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춰진 채 300년 넘게 풍산홍씨 후손가에 전래된「기사계첩 및 함」을 국보로 지정하고, 「경진년 연행도첩」, 「말모이 원고」 등 조선 시대 회화, 서책, 근대 한글유산 등 6건을 보물로 지정 하였다.

 

국보지정, 기사계첩 및 함, 만퇴당장, 전가보장
국보지정, 기사계첩 및 함, 만퇴당장, 전가보장

국보 제334호 「기사계첩 및 함」은 1719년(숙종 45년)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제작한 계첩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다.

계첩은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으로, 보통 참석한 인원수대로 제작해 나눠 갖는 것이 풍습으로 오늘날 기념사진과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다.

기로소(耆老所)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들을 우대하던 기관. 1719년 당시 숙종은 59세였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태조 이성계가 70세 되기 전 60세에 들어간 예에 따라 입소했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17년도부터 실시한 보물 가치 재평가 작업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의 기사계첩이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번 건이 두 번째 국보 지정이다.

이번에 지정된「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1653∼1719)의 발문, 각 행사의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초상화,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다른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국보지정, 기사계첩 및 홍만조 초상
국보지정, 기사계첩 및 홍만조 초상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되어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중의 한 명이었던 홍만조(1645~1725)에게 하사되어 풍산홍씨 후손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말해 준다.

이 계첩은 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싸개), 외궤(外櫃)로 이루어진 삼중(三重)의 보호장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으로,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추어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 글씨와 더불어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아울러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지정, 경진년 연행도첩
보물지정, 경진년 연행도첩

보물 제2084호「경진년 연행도첩」은 경진년인 1760년, 11월 2일 한양에서 북경으로 출발해 이듬해 1761년 4월 6일 돌아온 동지사행의 내용을 영조(1724∼1776)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어람용 화첩이다. 사행단을 이끈 정사(正使)는 홍계희(1703∼1771)가, 부사(副使)는 조영진(1703∼1775), 서장관(書狀官)은 이휘중(1715∼?)이 맡았고 그림을 담당한 화원으로 이필성이 파견되었다.

화첩에 수록된 홍계희의 발문에 영조가 사행단이 떠나기 전 홍계희를 불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있던 심양관의 옛터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내용과 그 외 참고할만한 사적(史蹟)도 그려서 올린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결과, 이 화첩에는 그가 화가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을 찾아간 심양관(瀋陽館)과 산해관(山海關)의 옛터, 북경의 문묘(文廟) 등 유교 사적의 그림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그림은 다양한 시점이 적용된 입체적인 건물 표현을 통해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주며, 시각적으로 선명한 채색과 정교한 묘사는 18세기 궁중기록화의 수준 높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진년 연행도첩」은 제작 목적과 시기가 분명하고 영조의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 해당 유적지 장면, 그림과 관련된 도설(圖說), 설명식 발문 등이 일괄로 짝을 이뤄 사행의 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의도된 독특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아울러 18세기 중반 궁중회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작품의 성격 측면에서도 당시 시대상과 정치, 외교, 문화 등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또한, 이번 지정에는 조선~근대 한글유산 3건이 대상에 포함되었다. 특히, 근대시기 한글유산 2종은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련 아래 우리말을 지켜낸 국민적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성과 상징성이 있는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보물지정, 말모이 원고
보물지정, 말모이 원고

첫 번째로 보물 제2085호 「말모이 원고」는 학술단체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주관으로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과 그의 제자 김두봉(1889~?), 이규영(1890~1920), 권덕규(1891~1950)가 집필에 참여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말모이’의 원고이다.

‘말모이’는 말을 모아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오늘날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주시경과 제자들은 한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살려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말모이’ 편찬에 매진하였다.   

‘말모이 원고’ 집필은 1911년 처음 시작된 이래 주시경이 세상을 떠난 1914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본래 여러 책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ㄱ’부터 ‘걀죽’까지 올림말(표제어)이 수록된 1책만 전해지고 있다.

