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꽉 막힌 조선 공직사회에 물음표를 던지다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다양해서 옳고 그름을 쉬 분간하기 어렵다.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많은 사람과 교류해야 소통과 관용의 대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퇴계를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의 왕과 신료들은 조선 최고의 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온 퇴계 이황을 끊임없이 조정으로 불러내려 했다. 그들은 퇴계로부터 꽉 막힌 조선의 경색된 정치를 해소할 비책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조정에서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을 때 무려 79번이나 사퇴하는 물러남의 극한을 선보였다. 퇴계는 상대의 동의를 얻기 위한 설득력이나 달변의 정치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을 내보이길 원했다. 그는 꽉 막힌 조선의 공식 사회에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노송정 퇴계
노송정 퇴계

퇴계, 임금에게 벼슬하는 자의 의義를 말하다

퇴계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으나 필자는 ‘비워둠’ ‘내려놓음’이라는 덕목을 극한의 절제 속에 선보이며 세상과 대화하려 한 진정한 리더였다고 판단한다. 

안동땅 예안현의 향리에 돌아가 있던 퇴계를 재위 1558년 6월 9일 명종 임금이 다시 간절히 불러올렸다. 퇴계의 나이 이미 예순에 가까웠고 병이 들어 거동이 그리 자유롭지 못한 노학자였다. 그러나 퇴계는 칭병과 함께 자격의 부족함을 거론하며 다시 상소를 올렸는데 이 때 임금을 섬기는 다섯 가지 의리를 언급했다.

“무엇이 의리냐 하면 일의 합당한 것이 의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을 감추고 벼슬자리를 차지는 것이 합당합니까? 병으로 일을 보지 못하면서 녹을 타먹는 것이 합당합니까? 터무니없는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을 합당하다 하겠습니까? 그른 줄 알면서도 덮어놓고 나아가는 것을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직책을 다 하지 못하면서 물러나지도 않는 것을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이 5 가지 합당치 못한 것(오불의, 五不宜)을 가지고 벼슬하고 있다면 신하된 도리가 어떻겠습니까? 신이 감히 벼슬에 나아가지 않음은 단지 의義란 글자를 위해 가려는 것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임금의 명을 지체함은 의리에 합당치 않다’고 저를 공격합니다.”

요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공직자가 얼마나 될까? 
상당히 거친 어조이며 직접적인 표현이다. 여유 은둔 자조의 퇴계와는 사뭇 다른 표현방식이다. 그만큼 퇴계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이 상소에서 퇴계는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주군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주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며, 벼슬아치로 나아가려는 사람의 도리는 이러해야 한다고 정의를 내리며 자신을 변호했다.

퇴계의 주장은 이러했다. ‘사람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재능에 합당한 것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작은 재능을 큰 재능으로 여기고 단점을 장점으로 여겨 잘못 시키고 억지로 책임 지우는가 하면 비록 그 사람이 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물러나려 해도 들어주지 않을뿐더러 뒤따라 더 무거운 소임을 맡깁니다.’

도산 서원
도산 서원

인사권자의 책임을 묻다

한마디로 인사권자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 나아가 최종 결정권자인 임금도 조선 관료사회의 부패와 쇠퇴에 책임이 있음을 간적접으로 지적하고 있는 모습이다.

15세기와 16세기는 조선에서 사화의 시대였다. 연산군 등극 이후 시작된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를 필두로 중종 때 조광조 등 신진 사람의 숙청을 위한 기묘사화는 조선 사회의 질서를 크게 흩뜨리고 말았다. 

외척과 문정왕후의 독단이 불러온 독재와 권력의 일방적인 독주는 관료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려 나라의 기강을 망쳐 놓고 반정으로 이어진 조정은 도덕과 염치의 실종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절 퇴계 역시 큰 피해자였다.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형을 잃었고 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좋아 형의 죽음을 맞아 몹시 상심하며 슬퍼했다.

이런 경험이 퇴계로 하여금 조선의 지도층을 바꾸지 않으면 혁신은 어렵다고 보게 만들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혁신없이 조선 사회가 건강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는데 생각이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직업관료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는 자들, 즉 조선 사대부 층들에게 진정한 선비와 관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파하고 싶었고, 자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대부들에게 자신이 벼슬에서 물러나고 나아가지 않는 연유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진정한 의미를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물러남을 실천, 공직 사회를 교화시키다

퇴계는 조정에서 140여 직종에 계속 해서 임명되었으나 이 가운데 79번을 사퇴하였다. 사퇴한 것만으로 따지자면 그는 조선 관료들 중 단연 톱이었다. 이 가운데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마지못해 자리를 맡았다. 

