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경례 가옥 길거리 안내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경례 가옥 길거리 안내판,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진배미’에서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허술하게 만든 손경례 가옥 길거리 안내판이 보인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곳은 어떤 곳인가?

백의종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바로 이곳 손경례 가옥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8월 3일) 되어 백의종군 신분에서 벗어나면서 사면복권과 함께 명예회복을 했고 동시에 주장(主將)으로서 수군재건의 출발점으로 삼아, 명량의 반전과 노량의 역전을 만들어 낸 곳이다.

 

손경례 가옥 입구 비석,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경례 가옥 입구 비석,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충무공이순신통제사 재수임사적지 입구’

유적지 비석이 낙엽과 잡풀에 뒤덮이고, 수명을 다한 4인용 의자가 뒷배경이 되는 것이 볼썽사나워서 자전거로 가리고 찍었다. 안타깝게 초라하다.

 

 손경례가옥 대문,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경례가옥 대문,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나중에 안 것이지만, 길 입구에서 손경례가옥까지의 거리는 125m. 입구에 손경례가옥이라는 안내판이 있었으면, 가옥 앞에는 마중 나온 안내판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를 봐도 안내판은 없다. 대신 옆집의 사나운 개 2마리가 물어뜯을 듯이 격하게 반겨 준다. 가정집처럼 된 대문이라 잘못하면 무단침입이 될까 걱정하며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 3번이나 왕복하며 헤매다가 안내문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이 지역 방역 요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잠깐만요! 이 근처에 손경례가옥이 있다는 데 어디에 있습니까?”
“손경례가옥이 있다고 해요?”
오히려 되묻는다.

“네. 지도상에도 표시가 되어있는데, 찾지를 못하겠네요.”

방역 요원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어딘가에 전화한다.
“면사무소지요? 방역하는 000인데, 서울서 자전거 타고 온 사람이 손경례가옥을 물어보는데 몇 번지죠?”

전화를 끊은 방역 요원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조금 전 가정집 같은 대문을 가리키며 "여깁니다!"하고 알려준다. 

 

필자와 필사즉생 필생즉사,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필자와 필사즉생 필생즉사,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남의 가정집을 들어가는 기분이라 조심조심 들어가서 사진만 찍고 나오려 하자 방역 요원이 말한다.
“여까정 힘들게 찾아오셨는데, 사진 한 장 찍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 메시지를 본 것 중에 최악이다.

 

손경례가옥 내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손경례가옥 내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가옥 내부는 관리가 안 되어 잡풀이 무성했고, 문창호 지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고, 오른쪽으로는 ‘충무공이순신장군삼도 수군통제사재수임사적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필사즉생과 유적지 비석, 가옥 지붕까지 ‘최악의 3종 세트’를 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다음 탐방지인 남사마을 박호원 농가로 가는 지도를 확인했다.
 
출발하기 전, 손경례가옥 그리고 가옥 주변의 환경 개선과 관리를 위해 면사무소에 전화로 민원을 넣으면서 말했다.

“여기가 백의종군 마지막 지점이면서 동시에 수군재건 시작 지점입니다. 그리고 진주시 수곡면의 자랑인데, 면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제가 길치가 아닌데 너무 힘들게 찾았네요. 내년 봄에 수군재건로 촬영을 위해 또 올 겁니다.”

 

남사마을 박호원 농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남사마을 박호원 농가,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남사마을에 들어섰다.
왼쪽으로는 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촬영지가 보이고, 정면 팔각정 뒤로는 이사재(尼泗齋)가 보이는데, 이사재는 조선전기 임꺽정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박호원의 재실(齋室)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예담촌을 한눈에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2.4㎞ 정도가 아름다운 하천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데, 자전거로는 갈 수가 없었다.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날, 이순신 장군은 이곳 박호원의 농사를 짓는 노비(奴婢)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는데, 밤새 내리는 빗속에 방마저 험하여 선잠을 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정유년 6월 1일).


<잠깐만>
명문대학 정치학과 시험문제.

문제: 다음에 열거한 10개의 낱말을 네 글자로 된 한 단어로 통합하시오!

1) 내로남불 2) 흑색선전 3) 당리당략 4) 아전인수 5) 정경유착 6) 밀실경영 7) 가짜뉴스 8) 이해충돌 9) 부모찬스 10) 백의종군

학생들이 쓴 답은 다양했지만, 출제 교수가 원하는 정답은 “대한민국” 이었다.
채점을 마친 교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 단어를 더 정답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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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일부, 국해의원(國害議員) 이야기 -

 

왜, 이순신인가?, 인포그래픽=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왜, 이순신인가?, 인포그래픽=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7)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음
청렴(淸廉)과 공정(公正)에 보낸 응원이었다. 조선 시대에 일어난 난(亂)들은 이것들이 없어서 일어났다.

8) 적장들이 미워하면서도 존경함
"치밀한 수학적 두뇌에 장군다운 그릇을 갖춘 인물이다."
 - 오가사와라 나가나리(1867~1958 해군 중장)

"내가 가장 존경(敬慕)하는 장수는 이순신이다. 영국 넬슨 제독의 명성이 높다지만, 인격과 천재성에서 이순신에 필적할 순 없다.“
-사토 데쓰타로(1866~1942 해군 중장)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거북선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게 등장하며, 일본인들에게 "이순신 또는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질문할 경우 "도고보다 이순신 쪽이 더 유명할 것"이라는 대답을 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식자층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발단은 임진왜란이 끝난 약 100년 뒤인 1695년에 류성룡 대감의 '징비록'을 훔쳐다가 일본어판인 '조선 징비록'을 출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9) 전장에서 전사(명예로운 순국)
나라가 없다면, 순국(殉國)도 없다.

10) 오늘날에도 유훈과 교훈을 줌
최근 들어 ‘이순신’과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정치권 안팎에서 자주 사용된다. 자신의 잇속을 위해 너무도 가볍게 소환해서 제멋대로 쓰고 있다. 구한말 이순신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결과 일제강점기를 보냈고, 도고 헤이하치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난 명장의 유훈과 교훈을 얻고서도 사리사욕에 눈먼 지도층의 무능함과 안일함으로 인해 국민은 치욕을 겪어야 했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가 휴가를 나온 아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 갑오년 1월 12일 난중일기 중 -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서신 등에는 '일심‘(一心)이란 수결(手決.서명)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의 지도층들은 이러한 것들을 정치적인 도구로 삼아 장군의 명성에 먹칠하지 말고, 진정으로 이 나라에 이바지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촉구한다.

4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 기록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보다, 모든 전쟁의 시작을 끝내야 한다고….

”다시는 난중일기를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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