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을 포기해 쇄국을 자초한 인조의 리더십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는 1627년 조선에 표착한 최초의 서양귀화인 박연이다.  26년 뒤 같은 나라에서 하멜이 36명의 선원들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벨테브레와 하멜의 표착은 조선을 쇄국에서 개방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상왕국이라고 부를 만큼 전세계 해양을 제패하던 선진강국이었다. 그 때 인조와 효종이 벨테브레와 하멜의 석방과 귀국을 둘러싸고 양국간 당국자 회담을 열었다면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의 개국이나 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역대 이래로 어떤 나라이든 접촉이 이루어지고나면 원하든 원치않든 무역이 일어나고 문물이 교류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와 효종은 이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작가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작가

네덜란드인의 표착과 우둔한 해금정책

네덜란드인들은 원래 인도의 상선 등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동양의 바닷길에 그리 낯설지 않았고 항해 경험도 풍부했다. 1620년대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 총독은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원정 대장 레이얼슨에게 중국 해안을 따라가면서 한반도까지 가보라는 명령까지 시달한 바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장거리 해운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원정대의 항로가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벨테브레는 1627년, 인조 5년에 동료 두 명과 함께 제주에 표착했다. 네덜란드 이름으로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라는 이름의 이 사나이는 1627년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 그와 함께 온 이는 드리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터스 베르바스트로, 이들 셋이 식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가운데 벨테브레를 제외한 둘은 정묘호란에 참여했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남은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 배속돼 홍이포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멀리 쏘아보낼 수 있는 첨단 무기를 개발한다. 그리고 조선의 무관이 되어 구인환 대감 밑에서 조선 여인과 만나 결혼까지 하고 아들 딸을 낳았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의 임금들이었다. 벨테브레가 계속 해서 귀국을 원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효종은 아예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 보든지...“라며 그를 절대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 이후 뒤를 이은 효종까지 두 임금들이 문제가 된 것은 26년 뒤 하멜의 표류 때도 똑같이 해금정책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조선 군주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국익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명 태조 주원장이 오리 밖으로 널빤지조차도 띄우지 못하도록 쇄국정책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해금(海禁)정책이란 어부든 관료든 누구라도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막고 들어오는 자들도 엄격하게 관리해 외국인의 경우는 모두 북경으로 호송함으로써 스스로 주체성과 외교권을 포기한 제도다. 먼 바다를 나가면 법령을 어긴 범법자가 되었으니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바다를 포기하여 해양국가로서의 광대한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 것이다. 

사실 조선을 제외하곤 일본과 대만, 중국의 항구들은 이미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같은 해양 강국들과 실질적인 교류 상태에 있었기에 한반도 남부 해안은 서구 열강의 중요한 무역로가 되고 있었다. 조선은 자신의 안방을 다른 나라에 다 내주고도 명나라에만 의지하는 해금정책으로 후퇴를 자초하고 있었다. 

하멜은 1653년 6월 14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인도네시아 자바를 출발하여 7월 16일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으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태풍에 표류했다. 그해 8월 15일 새벽 1시경 제주도 남쪽에 난파해 왔는데 선원 64명 가운데 26명이나 익사해 생존자는 36명이었고 그 속에 하멜도 끼어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대정 현감이 문답조사를 진행했으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자 서울에 통역사를 요청했고 두달 뒤 고급 무관복장의 노 관리가 내려왔다. 이 사람이 바로 벨테브레 즉, 박연이었다. 그는 하멜 일행을 심문하고서는 같은 동포임을 확인하자 반가워하였으나 하멜 일행이 본국 송환을 요구하자 오히려 귀화를 종용했다.

하멜은 이를 기이히 여겼으나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을 익히 알고 있던 벨테브레는 이들을 곱게 타일러 훈련도감 소속 군인으로 이들을 배속케 하고 삶을 돌봐주었다.
무려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귀국을 포기하고 있던 하멜은 어느 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일행과 몇과 함께 배 한 척을 구해,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 모험적인 탈출이 성공하여 일 년간 일본에서 조사를 받은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때가 1667년 12월 28일의 일이었다. 64명의 선원 가운데 단 8명만이 귀국하자 네덜란드는 이 놀라운 귀환에 온 국가가 떠들썩했다. 근 14년만의 귀환이었다. 

하멜전시관, 사진 출처=한국관광공사
하멜전시관, 사진 출처=한국관광공사

조선이 세계에 알려지다

이 모든 일은 하멜이 밀린 봉급을 정산하고자 조선 표류기를 기록하면서 밝혀진 것으로, 이 기록은 책으로 꾸며져 당시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이 처음 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조선의 임금들이 표류한 이들을 환대해 돌려주고 그 보답으로 네덜란드와 무역을 행할 수 있었다면 조선 반도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실 이미 대만과 일본 나가사키에 동인도회사 지부를 둔 네덜란드였기에 한반도 앞바다를 지나가는 그들로서는 조선과 교류를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조선 역시 명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이 때 이미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 상관을 설치하고 서구의 문물을 다 받아들이면서 지킬 것은 지키는 실리외교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과 일본은 이미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결과 정조 때는 과거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던 조선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해 되돌아오는 진풍경도 벌어졌던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가 정화의 아프리카 탐험 이후 해금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사대주의로 이를 따라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특히 절호의 기회였던 네덜란드인의 표류 사건을 소홀히 처리함으로써 개화의 절대 기회를 포기하게 되었고 구한말 결국 일본에 합병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효종은 청나라를 치려고 북벌을 준비하면서도 청나라에 의존하고 바다를 열지 못했으며 구습과 타성에 젖어 있었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면서도 전국적으로 무기를 준비하고 전쟁을 치를 채비를 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세계를 넓게 보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며 조정의 열린 자세를 촉구했다. 

모든 국제간 교류는 인적 물적 자원의 교류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중심에 명나라나 청나라가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일본이 해상 무역을 독점하는 바람에 우리는 늘 명, 청이나 일본을 거쳐야 하는 이중 삼중의 국제 간접 무역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이 같은 폐쇄적 국제정책으로 인해 근대화의 도도한 물결을 타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약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버려야 할 것을 제대로 버리지 못한 것도, 국력이 약해 눈치만 봐야 했던 것도 모두 우리 역사의 아픔이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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