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남원 입간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남원 입간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개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는 오수의견공원을 출발해서 1시간가량을 달렸다. 남원이다.
남원 경계구역에 들어서니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는 성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대형 홍보 간판이 보인다. 직업병일까? 느닷없이 갑돌이와 갑순이가 떠오른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어디에 살았나요?" 
"정답! 한 마을이요." 

"빙고! 두 번째 문제입니다. 둘이는 무엇을 했나요?" 
"정답! 사랑이요." 

"빙고! 세 번째 문제입니다. 둘이는 결혼을 했나요? 못 했나요?" 
"정답! 못 했습니다." 

"빙고! 마지막 문제입니다. 한마을에 살고 사랑을 했는데, 왜 결혼을 못 했나요?" 
" ㆍㆍㆍ" 

"그것은 갑돌이가 프러포즈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굴뚝같았는데 겉으로는 오히려 안 그런 척했기 때문이지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둘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갑순이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첫날밤부터 울었고, 갑돌이는 쪼다 같은 게 용기는 없어도 오기는 있어서 곧바로 장가를 갔습니다."

어디 이뿐이랴. 결혼한지 6개월도 안 된 신혼부부가 식탁에 마주 앉아 카톡으로 부부의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지 않나, 결혼식을 올리고 호텔에 도착한 1일 차 신혼부부의 신랑은 10분 뒤를 생각하고, 신부는 10달 뒤를 생각하니 말이다.^^
소통의 문제다.

 

식당 창가 못난이 삼형제,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식당 창가 못난이 삼형제,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시장기가 돈다. 동력이 없는 자전거를 탈 때는 시장기를 느끼기 전에 에너지를 보충해 주지 않으면, 다리가 후들거려 페달을 제대로 밟을 수가 없다. 남원향교를 향해 달리던 중, 때마침 삼거리 모퉁이에 피켓처럼 땅에 박혀 있는 식당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곤드레 비빔밤... 063)OOO-XXXX. 예약하고 도착하니 밥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앗! 30년 만에 보는 '못난이 3형제' 인형이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보통은 별표 천일 전축이나 왕관표 금성 텔레비전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애들이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이 인형 처음부터 소장하고 계신 거예요?” “네, 특히 가운데 환하게 웃는 인형이 좋아서 지금껏 갖고 있었어요.” “이 인형을 갖고 계신 것을 보니 연세가 50대 중반 정도 되시죠?” “네. 맞아요.^^”
잠시 후, “이 반찬 내가 먹으려고 아침에 만든 건데 맛 좀 보세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사실 이 인형을 좋아해서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60대 초반은 넘는 나이인데 식당 주인 아주머니의 나이를 10% 정도 할인해서 말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여자의 나이는 10% 정도 할인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 이상이면 립서비스나 수작으로 들린다.

 

금성 텔레비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금성 텔레비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잠깐만>
지난 반세기 동안 태양계에 커다란 변화 2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당했고,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ㆍㆍㆍ
금성이 LG로 바뀌었습니다.^^

 

 남원 향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남원 향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20분쯤 달리자 고려·조선 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었던 남원향교가 나왔다. 남원향교는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는데, 성균관이 대학에 해당한다면 향교는 중고등교육 기관이고 서당은 초등교육 기관에 해당한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書院)이 발달하자 기능이 약화 되었고, 1894년(고종31)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이름만 남아 있고 지금은 전통과 고전 문화를 계승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운주당,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운주당,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 서당(書堂) 그리고 서원(書院) 등은 모두 미래를 위한 소통의 장이다.

이순신 장군도 소통을 위해 항상 운주당을 운영했다. 운주당(運籌堂)은 한자 그대로 산가지(주판)를 튕기는 것으로 지금의 전략실에 해당한다. 이순신 장군이 운영한 운주당은 특이한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동식’이고 다른 하나는 ‘무제한’이란 점이다.
이동식이란, 어느 건물에 한정되어서 전략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나무 그늘이나 식탁이나 이동 중이나 할 것 없이 언제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고 논의하는 곳은 어디나 운주당이었다. 
무제한이란, 신분과 직분과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순신 장군과 면담이 필요하면 모두 가능했다.
의금부를 떠나 권율 장군을 만나기까지, 백의종군 120일의 여정에서도 쉼터나 숙박지나 심지어 보행 중에도 운주당은 운영되고 있었다.

세계 4대 해전인 한산해전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목동(어부) 김천손(산양읍 출신)이 한산대첩 하루 전날 견내량에서 당포(미륵도)까지 약 20km를 달려가 이순신 장군에게 왜선 70여 척이 거제도를 출발해 견내량에 도착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승리로 이끌게 했다(이충무공전서 권2, 장계 34쪽).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운주당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열린 전략실’이었기 때문이다. 
운주당 건물은 한산도에 있었는데, 지금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制勝堂)의 전신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는 후대와의 소통이고, 운주당의 운영은 당대와의 소통이다. 특히 운주당은 빅데이터의 가공실이었고, 집단지성이었다.

소통이 안 되면, 진통제도 소용없는 고통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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