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마을버스정류장,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마을버스정류장,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어제 오후에 통과해야 했을 중촌노인복지회관을 향해 출발했다. 지도상 노인복지회관은 국도에서 안쪽으로 꽤 들어가서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때마침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나무 평상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보인다. 어찌나 반가운지….

“안녕하세요? 길 좀 여쭙겠습니다. 중촌노인복지회관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 오래간만에 길에서 대화상대를 만난 반가움과 ‘왜 저러고 다니나…?’ 하고 묘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본다. -

“워디서 온겨?”
“아~ 네.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서 여까징 자전거 타고 온겨?”
“네.”

“힘들지 않어?”
“힘들어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재미있게 다니고 있습니다.”

“서울은 언제 올라가?”
“네~. 이순신 장군이 가셨던 백의종군 길을 따라 카메라로 찍으면서 다니고 있는데, 합천까지 다 찍으면 올라가려고요.” 

“여기가 이순신 장군이 지나간 길이여?
”네.“

”그거 다 찍으면 일본놈들 혼내줄 수 있는겨?”
“혼내주거나, 뉘우치게끔 해주려고요.”

“수고가 만쿠먼. 난 원래 고향이 충청돈디, 여기루 시집와서 여적 살고 있어. 젊은이는 고향은 어디여?”
“네. 저는 고향도 서울이에요.”

“집에서 그러고 다니는 거 알어?”
“~@\@~  네.^^ 다 허락받고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중촌노인복지회관은 어디로 가야 해요?”

“근데. 아침은 먹고 나온겨?”
“네. 먹고 나왔습니다.”

“젊다고 너무 무리하고 다니지 말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저쪽에 위를 보면, 나무 뒤쪽으로 팔각정 보이지?”
“네.”

“팔각정만 보고 가.”
“네. 감사합니다.”

- 길 한번 알려주는데 관문이 너무 많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동갑이거나 오히려 여동생일 수도…ㅎㅎ

 

중촌노인복지회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중촌노인복지회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그야말로 꼬부랑 시골길의 논두렁 밭두렁을 돌고 돌아 노인복지회관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마을 청년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노인복지회관은 역시 코로나 19로 폐쇄되었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요즘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시골 노인들이 얼마나 갑갑하고 어려울까. 평소 같았으면 숙소 해결이 어려울 때는 이런 곳에서 하룻저녁 신세를 질 수도 있지만, 엄중한 시기라 엄두도 못 낸다. 특히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인분들에게 외부인은 경계 대상 1호이다. 노인복지관 앞에 있는 팔각정에서 잠시 허리를 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의 윤리·도덕이 타락할수록 천대받는 건 노인뿐이다. 그리고 준비된 노년은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노년은 재앙이 되겠구나….”

다음 탐방지인 손경례가옥을 향해 달리면서, ‘나의 노후는 축복일까? 아니면 재앙일까?’ 하는 생각에 잠겨 한동안 달렸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자전거를 페달을 밟아서 그런지 긍정적인 생각으로 정리가 된다.
“내 젊음이 나의 노력으로 받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세월이 가는 것만으로 늙지 않는다. 열정을 잃었을 때 비로소 늙는다. 파이팅!”

 

원계 초등학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원계 초등학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경례가옥에 도착하기 전, 학교명도 알 수 없는 폐교된 학교 건물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학교운동장은 잡풀로 무성하고 교실 건물은 형편없이 낡아 있다. 면사무소를 검색해 전화를 걸어 문의했더니, 1994년에 폐교된 원계 초등학교라고 한다. 26년 전부터 이곳 운동장에는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겠구나….

