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예언자 이준경, 일본의 침공을 예견하다

이준경은 역사적으로 조광조나 이순신, 혹은 류성룡, 이항복 같은 이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명종 선조 시대에 임진왜란을 예언했고 당쟁의 피해를 경고했으며 국난을 극복할 영웅 이순신과 청백리 이원익을 미리 알아보고 이들을 격려하고 추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고위 관료이자 선비였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영웅이다. 그는 과연 어떤 역할로 시대를 앞서간 것일까?

 

정걸장군과 이순신,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정걸장군과 이순신,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조부와 아버지 형제 넷이 처형당하다

이준경의 집안에는 늘 명성있는 학자와 관료가 끊임없이 배출돼 왔다. 4대조 이인손은 조선 태종 때인 1417년 문과에 급제해 세조 시절에는 우의정까지 올랐다. 가문은 융성하여 다섯 아들이 모두 급제했고 그 중에서도 맏아들 극배는 성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망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발생했다.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다. 안타깝게도 성종 임금 시절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갖다 준 이가 바로 이준경의 조부 이세좌였다. 이세좌는 당시 좌승지로 사약을 들고 가 윤 씨의 사형을 집행했다. 

연산군의 입장에선 아무리 왕명을 받았다지만 이세좌 같은 인물을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었다. 어머니 윤 씨의 억울한 죽음 사건을 파헤친 연산군이 사약을 가져간 신하를 그만 둘리 만무했기에 이세좌는 연산군으로부터 즉시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 연좌제로 가족들이 함께 처형되기 시작했다. 이세좌의 아들 넷 모두가 참형을 당한 것이다. 이준경의 아버지인 이수정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당시 좌찬성이던 이준경의 종증조부 이극균 역시 사사되는 등 집안에 멀쩡한 남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두 죽음을 당하고 유배를 당했다. 그 와중에 이준경은 일곱 살이던 그의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북 괴산 청풍에 피신하여 간신히  살아남았다. 

모진 초년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외가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친가가 풍비박산 났으나 다행히 외가에서 그를 거두어 들여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어머니 신 씨는 어린 그에게 <소학> <효경> <대학> 등을 가르쳤는데 특히 <효경>과  <대학>은 외워서 가르쳤다. 끔찍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그는 기억 속에 깊이 간직하고서도 이를 내치고 절제와 근신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준경은 후일 재상에 올랐어도 결코 서두르거나 급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결정하는 일이 없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결정하는 일에 늘 신중하고 심사숙고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의 학문적 성향은 조광조에서 이어져 오지만 처세의 요령은 사촌형 이연경으로부터 배워온 것이 많았다. 이연경이 두 번 씩이나 사화에 휩쓸렸으면서도 중종의 굳건한 신뢰를 받아 살아남지 않았던가.  

“신념이 강하면 남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것을 수도 없이 보지 않았던가. 개혁은 좋지만 급진적이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스승님은 그 점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부정적인 현실이라도 발을 빼기 보다는 그 속에 깊이 발을 담가야 한다. 그러나 급진적 개혁이 아니라 신중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자. 남에게 피해를 주려 말고 그들의 불편하고 아픈 점을 먼저 헤아리자.” 이러한 현실적인 처세법은 그를 당대 최고의 재상이라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다.

판옥선
판옥선

이순신을 중매서고 이원익을 추천하다

이준경의 인물추천 이야기는 정말 좋은 결과를 낳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이준경이 오리 이원익을 명종에게 추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오리 이원익이 가난하고 어려울 때 그에게 명종으로부터 산삼을 얻어다 준 이도 준경이었다. 이원익이 조정에서 출사하고 성장할 때 이준경의 도움이 적지 않았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말하자면 이준경과 이원익은 사제지간이었던 셈이다.

또 한 가지, 이순신이 보성 군수 방진을 수하로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딸이 장성했을 때 이순신과 결혼하도록 중매를 섰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이준경은 이순신의 인성과 정의로움을 높이 사서 이순신이 임진란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방진 군수는 활쏘기의 명인이었다. 국궁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활쏘기의 명이니었기에 이순신은 장인의 활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았고 왜적과의 전투 경험도 소개받아 철저하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의 삼도수군통제사로 국난을 극복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이준경은 또 을묘왜변 때 방진과 정걸 장군을 수하로 두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정걸은 이순신보다 31살 연상으로 후일 판옥선을 만들고 노령에도 이순신 휘하로 참전하여 큰 전공을 올렸다. 이들 모두 이준경의 탁월한 인물보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방개혁과 도덕성 개혁을 외치다

이준경은 신중론자였지만 국방면에선 과감한 의식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북쪽의 여진과 남쪽의 왜에 대해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며 국방강화를 강하게 주장했고 조정 관료의 부패와 선비정신의 후퇴를 막기 위해 도덕성 개혁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준경은 문무를 겸비한 신료로 직접 을묘왜변을 진압했던 경험을 갖고 있었고 병조판서를 역임, 군무에 능숙하고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3번의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야인의 침입과 왜인들의 변란을 진압한 바 있었다. 그 때 그가 조선 국방면에 제일 약한 곳은 실전에 투입할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임을 깨달았다. 

