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 전도사 김육, 정치를 던지고 민생을 위한 진짜 공복이 되다

말로만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지도자가 즐비한 세태에 진정한 공직의 표상을 찾으라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 속에서는 진정한 공복의 표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우리 역사 상에서 서민의 삶을 위해 한 평생 일한 진정한 공직자 한 명을 꼽으라면 잠곡 김육(1580~1658)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정치적으로 북벌을 외치고 반청숭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절, 정치를 버리고 서민을 위해 올인했다. 김육의 삶과 업적은 21세기 공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

서민을 대변한 김육의 삶

김육 초상
김육 초상

김육은 공직자로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민처럼 살면서 그들의 애환을 대변하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는 대동법 확산과 정착에 올인했고 공직자로서 현장에 나가 발품을 팔며 뛰어 이원익의 뒤를 이어 대동법의 실현을 이루어 냈다. 김육은 진정한 실학자이자 공직자의 삶을 올곧게 살았다. 민생을 외면하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던 정치인들과 달리 그런 부류들을 설득하고 타협하되, 결코 섞이지는 아니하며 30년간 서민들을 위한 정책 실현에 온 몸을 바쳤다. 경제전문가로서 경제정책의 개선안을 직접 실천으로 옮긴 인물이었다.

숯을 팔며 삶의 고통을 체험하다

김육은 첫 공직에서 실세들에게 밉보여 쫓겨났고 가평땅에서 숯을 구워 팔아가며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원래 김육의 집안은 기묘 8현이라고 불리며 칭송받던 김식金湜의 고손이었는데 고조부 김식은 조광조 등과 정치개혁에 나섰다가 기묘사화 때 자결하여 충의를 드러낸 인물이었다. 정3품 대사성까지 오른 대학자가 사화에 휩쓸려 자결하자 김육의 선조들은 큰 충격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났다. 

모친 한양 조 씨는 기묘사화의 가장 큰 피해자 조광조의 증손녀였다. 김육으로 보자면 친 외가쪽 선조가 모두 사회에 휩쓸려 처참한 죽음을 당했기에 인생길이 가시밭길이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인조반정 이후 추천제를 통해 관료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 시작한 일은 서민의 삶을 위한 위민정책의 실현이었다.

경제통 김육의 위민 정책

송하한유도, 명나라 화가 호병이 그려준 그림 속에 김육의 얼굴이 들어 있다.
송하한유도, 명나라 화가 호병이 그려준 그림 속에 김육의 얼굴이 들어 있다.

대동법 전도사 김육은 당시 정치권에선 북벌론 일색으로 반청운동이 붐이었던 시절, 서민이 고통받고 굶어죽어 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했다. 온 정치권이 이렇게 북벌론 반청론을 내세울 때 김육 홀로 안민익국론으로 대동법을 외쳤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 가는 발상이었다. 

조선 조정은 당시 세금을 각 지방 특산물로 바치게 하여 과세가 불공정하고 수송과 저장이 어려우니 서민에게 너무도 불편한 제도였다. 대동법은 이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세금을 쌀이나 베로 내게 한 제도였다. 관리들의 부패와 해악으로 농민부담은 날로 늘어나 김육은 이를 중지시키고 농민들에게 쌀 두말 베 한 필로 정해진 세금만 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자고 임금을 몇 번이고 설득했다. 재정도 늘어나고 백성은 부담이 줄어드는 방법이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는 1638년에 충청지역에 먼저 대동법 실시를 주장했고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조와 효종 양대에 걸쳐 계속 해서 실현을 주장해 결국 충청도 전라도에 먼저 선보였고 그의 사후에 드디어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이 대동법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물류로 앞서 간 김육의 업적

청나라를 다녀온 김육은 선진 물류를 보고 개혁에 눈을 떴다. 청나라는 수레와 운하를 통해 엄청난 물동량을 소화해 내면서 활발한 산업 중흥을 이뤄내고 있었다.
이에 청나라를 돌아보고 온 그가 조선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조세미를 실은 운송선이 자주 침몰하던 태안반도 지역의 운하 뚫기였다. 이 지역은 태조~세조까지 조운선 200척, 쌀1만8천섬, 1200명이 수장된, 물길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77번 국도 위 작은 강처럼 보이는 것이 김육이 파낸 운하다. 실제로 현장에 가 보면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된다.
77번 국도 위 작은 강처럼 보이는 것이 김육이 파낸 운하다. 실제로 현장에 가 보면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된다.

김육은 이곳 안면읍 창기리와 태안군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강제로 뚫어가는 우회로 운하 굴착사업을 맨 손으로 이루어냈다. 굴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이너마이트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정말 맨 손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얼마나 고생스러웠던지 동원된 백성들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서 스스로 앞장 서서 이 일을 헤치고 나가니 백성들이 감동하며 함께 나섰고 결국엔 운하를 개통하기에 이르렀다. 바닷길 2백리를 단축한 이 공사로 숱한 생명과 재물을 지켜냈다.  

바닷길 2백리 맨손으로 뚫어

그는 또 수레의 운용을 제안했다. 당시까지 조선에선 수레를 사용한 물류가 대중화되지 않고 있었는데 이를 개선코자 한 것이다. 게다가 중국 동전 15만 문을 도입, 화폐의 기능을 확산시킨 것도 그의 공로였다. 그는 수차의 활용도 제시했는데 이것은 새 동력원의 개발로서, 소 말에서 기계 동력원으로의 혁신을 시도한 놀라운 제안이었다.

수레도 없이 등짐만 지고 다니던 시절에 물류를 도입한 발상이 감탄할 만하다. 다만 백성의 어버이라던 임금이라는 자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극 나서지 않아 일반에 확산되기가 어려웠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밖에도 그는 농사기술의 개선, 시헌력 사용을 통한 역법의 선진화를 주장했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辟瘟方> <유원총보> <해동명신록> <잠곡유고> 등을 남겨 기록자로서의 사명도 잘 수행했다.  
김육은 공직자로서 모범적인 공무원의 생애를 살았으며 오로지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온몸과 마음을 마친 진정한 충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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