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왼쪽부터 필자, 전북놀이문화원의 강동암감사, 이경두이사, 최영호이사, 정진성이사.  김정숙이사는  남자끼리 찍으라며 자리를 양보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왼쪽부터 필자, 전북놀이문화원의 강동암감사, 이경두이사, 최영호이사, 정진성이사.  김정숙이사는  남자끼리 찍으라며 자리를 양보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회의장이나 식당에서 만나던 지인들을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에서 자전거를 탄 응원군으로 만나니 가슴이 찡하고 '천군만마를 얻었다‘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잠깐의 회포를 푸는 사이 자전거광들의 습관이 나왔다. 서로의 자전거 사양에 관해 물어보고 답하고 하기를 십여 분…. 그러니 자전거에 투자하는 돈이 장난이 아니다.^^ 

오른손을 하나로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삼례역에서부터 출발하여 전주를 거쳐 임실을 지나 오수까지 함께 자전거 주행을 했다.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둔하고 느렸지만 덜 지치고 덜 피곤했다. 그래서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안전제일 마크
안전제일 마크

여럿이 일렬종대로 자전거 주행을 할 때는 혼자서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두와 후미를 정하고,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듯이 1m 이상 앞뒤 간격과 대열을 유지하고, 정해진 수신호와 구령 전달로 안전사고에 대비하며 대형을 유지해야 한다. 가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도로상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한 뉴스를 접하면 남의 일 같지 않아 안전사고를 대비한 수칙과 요령 중 10가지만 올려 본다.

우선 자신의 기호에 맞는 용도(로드형. MTB형)와 체형에 맞는 사이즈(S, M, L)를 선택하여 자전거를 구매하고 조정(피팅·세팅)을 한다.
1) 헬멧 착용(한 번이라도 충격을 심하게 받은 헬멧은 사용금지).
2) 장갑 착용(개인에 따라 손목과 무릎 보호대 착용).
3) 나팔바지 착용 금지(바지 끝단이 체인에 끼어 들어가면 전복사고 발생). 
4) 1열 또는 2열 종대로 자전거 주행을 할 때는 팀장이 주행 시작 전, 수신호와 구령을 충분히 숙지시키고, 스트레칭과 일정을 안내하고, 선두와 후미는 베테랑이 포진한다. 
5) 주·야간 불문하고 각자의 자전거 후미등을 켜고, 후미 주행자는 가능한 밝은 불빛(경광봉. LED 등)을 내는 것이 안전사고 방지에 도움이 된다. 
6) 비탈길에서는 앞 브레이크 30% 뒤 브레이크 70% 정도를 유지하여 자전거가 앞으로 넘어가는 전복사고를 방지한다. 
7) 언덕길에서는 다리에 무리가 가면 용쓰지 말고 내려서 끌고 올라간다. 
8) 장거리 자전거 주행을 할 때는 평소 단거리에서 설정하는 기어보다 1~2단 낮추어서 약간 헛발질한다는 느낌으로 페달을 밟는다. 
9) 펑크 수리 장비와 여분의 튜브를 챙기고, 음료수와 이동 간편식 그리고 땀을 많이 흘리면 염분을 따로 섭취한다(이온 음료 권장). 
10) 튜브 펑크에 더해 타이어 파손까지 났다면, 공기압 때문에 튜브가 찢어진 타이어 틈새로 삐져나온다. 이럴 때는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기 전, 튜브와 타이어 사이에 지폐를 두 번 접어 끼워 넣으면 해결된다(액면 불문).
그 외 교통신호와 법규 준수, 역주행 금지, 야간 주행시 전조등 점등, 보행자 보호...

※ 자전거 주행 시, 모든 상황은 주식투자처럼 각자의 판단과 선택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특별히 명심 한다.

 

검정 쓰레기봉투 언덕길
검정 쓰레기봉투 언덕길

삼례역에서 출발하여 30분쯤 지나 언덕의 구석진 곳에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를 무단투기한 모습이 보인다. 코로나 19로 인해 더 많은 생활 쓰레기가 나오고 있는 요즘이라 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과거와 비교하면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한강에 있는 대교들의 보행자와 자전거가 함께 다니는 길로 자전거를 타고 횡단해 보면 널브러지게 버려진 쓰레기들은 여전하다. 페트병이나 과자봉지는 애교로 봐준다 해도 아기 기저귀, 목 베게, 강아지 배설물까지 다양하다. 쓰레기를 내놓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놓일 곳에 놓으라는 것이다. "버려지는 것들이 쓰레기일까? 버리는 것들이 쓰레기일까?" 