이준경이 무엇보다 안타까워한 것은 수군을 줄이고 육전으로 전쟁을 치르려는 조정의 정책이었다. 그는 이것이 후일 국방상의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의 왜란 경험과 뛰어난 예지력으로 왜국이 해상에서 공격해 올 때 바다에서 막지 못한다면 전란의 승산이 크지 않다는 것이 그의 미래예측이었다. 

“오늘날 왜구가 또 다시 움직인다는 기미가 있으니 미리 조치하지 않으면 일이 닥쳐서는 어떻게 응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군기가 흐뜨러지고 실제 동원할 군사들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준경은 수군강화가 가장 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성종 사후에는 해상 근무를 기피하는 수군들과 이를 지휘하는 지방 관료들의 부패로 인해 수군이 현격하게 약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준경은 우선 수군의 지휘부 관료들을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채워넣고 군제와 세제를 개편하여 실질적인 지원과 작전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 그리고 수군이 원래부터 천한 일이 아님을 밝히고 일반 장정들이 수군에 배치되도록 하자는 등의 개편안을 냈다. 

이준경의 제안이 온전하게 받아들여졌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초유의 국난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조선은 해양강국으로 거듭났을 것이지만 이미 조정은 이를 수용하려는 이들보다 자신의 출세에 눈이 먼 관료들로 채워지고 있었으니 그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다.

타고난 예지력으로 앞을 내다보다

이준경의 통찰력과 예지력은 선조 이야기와 인재 추천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그의 예지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준경의 유언이다. 이준경은 병석에 누워 다시 못일어날 것을 예감하고는 자신의 마지막 유언으로 선조에게 유차를 올렸다. 차자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고 죽음을 앞두고 썼으니 유차가 되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가는 신(이준경)은 삼가 4건의 일을 갖추어 유차를 올리니, 전하께서는 조금이라도 살펴주십시오.”

이준경 묘소
이준경 묘소

그가 올린 글은 4가지 유언으로 임금과 나라의 앞일에 대한 것이었다.
이준경은 첫째, 제왕은 무엇보다도 학문하는 일이 가장 크다며  선조의 학문은 수준 이상이지만 능력과 품성을 기르는 함양의 힘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준엄하지만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순하게 하는 면이 부족하니 이를 노력하라고 부탁했다. 선조 나이 겨우 20세였으니 일흔넷의 노신이 어린 임금을 아껴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이었다.

그는 또 둘째로 아랫사람을 대할 때 위의威儀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의는 위엄과 엄숙한 태도다. 선조는 젊은 시절부터 이 부분에 약점을 보였던 모양이다. 이준경은 아무리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신하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선조의 가벼움을 나무랐다.
이 예언은 후일 그대로 적중하여 유성룡 같은 충신을 내모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논란 속에 이준경은 죽고 사후 불과 4년만에 당쟁이 발생했다. 1571년(선조4)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전랑 자리문제 때문에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인성으로 말미암아 시대의 표준이라 일컬어지다

이준경은 당대의 정승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청렴결백하여, 영의정 시절도 검소하게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집을 멀리서 보고는 주택이 아니라 곡식이나 물건을 내다 쌓아둔 창고처럼 보았기에 그를 가리켜 동고(東皐)라는 호대신 동고(東庫 동쪽 창고)라 부를 정도였다. 지금의 계동 128번지로, 불교미술박물관 앞자리다. 당연히 그는 조선의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준경은 사화 이후 명종 이후 악화일로를 걷던 조선 조정의 외척 발호, 즉 명종의 외숙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의 발호를 종식시키고 사림 정치를 시작하게 한 출발점으로 자리매김된다. 그리고 후사가 없이 승하한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를 즉위케 함으로써 조정의 안위를 튼튼하게 세운 공로가 인정된다. 

그는 북측의 여진 경계와 남측의 왜구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고 사림들의 당쟁을 염려하고 조정 관료의 부패의식과 도덕성 타락을 지적하고 조정 전반에 위기의식이 부족함을 통탄하였다. 특히 무너져가는 군제와 국방체제를 개혁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개혁관료이자 현실참여적인 학자로서 모범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의 인성은 그의 말과 행동, 지식, 문장으로 나타났고 당대의 표준이 되었다. 퇴계 이황조차 형제의 상을 당할 때 예법을 묻는 질문에 동고 이준경의 예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준경은 곧 시대의 표준이 되어 있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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