지도를 검색하니, 원계 초등학교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가 있는 ‘진배미’와 ‘손경례가옥’이 확인된다.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가치를 교육하는 충무교육원(아산 현충사 옆)에서 이런 폐교를 활용하여, 전라도와 경상도를 권역으로 한 ‘제2 충무교육원’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배미 안내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진배미 안내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왼쪽 골목 입구에서 100m만 가면 진배미 유적지가 나온다는 길 안내판이 보인다. 진배미는, 진(陳)과 배미(뱀: 구획진 논을 세는 단위)의 합성어로 당시에 군사훈련을 했던 장소이다. 정유년 7월 16일 원균의 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를 당한 후,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과 면담하고(7월 18일) 나서, 현지 남해안 상황을 돌아보고 23일 이곳에 도착하여 손경례가옥에서 유숙하면서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다.

원계 초등학교가 있었던 이곳 원계리는 하동·사천·진양·산청 등 4개 군의 접경지역이며 임진왜란 당시는 영·호남과 남해안 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백의종군 중, 이순신 장군은 이곳을 세 차례 오가며 유숙했고, 손경례가옥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게 재임명(8월 3일) 되면서 수군 재건의 첫걸음을 뗀 곳이기도 하다.

 

진배미 골목길,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진배미 골목길,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골목길에 들어서서 100m가량 들어가니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 입구가 왼쪽으로 보이는데, 비닐하우스와 비료 등으로 가려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몰라 지나갔다가 되돌아 왔다. ㅠㅠ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있는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과 얼을 되살리기 위해 높이 4m 너비 1m의 유적비를 세워 보존하고 있는데, 관리는 안 되는 것 같다.

 

왜 이순신인가?,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왜 이순신인가?,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4) 유네스코에 ‘난중일기’ 등재
난중일기의 특징은, (1) 당사자가 (2) 현장에서 (3) 대필없이 직접 쓴 것이고 (4) 전장에서 전사함으로 군인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순국을 했다는 점이다.
백의종군 길과 함께 난중일기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기에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5) 2번의 백의종군과 3번의 파직
이정도 되면 직업 군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조선과 조선의 백성을 자신보다 더 운명적으로 사랑했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운명은 용기 있는 자 앞에서는 약하고, 비겁한 자 앞에서는 강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줬다.

6) 전쟁비용 대부분을 자급자족
당시 조선의 조세정책은 전체 인구의 20~30% 정도밖에 안 되는 양민들에게만 세금을 걷었고, 지배계급(양반·중인 등)은 면세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나라의 재정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국방의 모든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휘하의 수군들을 동원하여, 전투를 치르는 동시에 농부(논·밭 농사, 목화 생산 등)와 어부(고기잡이, 소금생산 등)의 역할을 함께하여 재정적 자립을 위한 독자적인 행보를 해야 했다. 더욱이 자급자족을 넘어서 당시에 귀한 종이까지 제조하여 조정에 역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자립정신 있었기에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정으로부터 국방비 지원 없이 자립의 힘(정신)으로 왜군을 격파하며 조선을 지켜냈다.

 

태극기와 일장기,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태극기와 일장기,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잠깐만>
성벽(城壁)과 장벽(障壁)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세력과 위험을 막는 차단벽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는 역주행 차단벽도 있다. 탈주를 막기 위해 동독이 설치한 베를린 장벽과 '일본제품불매운동' 열풍을 몰고 온,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주요 품목 수출규제(몽니)가 그것이다. 둘 다 불안에 떨고 있다는 방증이다.

올해도 독일은 내년 예산에 유대인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한 예산을 세웠다. 피해자들이 그만하면 됐다고 해도 계속되고 있다.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진정성에서 독일과 일본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을 못 참는 '좌충우돌'과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징용 할아버지에 대한 위아래가 없는 '안하무인'을 보면서, 태극기와 일장기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태극기는 좌우가 바뀌거나 위아래가 뒤집히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데, 일장기는 그게 그거라서 그런가…?

삼국시대의 왜적(倭敵). 고려시대의 왜구(倭寇). 조선시대의 왜군(倭軍). 현재의 왜상(倭商)….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러지?

일본은 용서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
.
.
“용서는 뉘우치는 자에게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