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기획자 정도전, 조선을 설계하다. 

또 선거철인가 보다. 금방 약속하고 새로 파트너를 바꾸며 공약을 열심히 내세우니 말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이들을 보며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공약이란 자신이 권력을 쥐게 되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노라고 공표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의 청사진이요 설계도다. 그래서 민중은 공약을 보고 지도자를 뽑는다. 

 

정도전은 조선의 궁궐 배치와 사대문 주요 거리 전체를 설계한 기획자였다.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작가
정도전은 조선의 궁궐 배치와 사대문 주요 거리 전체를 설계한 기획자였다.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작가

여말선초에는 선거라는 것이 없었지만 그런 공약을 가진 이들 밑에 엘리트들이 줄을 섰다. 게중에는 보스가 어떤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른바 참모요 책사다. 동 시대에 가장 뛰어난 책사들 가운데 단연 정도전이 눈에 띈다. 정몽주와 가장 가까운 사이에다 동문수학한 후배였던 정도전은 신지식인 정몽주와 한 배를 타려다 이성계로 말을 갈아탔다. 그는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들이 포효하던 혼란기

고려말 최고의 학자였던 가정 이곡 선생의 수하에 여러 용들이 나타났다. 아들 목은 이색(1328년생), 이들과 교류하던 포은 정몽주(1337년생), 그리고 후생실학의 설계자로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고 목면을 들여와 보급함으로써 백성을 살폈던 문익점(1329년생), 직접 문하에서 배웠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곡을 스승으로 삼았던 야심가 삼봉 정도전(1342년생)이 그들이다. 
그리고 신진세력 무인 출신 이성계(1335년생)도 있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로부터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때 나이가 만 55세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보다 두 살 많았고 이방원은 서른 살 밑, 이들 부자의 두뇌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은 다섯 살 아래였다. 정몽주의 암살을 이방원이 주도한 것은 분명하지만 뒤편에서 이를 조종한 기획자는 정도전이었다. 실제 고려말의 상황을 보면 이 정치적 쟁패는 정몽주와 이성계가 아니라 정몽주와 정도전간의 싸움이었다.

이 둘은 목은 이색을 정점으로 하여 성리학을 공부했고 현실정치의 개혁을 서로 토론할 정도로 막역했으며 정몽주의 학문적 성가를 정도전이 이어받아 완성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다만 정몽주는 온건한 개혁론자, 정도전은 다소 급진적인 개혁론자라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쓰러져 가는 원나라를 붙잡고 가려는 이인임 등을 비롯한 고려왕조의 수구 친원파들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가져 이를 개혁하기 위한 상소문까지 올렸고 둘 다 귀양을 가는 고통도 겪었다. 부패한 고려 조정을 개혁하고 고려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개선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득권층을 몰아내는 데 있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고려 백성들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으로 생명과 재산을 약탈당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승려와 사찰, 권문세족의 횡포로 세금과 수탈의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이성계로 말을 갈아타다

이들은 당시 함경도 변방에서부터 올라와 왜구와 여진족을 격퇴하고 일약 영웅이 된 신진세력의 수장 이성계를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결국 정몽주는 여진과의 전투에서부터 참여하여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고 정도전은 오랜 유배 후에 직접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책사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것까지도 이들은 함께한다.

정몽주는 짧은 유배 후에 이성계와 함께 조선 전역에 출몰하는 외적을 무찌르고 나서부터 성리학의 원조 학자이자 신진 정치가로 조정과 백성들의 신망을 한데 모았다. 정치적 식견과 외교적 협상력도 탁월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친원파들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친원파들은 명태조 생일 사신으로 정몽주를 추천했다. 당시 명나라 수도인 남경까지 90일 이상 걸리는 길인데 황제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으니 죽으라고 내보낸 셈이었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 축하문을 명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된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를 경계하던 친원파는 다시 1377년에는 사이가 불편한 왜국에 정몽주를 사신으로 내보낸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협상력으로 수백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와 일약 최고의 실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삼봉 정도전의 고택(경상북도 영주), 원래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삼봉 정도전의 고택(경상북도 영주), 원래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반해 정도전은 10년에 가까운 낭인 세월을 보내며 고려말 서민들 삶을 가장 가깝게 접해 볼 수 있었다. 잊혀진 천재였던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두고서는 백성들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불교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정도전은 <불씨잡변>이라는 불교유해론을 제기한 책까지 집필해 고려왕조의 정신적 기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는 백성들의 고려 왕조에 대한 그나마 남은 신뢰를 깨뜨려 역성혁명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를 제공하는 한편,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를 정리하여 조선 개국의 근거로 삼도록 했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정치적 목표는 완전히 달라졌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의 개혁을, 정도전은 역성혁명의 개혁을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실패를 전제로 한 일시적 승리