 

거북선 주유소 앞에서 필자
거북선 주유소 앞에서 필자

임실 방향으로 가는 길에 높은 고개를 만났다. 반쯤 올라가자 ’거북선 주유소‘가 나타났다. 궁금해서 나이가 지긋한 주유원에게 왜 거북선 주유소라고 상호를 졌느냐고 물어봤다.
“여기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 넘어간 고개라 사장님이 주유소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라고 한다. 역사의식의 있는 사장님이신가 보다. “많이 파세요~!”

 

오수면사무소
오수면사무소

전주 놀이문화원 식구들과 함께 치즈로 유명한 임실을 지나 의견(義犬)의 고장인 오수에 들어섰다. 기념촬영을 하고 응원군들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전주로 복귀했고(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짐칸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다) 나는 의견기념공원을 향했다.

 

전북 임실군 오수 마을 의견상
전북 임실군 오수 마을 의견상

의견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시대 김개인(金蓋仁)이란 사람은 개를 아주 사랑하여 항상 데리고 다녔다. 어느 장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던 중, 잔디밭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때마침 인근에서 들불이 일어났고 개는 주인을 깨우려 애썼지만 깊은 잠에 빠진 주인은 깨어나지 못했다. 다급해진 개는 냇물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흠뻑 적시고는 잠들어 있는 주인의 주변 잔디에 뒹굴기를 수없이 반목했다. 불길은 더 이상 주인에게로 번지지 않았지만, 개는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얼마 후, 개 주인이 깨어나 이 사실을 알고는 그 자리에 개 무덤을 만들어 주고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 앞에 꽂아 주었다. 그런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돋아나더니 큰 나무로 성장하였고, 그 나무를 오수(獒樹: 개 나무)라 칭하고, 마을 이름도 오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수 지방에서는 이 의견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정신을 보전하고자 1982년 ’오수의견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해마다 오수의견문화제를 열고 있는데, 매년 봄 좋은 날을 택하여 진행 한다.

주인을 구한 오수 의견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만 접하다가 현지에 와서 직접 보고는 의견상이 거무튀튀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니 알 것 같았다. 의견상이 검은 이유는 주인을 구하느라 온 몸이 불에 타서 그을렸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인을 구한 의견(義犬)과 나라를 구한 의인(義人)을...

’의견‘은 의견(義犬)과 의견(意見)이 있는데, 우리 몸에는 아주 나쁜 두 마리의 개가 쫓아다니고 있다. 하나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선입견‘이다. 둘 다 골칫덩어리다. 편견과 선입견이 짝짓기하여 태어나는 새끼를 ’꼴불견’이라고 한다. 꼴불견이 태어나기 전에 편견과 선입견을 쫓아내는 명견을 입양해야 한다. 바로 ’백문불여일견‘이다. 이 개는 현장에 직접 가서 상황파악을 하고 나서야 분양을 받아 올 수 있는 개다.

<잠깐만>
우리 주변에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오기를 부리는 꼴불견 인사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이들 하고는 경주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기면 ’개보다 더한 X‘이 되고, 비기면 ’개 같은 X‘이 되고, 지면 ’개만도 못한 X‘이 되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품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2번의 백의종군과 3번의 파직을 내리며 시기하고 경계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성질나서 직업 군인을 포기하고, 옷 벗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하며 살았을 것 같다.

정유년 7월 16일 새벽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비보를 7월 18일에 접하고 이순신 장군은 통곡했고, 얼마 뒤 권율 장군이 와서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수가 없다.”라고 포기하듯 말하자, 이순신 장군의 대답에 권율 장군은 크게 기뻐하였다.

「내가 직접 연해(沿海)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세우겠습니다.」 정유년 7월 18일 난중일기 중.

’포기도 선택‘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에게 있어서 포기와 불가능은 하나의 의견일 뿐 ‘포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은 지킬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문불여일견’을 분양받기 위해 다음 현장인 남원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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