자연히 사퇴하는 그를 만류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높은 자리가 주어지게 되었고 퇴계는 그 자리를 또 마다하여 사퇴하는 일이 계속 되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벼슬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퇴계는 속이 터졌지만 그들과 직접 상대하지 않고 몸소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절제하며 실천하는 모습으로 소통하기를 원했다. 

그 실천적 방법이 벼슬에서 물러남이었다. 임금을 봐서는 올라가야 하지만 썩어빠진 관료 사회를 붙잡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후학들을 제대로 학문을 가르쳐 점진적으로 혁신을 이루어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점에서는 현실정치에 몰입한 율곡의 삶과 크게 배치된다. 율곡은 죽기 1년 전까지도 질병에 걸린 몸으로 병조판서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퇴계가 마냥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왕이 세 번쯤 부르면 한 번은 응하여 왕의 기대를 어느 정도 채워주고 다시 물러나는 일을 반복했다. 

어느 것이 옳았을까?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학자들 간의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그럼에도 퇴계 이황이 혁신과 개혁을 원하지 않은 은둔 생활만 했다고 보거나 소극적 보신주의자로 평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만큼 퇴계는 관료이면서 학자로 후학들을 키워냈고, 스스로는 몸으로 직접 세상과 부딪쳐 반성하고 절제하는 최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고상함과 인격으로 나타났고 관직에서 실천하는 힘은 위민 정신으로 나타나 백성들이 그를 우러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 사회가 그의 삶을 본받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47세 되던 해 퇴계는 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있다가 48세 되던 해 단양 군수로 제수되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 때 당시 단양은 단양천과 남한강으로 수량이 풍부한 곳이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전 3년을 연속해서 가뭄이 심하게 겹쳐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탄에 빠져 있었다. 

복도소는 단양의 홍수와 가뭄을 막은 저수지다. 단양천 상류에 있는 복도소 근처 바위에 복도별업(아릅답고 깨끗한 자연의 산과 물을 찾아 도를 회복한다는 뜻)이라는 글자를 해서체로 암각한 것이다. 이황의 친필로 전해진다.
복도소는 단양의 홍수와 가뭄을 막은 저수지다. 단양천 상류에 있는 복도소 근처 바위에 복도별업(아릅답고 깨끗한 자연의 산과 물을 찾아 도를 회복한다는 뜻)이라는 글자를 해서체로 암각한 것이다. 이황의 친필로 전해진다.

퇴계는 부임하자마자 도대체 단양 같은 물이 많은 곳이 왜 가물어 농사조차 짓기 어려운 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단양에 여름철 홍수 때 풍부한 수량을 가둬두는 저수지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설치하는 일부터 시작토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탁오대 옆 여울목에 저수지를 설치키로 하고 인원을 동원하여 복도소復道沼라는 저수지를 만들게 했다.

그 후부터는 단양 지방에 홍수나 가뭄이 오지 않아 고을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는데 침이 마를 정도였다고 전한다. 단 9개월의 임직 기간동안 그가 얼마나 위민정신으로 일했던지 퇴계가 10월에 풍기군소로 이임하게 되자 온 고을 백성들이 뛰어나와 임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을 정도였다.

그는 다시 풍기 군수로 나아가서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소수 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만들었다. 사액이란 이금이 서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현판을 달도록 한 것을 말한다. 이 서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이렇게 지방 관료로 최선을 다한 그는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던지 군수직을 그만 둘 때는 책 꾸러미 몇 개만 갖고 돌아갔다고 전할 정도로 아무런 금전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사랑과 존망을 한 몸에 받았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하였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그후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문정왕후에게 임금에게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올려 문정왕후를 놀라게 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충언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함부로 비난하기 어려웠던 것은 퇴계가 물러섬과 나아감에 있어서만은 원칙과 절도를 지켜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모두의 우러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명종 사후 선조에게 정치의 기본 원리와 당면 과제인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의 진수를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다. 이 두 가지는 퇴계의 사상과 정치철학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진수다.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할 만큼 그를 신뢰하였다. 그는 임금에게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겸허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직 후에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아도 보통 때는 별다르게 내세우는 바가 없어 백성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살았다. 

다산 정약용은 후일 그의 가르침에 대해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고 극찬했을 만큼 정도를 지킨 위대한 리더였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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