‘말모이 원고’는 사전 출간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원고지에 고서(古書)의 판심제(版心題, 책 제목)를 본 따 그 안에 ‘말모이’ 라는 서명을 새겼고, 원고지 위ㆍ아래에 걸쳐 해당 면에 수록된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 모음과 자음, 받침, 한문, 외래어 등의 표기 방식이 안내된 것이 특징이다.  

▲ 현존 근대 국어사 자료 중 유일하게 사전 출판을 위해 남은 최종 원고라는 점, ▲ 국어사전으로서 체계를 갖추고 있어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사전 편찬 역량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자료라는 점, ▲ 단순한 사전 출판용 원고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 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술 의의가 매우 크다.
 

보물지정, 조선말 큰사전 한글 원고
보물지정, 조선말 큰사전 한글 원고

보물 제2086호「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전신)에서 1929~1942년에 이르는 13년 동안 작성한 사전 원고의 필사본 교정지 총 14책이다. (사)한글학회(8책), 독립기념관(5책), 개인(1책) 등 총 3개 소장처에 분산되어 있다. 특히, 개인 소장본은 1950년대 ‘큰사전’ 편찬원으로 참여한 고(故) 김민수 고려대 교수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말 큰사전 원고’의 「범례」와 「ㄱ」부분에 해당하는 미공개 자료로서, 이번 조사 과정에서 발굴해 함께 지정하게 되었다. 

‘말모이 원고’가 출간 직전 최종 정리된 원고여서 깨끗한 상태라면, 이 ‘조선말 사전 원고’ 14책은 오랜 기간 동안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해 지속적으로 집필ㆍ수정ㆍ교열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손때가 묻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가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이를 바탕으로 1957년 ‘큰 사전’(6권)이 완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철자법, 맞춤법, 표준어 등 우리말 통일사업의 출발점이자 결과물로서 국어사적 가치가 있지만,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들 뿐 아니라 전국민의 우리말 사랑과 민족독립의 염원이 담겨있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29년 10월 31일, 이념을 망라해 사회운동가, 종교인, 교육자, 어문학자, 출판인, 자본가 등 108명이 결성해 사전편찬 사업이 시작되었고, 영친왕(英親王)이 후원금 1천원(현재기준 약 958만원)을 기부하였으며, 각지의 민초(民草)들이 지역별 사투리와 우리말 자료를 모아 학회로 보내오는 등 계층과 신분을 뛰어넘어 일제의 우리말 탄압에 맞선 범국민적 움직임이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 식민지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준비했던 뚜렷한 증거물이자 언어생활의 변천을 알려주는 생생한 자료로서, ▲ 국어의 정립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실체이므로 ▲ 한국문화사와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대표성ㆍ상징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ㆍ학술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국민에게 그 의의를 널리 알리고,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할 필요가 있다.

 

보물지정, 만석군전(좌), 곽자의전(우)
보물지정, 만석군전(좌), 곽자의전(우)

보물 제2087호「효의왕후 어필 및 함-만석군전ㆍ곽자의전(孝懿王后 御筆 및 函-萬石君傳ㆍ郭子儀傳)」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비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1753∼1821)가 조카 김종선(金宗善, 1766∼1810)에게 『한서(漢書)』의「만석군석분(萬石君石奮)」과『신당서(新唐書)』의「곽자의열전(郭子儀列傳)」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다음 그 내용을 1794년(정조 18) 필사한 한글 어필(御筆)이다.

오동나무로 만든 여닫이 뚜껑의 책갑에 보관되었고 ‘곤전어필(坤殿御筆)’이라고 단정한 해서(楷書)로 쓰인 제목, 「만석군전」과 「곽자의전」을 필사한 본문, 효의왕후 발문, 왕후의 사촌오빠 김기후(金基厚, 1747∼1830)의 발문 순으로 구성되었다.

이 한글 어필은 왕족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 필사가 유행하던 18세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한글흘림체의 범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제되고 수준 높은 서풍(書風)을 보여준다. 특히, 왕후가 역사서의 내용을 필사하고 발문을 남긴 사례가 극히 드물어 희소성이 크며 당시 왕실 한글 서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 국문학적, 서예사적, 역사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작 시기와 배경, 서예가가 분명해 조선시대 한글서예사의 기준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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