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대양면 백의종군 안내석,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대양면 백의종군 안내석,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종착 지점까지 15km가 남아있다는 대양면의 안내석이 보인다. 남은 길은 한적한 국도인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엉덩이를 들고 페달을 밟는데, 목에 걸린 목걸이 두 개가 함께 춤을 춘다. 목걸이 하나는 동네의 사나운 개를 쫓아낼 때 쓸 전자 호각이고 다른 하나는 산짐승이나 들짐승을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한 전기 충격기다. 전자 호각은 3번 썼지만, 전기 충격기는 한 번도 안 썼으니 비교적 무탈한 탐방주행이었다. 

 

46번 스탬프 함,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46번 스탬프 함,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드디어 한국체육진흥회에서 조성해 놓은 마지막 46번째 스탬프 함에서 스탬프를 꺼내 수첩에 찍었다. 종각역 1번 출구 앞에 있는 1번 스탬프를 찍고 나서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46번 스탬프를 찍은 것이다

지금까지 대표적으로 알려진 백의종군 길의 총연장 길이는 640.4km와 670km 2개가 있다. 640.4km는 해군에서 순천향대에 용역을 주어 고증한 서울-> 운봉까지의 거리인 340.2km에다가, 각 지자체에서 개발한 거리를 모두 합한 수치이고, 670km는 한국체육진흥회에서 640.4km를 밑그림으로 하여, 주변 유적지를 포함하고 또 탐방객들의 편의 제공을 위해 적정 위치에 스탬프 함(1번~46번)을 설치하였기에 30km 정도가 더해진 수치이다.

 

자전거 미터기,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자전거 미터기,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도착해서 자전거 계기판을 보니, 이곳 종착 지점까지 달린 거리는 850km이다. 필자는 한국체육진흥회가 조성한 670km를 밑그림으로 하여 탐방객들의 편의는 물론, 재미와 의미까지 더하기 위해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탐방했는데, 그 길이가 850km인 것이다.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백의종군 길을 탐방할 방문객들을 위해 여러모로 정교하게 구상 중이다. 

필자의 자전거 바퀴는 지름이 26인치인 것을 장착했기 때문에, 한 바퀴가 굴러가면 약 2.07m를 나간다. 850,000m 나누기 2.07m = 410,618. 
이곳까지 달려오려고 페달을 밟아 바퀴를 굴린 횟수는 대략 41만 번이다.

 

완주 기념사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완주 기념사진,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여기까지 필자의 엉덩이에 깔려서 아무 군말 없이 따라와 준 애마(자전거)를 칭찬하기 위해, 백의종군 마지막 표지석에서 자전거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 인증사진을 찍었다.

 

자전거와 배낭,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자전거와 배낭, 사진=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또 하나, 필자의 등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함께 매달려 내려온 배낭도 서운할 것 같아, 마지막 표지석 앞에서 자전거와 배낭 둘만의 인증사진 한 장.^^

 

자전거 타는 사람,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자전거 타는 사람,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 자전거 예찬 10.

1) 심신이 건강해진다. 
2)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3) 자연환경을 보호한다. 
4) 요즘 골칫거리인 탄소배출이 없다. 
5) 지나온 길에 결코 미련을 두지 않는다. 
6) 조금 늦더라도 꾸준히 앞으로만 나간다. 
7)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달린다. 
8)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목적지까지 헤쳐나간다. 
9) 빠른 변화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균형감각을 터득한다. 
10) 모든 길에는 언덕길과 비탈길이 있듯이, 어떤 인생길에도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친다.

<잠깐만> 
역사 시간에 교수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1593년 3월~1597년 7월), 강화 협상 기간에 일어난 ’조선 패싱’과 남북 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의 ‘전시작전권’에 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한 학생이 독립된 주권국으로서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손을 번쩍 들었다.

- 볼멘소리로 질문한다. 
”교수님! 둘 다 불공정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주실 수 있나요?

- 교수는 예를 하나 더 들어 설명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가난이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많은 땅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불공정이라는 것이다.“

- 교수의 대답에 의아해하며 다시 질문한다.
”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나요?“

- 잠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한 교수가 대답한다.
”그건.“
.
.
.
”우리나라가 아직 독립국이 아니라서 그렇다.“

 

 if….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if…. 인포그래픽=전승훈 놀이문화원 이사장 겸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수

과학과 달리 역사를 "만약에…."라고 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3가지 가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는, 명(중국)과 왜(일본)의 강화 협상이 성공했다면?

한강 북쪽은 중국말을 하고, 남쪽은 일본말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둘째는, 임면권자인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에 이순신 장군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하지 않았다면?

당시 조선의 안이함과 안전불감증을 보면 상상이 안 된다.

전라 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1년 2개월 동안 전시상황을 가정해서 전라 좌수영에 있는 5관 5포의 유기적인 재정비와 철통같은 군기 검열 그리고 유비무환의 조선 수군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돌격선인 거북선을 영화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완성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선조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도치 않게 ‘신의 한 수’를 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신의 영역인지라 상상이 안 된다.

셋째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 좌수사(여수)가 아닌 경상 좌수사(부산)에 부임했다면?

리아스식 해안의 지형과 변화무쌍한 해류의 강점과 장점을 살린 게릴라전을 펼칠 기회는 줄어들었겠지만, 그래도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처럼 도망가거나, 왜군이 하루에 20km 정도씩 하프마라톤을 하며 20일 만에 한성을 점령하거나, 조선을 얕잡아본 정유재란 같은 2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움직임'이 아닌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행동은 다른 것이다. 움직임은 동물이 하는 것이고, 행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움직임은 의도되지 않은 것이고, 행동은 의도된 것으로 목표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행동이 아닌 움직임은, 가로막대가 없는 높이뛰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도 백의종군 길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훈이 들린다.

”움직임과 행동을 혼동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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