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가 유길준, 조선말 격랑의 파고에 뛰어들다

유길준
유길준

구한말 가장 불운했고 가장 탁월했던 인물로 단연 유길준을 꼽지 않을 수 없다. 
1881년 봄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에 건너가 유학생활을 시작한 근대 유학생 1호 유길준, 그는 일본서 유학을 시작하고 2년 뒤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세운 보빙사의 수행원 자격으로 선발되어 미국을 돌아보았다. 여러 구미제국을 여행하고 선진 문물을 경험한 그가 남긴 대작이 <서유견문>이다.

이 대작을 쓰고 조선 개화의 물꼬를 텄던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일본으로 망명했고 이국땅 외딴 섬에 강제 유배되어 12년을 지내다 쓸쓸히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유길준을 그토록 아끼다가 일시에 버려버린 고종의 변심으로부터 대한제국의 과도기와 불행까지 자세히 살펴보자. 

일본 유학생 1호

유길준은 19세기말의 조선과 대한제국 말기에 조선인 최초의 서양 견문록을 집필했고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온건적인 개화를 목소리 높여 주장하던 신지식인 1호였다. 그는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조선 최초의 유학생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고종은 1880년대 초반 개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가 우습게 여기던 일본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종은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내기로 했는데 척화파들의 반대가 심해 암행어사를 보내는 척 위장하고 부산으로 이들을 보낸 다음 일본에 파견했다.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 주요 일본 도시를 돌아본 이들은 그곳에서 앞선 문물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를 둘러보고 4개월 만에 귀국했는데 유길준을 남겨 명문대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게이오의숙에서 어학을 전공케 했다. 유길준은 이 시기에 개화 일본의 모든 것을 익히고 마음에 담았다.

유길준의 여행로,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작가
유길준의 여행로,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작가

미국 유학생 1호

1882년이 되자 고종은 조선 미국의 조미 조약 체결과 함께 유길준을 불러들인다. 외교 전문가가 필요했던 탓이다. 고종은 1883년 유길준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파견한다. 단장은 실세 민병익으로, 홍영식 유길준 등과 내국인과 미국인 일본인 등 11명 규모였다. 미국 문물을 둘러보고 미국과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민영익 단장은 임무를 끝내고 나서 영특한 유길준을 미국에 남겨 유학을 하도록 돕는다. 이에 유길준은 상투를 잘라내고 군대 지식인으로 스스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모스 박사를 스승으로 한 유길준은 미국 동부 세일럼에서 가까운 거버너스 아카데미에서 조선 개화를 꿈꾸며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석달 만에 영어 화화가 가능할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 

일찍이 개화파의 거두 박규수와 교류하며 서양 문물을 동경했던 유길준은 출세를 위한 필수 코스였던 과거를 포기하고 개화 전도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2년만에 유학을 포기하게 된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의 득세가 삼일천하로 끝나자 고종이 그의 귀국을 종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길준은 조선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이집트 수에즈 운하 등을 거쳐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들러 구미와 동양의 선진 문물을 살폈다. 3개월 여의 여정이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록
유길준의 서유견문록

서유견문록의 탄생 

귀국길에 망명한 대역죄인 김옥균을 만난 죄로 유길준은 돌아오자마자 체포돼 구금당하는데 고종의 묵인 아래 포도대장 한규설의 별장에 유폐되었다. 그는 여기서 출입을 통제당하는 동안 20편 530쪽에 달하는 대작 <서유견문>의 집필에 착수, 세계사의 흐름과 자본주의 법치주의 개인주의 및 구미의 선진 문물과 풍습 등을 담아 1889년 탈고한다. 

1892년 해금된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 정권 하에서 내무장관 격인 내부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학 때 배운 지식을 국내 개화에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출국한 후 현지 출판사에서 자비로 <서유견문> 1,000권을 출판, 국내 관료들에게 선물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불운의 지식인, 계몽 사업에 전력하다

그러나 유길준의 개화 공작은 커다란 장애를 만나게 된다. 바로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친일정권을 멀리 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은 고종은 그토록 아끼던 유길준을 김홍집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과 엮어 5적으로 선포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김홍집 등이 죽음에 몰린 와중에 유길준은 일본으로 탈출하여 친러 정권을 몰아내고자 도모하다가 이 또한 발각된다.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는 도쿄에서 270km 떨어진 하치 죠지마라는 일본의 정치범 단골 유배섬으로 그를 유배 보내버렸다. 12년 간의 유배생활 중에 조선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화를 꿈꾸던 그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길준은 이후 일본에 머물면서 그동안 일본에 동경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고자 일본의 지인들을 동원하고 백방으로 뛰며 여론을 형성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에게 정미 7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일본 신문에도 특별기고를 하며 대한제국의 망국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 소식을 들은 순종은 귀국한 그에게 고위직을 제안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정치에 전혀 나서지 않았다. 

이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고  교육사업을 통해 계몽 사업에 주력했으며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해 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그는 일본에서 주는 남작지위를 끝내 받지 않은 채 칩거하다가 1914년 세상을 떠났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이던 시절 자신의 유학 경험과 선진 지식을 통해 조국을 개화시키려던 유길준의 노력은 사라지고 말았으나 그의 정신은 오래도록 귀감이 되고 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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