정몽주는 조정 안에서도 신진 사대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힘입고 있어 겉보기에는 이성계에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몽주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고려의 무장들과 이성계 휘하의 무장들에게도 밉보인 상태였다. 공양왕은 군부의 권한을 약화시키려고 군인들에게 호패 착용을 지시하고 면제해 왔던 3년 상(喪)도 반드시 지키도록 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게 사대부가 지킬 의무를 적용토록 하니 거센 반발이 나왔다. 무인들은 공양왕의 이 조치가 정몽주에게서 나온 기획이라고 낙인찍어 그를 미워했다.

이에 반해 정도전의 지지세력은 이성계의 2천 명이 넘는 사병들과 신진 개혁세력이었다. 이지란 장군 같은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장도 정도전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신진세력들은 정몽주식 온건한 개혁이 아니라 혁명적 개혁을 요구하며 정도전을 지지하고 있었다.

중과부적, 그럼에도 정몽주는 상황을 오판하고 구 고려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도전을 내치고 이성계의 세력을 축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몽주는 반대파의 제거를 시도했다.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 이성계의 개혁주도 세력이자 두뇌집단을 탄핵하게 했다. 이 조치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감금하고, 조준과 남은 및 윤소종 등을 귀양보내 이성계의 양팔을 잘라냈다. 이 때 의외의 복병인 이방원이 나서서 이성계 병문안을 핑계로 상대 처지를 살피러 왔던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암살하는 바람에 정몽주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양천도,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의 두뇌를 엿볼 수 있다.
한양천도,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의 두뇌를 엿볼 수 있다.

잠시 권력을 잡게 된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했고 한양 천도와 사대문의 이름부터 거리까지, 조선 정치경제의 기초를 세워두었다. 단 7년만에 이 모든 것을 이뤄낸 천재적 설계자였다. 

<조선경국전>을 통해 그는 조선의 미래를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앞서 가는 그의 발상이 놀랍다.  그러나 여섯 해 후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하의 권리를 키우고 싶어 한 정도전을 못마땅히 여겨 그를 무참히 암살했다. 

명성과 오욕의 500년 세월

정몽주는 암살되자마자 4년 만에 이방원에 의해 곧바로 복권되어 망국 고려의 충신임에도 조선 왕조 500년간 사대부의 표상이자 충신이며 대학자로 칭송받았다. 정도전은 조선 왕조 500년간 철저히 무시되었다가 고종 임금 때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경복궁의 설계 기획자였던 그의 불명예를 되찾게 해 주었지만 너무 늦은 복권이었다.

두 사람은 성리학자이자 개혁가로, 이성계와 한 때 손을 잡아 고려 왕조를 개혁해 보려던 꿈을 꾸었다는 점에서, 또 정적에게 암살당하는 바람에 함께 꿈꾸었던 신세계를 두 눈으로 보지 못하였단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한 가지 더, 이 두 사람은 신진사대부로 또 성리학자로 <맹자>를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다. <맹자>는 민심이 천심임을 역설하고 군주는 도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데 패덕한 군주라면 오히려 백성이 그를 내칠 수도 있다고 주장한 책 아니던가. 그런데 이 책 <맹자>를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주며 숙독을 권했다고 하니 온건한 성격의 정몽주가 왕조를 차마 배신할 수 없어 급진적인 정도전에게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못하지만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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