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다빈치 장영실의 눈물

“명분이 실리를 내친 야속한 실책”
지금도 명분 때문에 실리를 잃어버리는 일들이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얼마나 비일비재하는지... ‘IR52 장영실상’이라는 유명한 시상제도가 있다. 신기술제품을 개발·상품화해 산업기술혁신에 앞장선 국내업체와 연구소의 기술개발 담당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측우기 등 과학기구를 만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의 과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그 주인공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1390년?~사망연도?)은 갑자기 나타나 조선과학을 키우고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장영실과 조선의 과학기술,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동화 작가
장영실과 조선의 과학기술,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동화 작가

조선 과학의 절정기가 장영실이란 관노 출신의 한 사나이가 세종과 이루어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경이롭고 한편으로 애석한 면이 있다. 세종은 반만년 한반도 역사 가운데 가장 영민한 군주였고 초기 조선왕국을 안정된 국가체제로 만든 훌륭한 리더였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과 관련한 사소한 정책적 판단 실패는 분명 아쉬움을 남기는 면이 있다.

당시 조선의 과학계를 이끌어 가던 창조적 인물 장영실을 밀어낸 판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뒷맛이 나쁜 악수였다. 해시계 물시계 갑인자 혼천의 등 당시 중국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기술개발로 과학입국을 꿈꾸었던 장영실은 너무도 하찮은 이유로 장형을 선고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갑자기 사라졌다. 

부산 동래현 관노에서 임금과 마주한 신분 상승

장영실은 언제 죽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다. 세종실록은 그가 부산 동래현의 관노(官奴)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전에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元)나라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었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무엇이든 잘 만들고 천성이 성실하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

세종은 그의 역량을 보고 받고 그를 불러 본 다음 1421년(세종 3)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케 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세계의 중심이던 중국을 보고 온 장영실은 더욱 빛을 발했다. 마침 세종은 1423년 왕의 특명으로 노비의 신분을 벗겨주었다. 조선 사회에서 면천, 즉 종의 신분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장영실은 호랑이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기록이 나타나 있다. 그 때 세종이 장영실을 이뻐하여 황희와 맹사성 등에게 승진을 의논한 기록이 실록에 나타나 있다. “장영실이 자격궁루(물시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내 가르침을 받아서 했지만, 이 사람이 아니면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1433년 9월 16일 세종실록)

장영실은 임금과 독대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모양이다. 물시계를 만들 때 임금이 직접 그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게 군신이 함께 만들어낸 놀라운 과학 업적이 바로 물시계였다. 세종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장영실을 너무도 기특하게 여겼던 세종은 그에게 정 4품 호군의 벼슬을 제수한다. 노비 출신이 정 4품이 된 것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이 한 부처의 국장급쯤 된 것이니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세종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장영실은 승승장구 조선 과학의 수준을 크게 업 그레이드한다.

조선의 다빈치, 역량을 마음껏 뽐내다

장영실의 발명품은 실용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장 현실적으로 고달픈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홍수로 인한 하천의 범람이 큰 고민거리였다. 세종은 가뭄은 어쩔 수 없으나 홍수는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장영실에게 이를 주문한다. 

이에 장영실은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만든다. 요즘식으로 비유해 보자면 홍수경보체제가 준비된 것으로 한강홍수통제소가 시시각각으로 청계천 수위를 예보하여 백성들이 미리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역사가 일부는 장영실 조상이 고려 때부터 과학기술분야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장영실은 그런 핏줄을 타고 태어난 것이었다. 

1432년에는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했고 각종 천문의 제작을 감독했다. 정4품 호군직에 오른 것은 그 다음해였다. 그리고는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했고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 감독했다. 이밖에도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와 휴대용 해시계 등 다양한 해시계,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玉漏)도 제작 완성했다. 

그러나 조선의 다빈치에게 위기는 갑자기 닥쳐왔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442년 세종이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기 위해 수레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수레가 타보기도 전에 부서져 내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장영실의 감독상 실수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범운용 해 보던 수레가 부서지자 여기저기서 그를 시기하던 자들이 죄를 주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장영실은 그 책임으로 곤장 100대를 맞게 되었는데 임금이 감해 주어 80대를 맞고 파직 당했다. 실록의 기록은 여기까지 뿐이다. 

장 80대면 중형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 장형은 가는 작대기로 때리는 형이었다. 그걸로 죽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채 수수께끼 속에 그는 파묻혔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세종의 태도다. 그렇게 곁에 두고 아끼며 반대하던 신하들을 물리쳐 가며 사랑하던 장영실을 이후에 왜 한 번도 불러내지 않은 것일까? 토사구팽처럼 용도폐기한 것일까? 갑자기 미워진 것일까? 역사의 기록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영실을 폐한 것이 신하들의 주청 때문이었고 결정을 내린 것은 세종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온 논죄가 불경죄였다. 그렇다고 그 죄가 장영실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큰 죄였을까? 혹시 세종이 보기에 수레 하나 제작하는 것을 잘못 감독했다고 장형을 100대씩이나 치자는 신하들의 위세로 보아 장영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내다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장을 치고 파직케 한 다음 멀리 보낸 것은 아닐까? 그가 연기처럼 사라진 배경에는 이처럼 세종의 숨은 보호막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과학을 무시하고 글줄이나 읽어대던 사대부들의 집단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여론 정치의 희생물이 된 것이 장영실이었다. 명분 때문에 실리를 저버린 어리석은 결정을 조정이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세종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조선은 당시 전제 군주의 명령 하나로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이 허다했던 시절이었다. 장영실의 실종으로 인해 조선의 과학 기술은 수백 년 후퇴하게 되었고 고려부터 전해 내려온 과학기술 전통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계기가 되었다. 과학자 한 사람이 수 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오늘의 현실로 볼 때 장영실의 애석한 실종은 두고두고 큰 아쉬움으로 남는 사건이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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