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인터넷 네이버 지도
인터넷 네이버 지도

이동 거리와 평균 주행속도로 계산했을 때 박경리 문학관에서 손경례가옥까지 6시간이면 넉넉히 잡은 시간인데, 장거리 주행의 누적된 피로 및 생산 연식(1957년 세포분열 시작, 1958년 이순신 생가터에서 522m 떨어진 묵정동 출생, 충무국민학교 출신)과 북천에 조성된 대단위 코스모스 단지에서 한눈팔다가 손경례가옥에서 20km 못 간 북천역에 도착하니 노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숙소를 검색하니 다음 탐방지인 중촌마을부터는 오늘 중으로 들어갈 숙소가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되어 이곳에서 숙소를 잡아야 했다. 더욱이 해도 짧아지고 요즘은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길을 물어볼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어쩌다 5명 이상이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보면 ‘인파’가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코스모스 행사 안내 현수막,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코스모스 행사 안내 현수막,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북천마을은 코스모스와 메밀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여기도 코로나 19 때문에 1년을 준비한 지역행사가 전면 취소됐다. 지금도 젊지만 아주 젊었을 때는 ”행사가 취소됐나 보다“ 하고 발길을 돌리지만, 지금의 나이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시름이 들리는 것 같아 발길이 무겁다.

숙소를 물어보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다행히 북촌마을 면사무소 공무원을 퇴근 중에 만났다. 숙소를 물어보니 북천마을에도 모텔은 없고 뒤로 5km 정도 가면 산 중턱에 ‘코스모스****민박’이 있기는 하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화번호를 검색해 예약하고 가는데, 암흑이 깔린다. 저녁도 못 먹고 어두운 밤길을 ‘끌바’(자전거를 끌고 감)로 고생고생하며 올라갔다. 펜션 주인에게 저녁을 못 먹었다고 했더니, 우리가 먹는 대로 먹을 거면 가능하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오겹살 2줄(25☓6☓0.7cm)이 타원형 접시에 올려져 나왔고 시골 김치와 이름 모를 나물 3가지에 깻잎과 상추 그리고 마늘까지 나왔다. ~♬ (먹다 남은 거지만 권하는 소주 반병은 사양했다.)

 

이병주 문학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이병주 문학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아침 6시경에 쥔장이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일찍 밭에 나가야 해서 지금 아침을 먹는데, 식사를 같이할 거면 오세요.” 
“네~!”(이게 웬 떡이야?^^)

아침까지 잘 먹고 출발 준비를 한 후 계산하려고 사무실에 들렀더니, 모두 밭에 나가고 산후조리하고 있는 며느리만 있다. 카드를 건네며 숙박비와 어제저녁하고 오늘 아침 식대까지 계산하면 된다고 했더니, 시어머니께서 밥값은 받지 말라 하시고 나가셨단다. 그래도 얼마라도 받으라고 했더니 안 받는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카드를 다시 달라고 하고, 현금으로 지급하고 출발했다.

5분쯤 내려가니 이병주 문학관이 보인다. 어제저녁에 올라갈 때는 어두워서 안 보이던 문학관 건물이 보인다.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전시관 내부 관람은 코로나 19로 입장을 할 수 없었다.

 

이병주 조형물,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이병주 조형물,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소설가이면서 언론인으로 활동을 한 이병주는 경남 하동 북천 출생(1921~1992)이고 지적인 문체와 깊고 넓은 역사의식으로 등단 수년 만에 작가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일본 유학 중에 태평양 전쟁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종전되고 광복 후에 귀국하여 대학교수와 ‘국제신보’ 주필로 활동하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관부연락선’과 ‘지리산’으로 알려지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이병주 어록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이병주 어록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 이병주 어록 -

현재와 미래는 기록(저장 데이터)을 활용한 기술로 승패가 결정이 난다. 기록이 기억보다 한 수 위이고, 무딘 연필이 총명한 머리보다 낫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와 함께 ‘이충무공전서’는 ‘아날로그 빅데이터’인데 이것이 필자가 열광하며 열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 해전. 현충사 사당에 있는 십경도
부산 해전. 현충사 사당에 있는 십경도

<잠깐만>
언어유희(言語遊戲) 
1. 적자생존 =>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 - 속기사
2. 필사즉생 => 베끼면(筆寫) 살아남는다. - 벤치마킹
3. 선공후사 => 먼저 공격하고, 나중에 사과한다. - 정치인
4. 난중일기/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이순신 장군이 힘든 부산 해전에서 승리한 후, 너무 피곤하여 당일의 일기 쓰는 것을 미루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자, 한 군관이 장군께 아뢴다.

군관: 장군. 오늘의 전란일기 쓰는 것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장군: 알고 있네. 하지만, 오늘 해전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내일 쓰려고 하네.
군관: 장군. 그래도 기억이 생생할 때 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장군: 나도 알고 있네만, 이만 물러가게. 오늘은 쉬고 나중에 씀세. 
군관: 장군. 지금껏 하루도 미루지 않고 쓰셨는데,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군: (피곤함에 지쳐 말하기도 힘든 듯)
        어~허. 내가 난중에 쓴다고 하지 않았느냐?!
     - 그래서 ‘난중일기’가 되었다는….

 

 왜, 이순신인가?,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왜, 이순신인가?,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1) 무패의 신화!
‘23전 23승’은 ‘지피지기 백전불태’와 같은 맥락으로, 전략과 지략으로 이겨 놓은 싸움을 한다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의미이다. 
대략,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는 크고 작은 해전이 49번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주장(主將)이 되어 치른 해전은 45번 정도 된다. 23승을 뺀 나머지 22번은 왜군이 겁을 먹고 도망을 하거나 날이 저물어 끝장을 못 본 것이니, 45전 23승 22무인 셈이다. 이를 수사학적으로 임펙트를 넣어 ‘23전 23승’ 또는 ‘무패의 신화’라고 한다.

23전 23승의 확률은 일천만 서울시민이 광장에 모여, 둘씩 짝을 지어가면서 연속적으로 ‘가위바위보’ 경기를 했을 때, 한 번도 지지 않고 23번을 모두 이기면 1등이 되는 확률이다.

2) 문(덕장)과 무(용장)를 겸비함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많은 기록물과 23전 23승의 전적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상호 보완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육체노동자는 정신력을 강화하고, 정신노동자는 체력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가전업체인 L 사가 S 사에 못지않은 디자인과 기술력을 갖고 있어도 인문학에서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실적이 저조한 면이 있다.

3) 당사자 입장에서 쓴 전란일기
이순신 장군의 미루지 않는 기록(메모) 습관은 데이터 축적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에는 권모술수나 역모에 연루되는 일이 많아서 알리바이 증명 차원에서라도 이순신 장군은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기록을 꾸준히 했으리라 생각된다.

“무딘 연필이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