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정치에 휘말리지 않고 온유(溫柔)를 발하다

정치가 혼란한 중에 자신의 중심을 똑바로 잡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늘에 그런 인물들을 찾기 어려우니 ‘역사산책’에서 앞서 간 선인들의 모범을 찾을 수밖에...

 

맹사성 초상 : 강단있는 모습과 온화한 얼굴이 묘하게 어울린다, 사진=맹사성 기념관 소장.
맹사성 초상 : 강단있는 모습과 온화한 얼굴이 묘하게 어울린다, 사진=맹사성 기념관 소장.

고려 조정에서 실력있는 인재로 촉망받던 맹사성은 자신의 출세길이 활짝 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경이 찾아왔다. 새로운 신세계 조선이 개창했기 때문이다. 조부 맹유가 조선에 반대하여 두문동 72현이 되었고 아내의 조부가 고려 사직을 책임지던 최영 장군이었으며 고려 충신 정몽주는 아버지 맹희도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 왕조 선택 과정과 후일 본인의 참여 과정에서 속죄의 세월로 한평생 겸손과 벗하며 살았다. 맹사성이 보여준 온유의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을까?

맹사성이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은 방법 

새 왕조에 입사를 꺼린 그를 불러낸 이는 부친과 부친의 친구 대학자 권근이었다. 권근은 맹사성이 다섯 살 때 천재성을 알아보고 발굴해 냈던 스승이며 새 조선에 먼저 몸담은 자였다. 

맹사성이 조선에 출사하면서 겪은 심리적 갈등은 적지 않았다. 변절에 대한 부담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조들이 보인 절개와 충성 대신 새 왕조에 나가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질서 속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명분과 처세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은 더 이상 정치와 이념에 매달리지 말고 비정치적 처신으로, 오로지 백성을 위해 일하고 자신을 낮추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나라의 운영을 제대로 못하고 백성들만 굶긴 고려의 충신들이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절개를 지켜서 부러진 충신이 되기보다는 덕과 질서를 세워서 백성을 먹이고 살찌우는 정직한 조선의 관료가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이 온유한 자세는 그가 평생 지켜나간 ‘맹사성 표 처신술’이 되었다. 

1408년 11월 맹사성이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을 때 태종의 사위 부마 조대림이 역모에 휘말렸다. 영의정 조준의 아들이었으니 실세 중의 실세였지만 좀 모자라는 인물이라 관노가 역모를 고변하자 왕실이 깜짝 놀랐다. 태종은 왕실 체면이 걸린 사건이라 전모를 밝히기를 힘썼지만 결국 조대림이 어리석어 목인해의 꼬임에 빠진 것임을 알게 되어 무죄방면했다. 

그러나 사헌부 수장으로서 맹사성은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법대로 하자면 조대림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맹사성은 죽음을 각오하고 원칙대로 그를 취조하게 되었고 태종은 자신의 명을 거역한다고 고문케 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병상의 부원군 권근과 영의정 하륜, 좌의정 성석린도 나서서 맹사성을 감쌌다. 이에 극형만은 면하고 장杖 1백대를 맞고 유배됐다. 그러나 태종은 속으로 바른말을 하는 맹사성을 믿기 시작했다. 

실록을 보려는 세종을 만류하다

태종의 추천을 받아 세종은 맹사성을 절대 신임했고 중요한 일을 두루 맡겼다. 세종은 재위 12년(1430년) 황희와 맹사성을 불러 태종의 실록을 감수하도록 지시하고 1년에 걸친 작업 후 이듬 해 3월17일 춘추관에서 태종실록36권을 편찬한 뒤 실록을 보고 싶어 했다.

이에 우의정 맹사성은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걱정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세종이 이를 듣고 생각을 바꾸어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선 최고의 문화행정가와 예술가로 우뚝 서다

 

옥피리 : 맹사성의 유물로 불리는 이 옥적은 길이 50.5㎝, 지름 2.7㎝로, 백옥으로 만든 젓대이며 횡적(橫笛)이다. 일제강점기 때 네 도막으로 부러졌는데 백동관으로 감싸서 수리하였다.
옥피리 : 맹사성의 유물로 불리는 이 옥적은 길이 50.5㎝, 지름 2.7㎝로, 백옥으로 만든 젓대이며 횡적(橫笛)이다. 일제강점기 때 네 도막으로 부러졌는데 백동관으로 감싸서 수리하였다.

맹사성은 음악과 이론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 연주를 직접 즐기고 제작도 했으며 늘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즐겨 불었다. 세종은 이를 알고 중국 음악으로 편향되지 않은 조선만의 음악과 소리, 악기가 있어야 한다며 맹사성에게 조선의 음악 체계를 잡도록 했다. 세종은 이미 중국과 독립된 고유의 것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431년에 태종실록을 편찬한 공로로 좌의정이 된 맹사성은 73세 되던 1432년 정월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했는데 조선왕조 최초의 지리책으로, 그가 해낸 큰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맹씨 행단 : 맹씨 행단 경내에 있는 고택이다. 서기 1330년경 건축한 고려 건축의 백미다. 무민공 최영이 살던 곳을 후에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이를 얻어 살게 되었고. 여러 번 개수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고려식의 구조에 티베트식을 가미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맹씨 행단 : 맹씨 행단 경내에 있는 고택이다. 서기 1330년경 건축한 고려 건축의 백미다. 무민공 최영이 살던 곳을 후에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이를 얻어 살게 되었고. 여러 번 개수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고려식의 구조에 티베트식을 가미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는 청백리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맹사성은 관직에서 번 돈으로 식량을 사서 먹었으며 결코 다른 수입을 꾀하지 않았다. 그는 식량을 사고 남은 녹봉으로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집 한 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관직을 그만 둔 그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고택 하나와 흰 피리 하나, 그리고 몇 가지 값나가지 않은 유물들 뿐이었다. 지금의 아산 배방읍에 가면 맹사성의 고택 ‘맹씨행단’과 기념관이 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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