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선평삼거리 이정표,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선평삼거리 이정표,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순천 선평삼거리 부근에서 권율 장군을 만나기 위해 머물렀던 이순신 장군은 두 번째 유턴을 해야 했다. 이유는 권율 장군이 전령을 통해 조문과 안부만을 주고받다가 명나라 사신을 만나기 위해 완산(전주)으로 급히 이동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은 구례를 향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현감과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의 정탐꾼이 돌아와서 전하기를 “원수가 운봉길로 가지 않고 명나라 양총병(揚摠兵. 양원)을 영접할 일로 완산으로 달려갔다.”라고 했다. 내 행색은 엉망이라 민망스럽다.“ 
- 난중일기 정유년 5월 17일 -

 

동해마을 식당,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동해마을 식당,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나도 같이 덩달아 황전면을 통과하여 구례에 들어섰다. 석주관(石柱關) 방향으로 가면서 동해마을 입구를 지나가는데, 연이은 태풍과 긴 장마로 인해 파손된 식당이 보인다. 삭막하게 드러난 식당 내부와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보니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인이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일면식도 없는 주인의 축 늘어진 어깨와 표정 그리고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페달을 밟아 석주관을 향했다.

 

석주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석주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석주관(石柱關)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일원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곽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둔 요새지이기 때문에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했고 호남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벽이다. 이 성벽은 능선 정상을 따라 암반을 이용한 축성(築城)기법을 사용했기에 석주관성(石柱關城)이라 한다. 
 
정유재란 때에는 왕득인(王得仁)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키다가 이곳에서 순절하였고, 이어서 11월에는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과 이 지방 출신의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서 이곳을 지켰으나 왕의성을 제외한 여러 의사가 순절했다. 

 

석주관칠의사 묘,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석주관칠의사 묘,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성터 옆에 있는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묘는 이곳에서 싸운 의병장 일곱 분과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당시 구례 현감을 모신 무덤이다.
석주관칠의사묘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나니, 한참 보강 공사 중이었던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冢)이 생각난다.

 

행주산성에 있는 권율 장군 표준영정
행주산성에 있는 권율 장군 표준영정

<잠깐만>
임진왜란 3대 대첩은 한산대첩(이순신), 진주대첩(김시민), 행주대첩(권율)이다.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에서 ‘행주’라는 명칭이 사용된 유래는?
1) 행주치마
2) 지명(地名)
.
.
.
정답은 2)번
행주(幸州)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전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지명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

석주관칠의사묘 계단을 내려와 화계장터로 향한다.

독자들과 O.X 퀴즈 풀이를 하면서, 존경하지만 잘 모르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역사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 이순신에 관한 O.X 퀴즈 10선! ★
 1) 출생지는 한성, 지금의 서울이다?
 2) 키는 장신으로, 약 2m 정도였다?
 3) 재수를 하여 무과시험에 합격했다?
 4)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이순신 외에 또 있다?
 5)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
 6) 긴 칼(약 2m)은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7) 명량 해전에서 거북선이 출격했다?
 8)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가는 것은 한산 해전이다?
 9) 노량 해전 승리 후, 자살을 선택했다?
10) 이순신 장군의 묘는 현충사에 없다?

☆ 정답과 풀이 ☆
 1) [O] 서울 중구 인현동1가 31-2번지.
 2) [X] 당시 조선 평균 키인 155~160㎝.
 3) [O] 별시(특별시험)에서 낙방하고, 4년 뒤 식년시(정시. 3년마다)에서 합격.
 4) [O] ‘무’로써 ‘충’성한 ‘공’신.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 가평 남이섬의 남이 장군 등. 고려 때 최소 3명, 조선 때 최소 9명.
 5) [X] 나주 군관 나대용. 
 6) [X] 의전용. 둔해서 사용할 수 없음. 
 7) [X] 원균이 이끄는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모두 잃어버렸음.
 8) [O]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 한산.
 9) [X] 역사 소설을 쓰는 사람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생각대로’ 씀.
10) [O] 현충사에서 약 8km 떨어진 충남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음.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는 ”나는 70 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했고, 이어서 범물개유가취(凡物皆有可取) 즉, ”물건마다 모두 취할 바가 있다.”라고 했다. 여기서 ‘취할 바’는 그 사물의 핵심인 '본질'이다. 자동차의 본질은 잘 달리기보다 잘 서는 것이고, 건물을 본질은 높이 세우기보다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과 120일의 동행 ‘백의종군 길’의 본질은 무엇일까?

 

섬진강 길, 
섬진강 길,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420여 년 전에 이 땅에 살다 간 이순신 장군과 후예인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자전거 라이더들이 가장 달리기 좋은 길로 선정한 섬진강 길을 달려, 화계장터를 향해 페달을 밟는다.

이 기행문을 읽으면서 "죽기 전에 나도 한 번 백의종군 길을 걸어 봐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독자가 있다면, 더는 미루지 말고 바로 출발해야 한다. 
왜냐?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리면 못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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