚜렷하고 공직자로서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는 이순신 장군은 포함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유는 이렇다.
이순신 장군이 서산의 해미에서 군관 생활을 하던 중 휴가를 받아 아산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휴가를 떠날 때, 휴가비를 엽전이 아닌 곡물로 받아 떠났다. 어머니 집에 도착하니 곡물의 1/3 정도를 소비했다. 돌아갈 때 1/3만 있으면 복귀를 할 수 있으니, 남은 1/3은 어머니 집 뒤주에 부어드리고 짐을 가볍게 하여 돌아가면 될 것을 이순신 장군은 남은 곡물을 다시 싸 들고 돌아가서 반납했다. 남은 곡물은 나라의 것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같으면 남은 출장비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 부당 청구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청렴하다고 하니…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인성과 가치관은 어머니로부터 내려왔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말은 교육학적으로 보나 심리학적으로 보나 매우 과학적인 속담이다. 그래서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3살까지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돌봐야 좋다. 이후 성인이 되는 20세까지는 자아 확립과 인격 형성의 기간인데,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와 함께 유소년기까지 건천동(인현동)에서 지냈고 이후 아산으로 이사를 해서 보성군수 방진의 사위가 되기 전인 20세 정도까지 함께 지냈다. 그래서 초계 변씨인 어머니와 이순신 장군은 누구보다 각별한 사이였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는 무장 출신인 아버지(변수림)의 영향을 받아 여장부 스타일이었고, 자녀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교육관과 가치관은 맹모나 신사임당을 앞지른다. 다음은 휴가를 받아 어머니 집에 온 이순신 장군에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 아니하셨다.」 갑오년 1월 12일 난중일기 중.

 

아산 게바위 뒤의 언덕길
아산 게바위 뒤의 언덕길

게바위를 뒤로하며 언덕 위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면서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를 생각하며 마음에 되뇌었다.

"최고의 자녀교육은 부모가 제대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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