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두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닫힌 조선사회에서 태어난 “세계인”, 홍어장수 문순득

1801년 여름 조선 순조 때 일이다. 제주에 낯선 나라 사람 5명이 표류해 왔다. 

이들은 옷차림과 생김이 괴이했다. 머리를 삭발했는가 하면 귓바퀴를 뚫기도 했다. 신발을 신지 않고 흙을 밟고 다니며 새까맣기가 옻칠해 놓은 듯 했다. 말소리는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대는 듯해 알아들을 수가 없으며 글자를 써서 보여도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람은 아닌 듯하여 주민들은 이들을 ‘해귀(海鬼)’ 라 불렀다. 손짓 발짓으로 어디서 온 지를 물어봐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막가외! 막가외!”라고만 외쳤다. 아무리 해도 어디서 왔는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그해 10월 조정의 어전회의까지 했으나 허사였다.“ (정약전의 「표해시말(漂海始末)」내용중에서)

▲ (자료출처:한국해양과학기술원,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그린 문순득의 상상 초상화

 표류해 온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던 이 해귀(海鬼)사건은 그대로 묻혀지는 듯 했다.

 비슷한 시기. 전남 신안 우이도에서 두 남자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한 명은 병조좌랑을 지낸 학자며 관료인 실학자 정약전이었고 다른 한 명은 흑산도 등에서 홍어를 잡아 나주까지 내다파는 홍어장수 문순득이었다. 정약전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 길목인 우이도에서 문순득을 만나게 되었다.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던 당시는 유럽국가가 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려 혈안이 되어 있던 때였다. 마스트(돛대)를 높이 세운 범선들이 앞을 다투어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했다. 바야흐로 아시아는 식민지 정책의 위협속에 위태롭게 놓여졌다. 하지만 조선은 닫힌 국가였다. 노도같이 밀려오는 바깥 사정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양세력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 몇 달 후인 1801년 12월. 홍어를 사러 흑산도 남쪽 태사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문순득 일행 6명은 풍랑을 만났다. 겨울 추위 속에 강한 북서풍을 맞고 돛대가 부러지면서 남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파도를 맞으며 표류한 지 열흘 만에 도착한 곳이 류큐(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였다. 다행히 류큐 사람들은 문순득 일행에게 물과 죽을 주고 머무를 곳을 제공하였다. 

▲ (자료출처:한국해양과학기술원) 문순득의 고향 전남 우이도

당시 류큐국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사쓰마 번과 청나라 양 쪽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었다. 조선과는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표류민이 발생하면 조공관계였던 중국을 통해 송환하는 것이 관례였다. 

문순득 일행은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을 타기까지 10개월을 류큐에 머물렀다. 비록 표류민이었지만 문순득은 그 곳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풍습을 익혔다. 글을 몰랐지만 호기심과 뛰어난 관찰력으로 생활풍습을 기억속에 저장했다. 류큐에는 뱀과 고구마가 많이 나고 낮은 신분과 부인은 문신을 하였다. 식사는 젓가락으로 집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먹었다. 그는 가족·친지만 가능한 장례식도 참석해 그 곳의 장례문화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1802년 10월, 일행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류큐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을 타고 출발하였지만, 다시 풍랑을 만나 11월에 여송(필리핀의 ‘루손’섬을 음차한 명칭)에 도착하였다. 당시 필리핀은 이미 230년 이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류큐와 달리 여송 사람들은 표류민에 적대적이어서 중국인 거주지에 얹혀 지냈다. 신변의 위협과 생활고를 겪었지만 문순득은 여송에서도 예의 친화력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기억했다. 서양의 배, 닭싸움, 큰 성당을 보고 신기해했으며, 줄을 꼬아 팔거나 목수일을 하여 생계를 잇기도 했다. 

1803년 9월, 여송에 9개월을 머물렀던 문순득은 천신만고 끝에 상선을 얻어타고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 마침내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총 3년 2개월 4개국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자료출처: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향인 우이도에 돌아온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그 동안의 바깥세상 표류경험을 모두 전했다. 정약전이 문순득으로부터 생소했던 표류이야기를 일일이 구술하여 적은 책이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바다를 표류(漂海)한 시작(始)과 끝(末), 즉 표류기를 일컫는다. 이 책에는 표류했던 곳의 문화와 생활풍습이 상세하게 적혀있을 뿐 아니라 류큐와 여송의 단어 112개 음과 뜻이 우리말로 기록되어 있다. 문맹인 문순득이 머릿속으로 기억해 기록한 단어가 지금도 오키나와나 필리핀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도라니 놀라운 일이다. 특히 이 책은 당시 오키나와 풍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일본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다시 ‘해귀(海鬼)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제주에 표류해 있던 ‘해귀(海鬼)’의 정체는 1809년에야 밝혀졌다. 여송국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당시 이들의 국적을 밝힌 것은 표류 끝에 돌아온 문순득이었다. 그는 표류하는 동안 배운 여송말로 대화하여 무려 8년 동안 낯선 나라 조선에 묶여 있던 이들이 여송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이 말하던 “막가외! 막가외!”는 마카오를 이른 것으로, 필리핀 루손섬에서 마카오까지 상선을 타고 장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문순득의 도움으로 중국을 경유하여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송환되었다. 

▲ (자료출처:신안군문화원) 표해시말(漂海始末)

바다를 천시하고 외세를 무조건 혐오했던 닫힌 사회 조선.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문순득은 호기심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진취적 해양정신과 도전정신을 발휘해 잠든 조선을 깨웠다. 그는 불과 1년 여 만에 2개국 언어를 익힌 민간외교관이요,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진정한 세계인이었다. 실학자 정약전이 문순득에게 ‘하늘아래 최초로 나라 밖을 여행한 자’라는 뜻으로 ‘천초(天初)’라는 이름을 지어준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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