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를 보면 조선말의 정치인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치란 것이 국민들을 시원하게 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하는 법인데 오히려 답답하게 만들고 숨도 못쉬게 한다.

 

열하 피서산장을 방문한 조선의 진사사신단,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열하 피서산장을 방문한 조선의 진사사신단,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18세기 말에도 그랬다. 
정조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정조 4년 5월 25일에 길을 떠나 10월27일까지 5개월에 걸쳐 청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단에 합류해 중국땅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그 시절 연암은 열하로 피서를 떠난 청나라 고종 황제를 좇아 4,000리 고난의 연행길에서 보고 들은 경험을 다큐멘터리 대기록 <열하일기>에 남겼다. 이 훌륭한 기록은 지금도 그 당시 사절단의 모습과 중국의 풍물, 무역, 살림살이까지를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이 정조의 눈에 제대로 들지 못했지만 조선의 개화를 외친 그의 철학은 결국 손자 박규수를 이어 조선 개화를 유도하는 촉매가 되었다.

황제의 칠순을 축하하러 떠난 사신단
열하(熱河)는 북경에서 약 250km 떨어진 내몽골 지역에 있는, 지금의 허베이성 청더(承德) 지역으로 청나라 황제들이 사냥을 즐기며 쉬던 곳이었다. 열하는 온천이 나와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곳. 청 황제들은 이민족을 경계하고 세를 과시하고자 여름이면 이곳에 나와 위세를 떨곤 했다.

17, 18세기 청나라행 조선 사신단은 정사와 부사, 개인수행원, 역관(통역), 의원, 화원(그림 기록을 남기는 화공) 마부 짐꾼 등을 합쳐 300~4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여행단이었다. 노숙은 기본이고 홍수에 한발, 도적떼의 습격을 겪기도 하고, 호랑이에게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여행이었으나 단 한 사람, 연암은 소풍 나온 여행객처럼 자유로웠다.

그는 한양-의주-압록강-요양-봉천-고령역-산해관-연경-고북구-열하를 거쳐 다시 연경을 구경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고도 먼 여정을 끝내고 그 유명한 열하일기를 저서로 남겼다. 이 책은 5천 년 역사에서 최고의 문장가로 소문난 연암의 기행글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당대 최고 선진도시 연경과 청나라 일원을 둘러보고 온 최신 정보서라는 점에서 출간 전부터 이미 사본이 나돌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책에 매료됐으며, 연암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에 열광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시대의 불운아 연암 박지원
연암은 인정받지 못하는 불운의 천재였고, 우리에 갇힌 한 마리 호랑이였다. 그래서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 세상을 방황하는 조선의 노마드(유목민)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리스마와 큰 체구, 광대뼈는 크고 얼굴은 붉었으며, 글솜씨는 파격적인 데다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천재적인 해학과 의기가 번득였지만 조정에선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34세 때 초시 복시를 다 일등으로 합격했으나 급제에 뜻을 두지 않아 벼슬을 포기했다. 조선 지도부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영조의 부마이자 팔촌형이던 박명원이 사신단에 끼워넣는 바람에 새 세상에 눈뜨게 되었다. 

그는 황제를 만나고서는 청의 위세를 깨달았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100년 태평성세 때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560만 평방미터, 성벽 길이만 10km에 달하며 황제가 정사를 보고 사냥과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부가 있는 곳이었다. 연암은 드넓은 중원을 거치면서는 조선의 국경과 역사의식을 깨우쳤고 연경에선 선진문물과 서양 학문을 접하고 조선의 편협함과 명분주의를 한탄했다.

특히 열하에서 만난 청 건륭제는 오랑캐의 왕이라는 조선 지식층의 비판과는 달리 티베트와 몽골을 두루 껴안고 중국 최대의 영토를 호령하는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사신단은 이방민족 티베트 법왕앞에서 거만을 떠는 무례함을 보였다. 
“촌티를 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열하가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넓게 보려면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해야 한다.” 연암이 속이 터져서 열하일기에 써 놓은 문장이다.

그는 퉁저우(通州) 운하를 살펴보고, 선박에서 내려진 화물들이 수레를 통해 물류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고 감탄했으며, 큰 도로와 막대한 물동량, 10만 척이 넘어 보이는 수많은 화물선들을 보며 조선의 후진성을 개탄했다. 특히 남당(천주교회당)과 관상대를 방문하고는 서양과학 기술의 정밀함을 자세한 글로 묘사하기도 했다. 
중국은 앞서 가는데 조선은 수구적 태도와 경색된 사상으로 점점 뒤처지고 있음을 연암은 한탄하며 “습속이 편협하기 그지없다”는 말로 비판했다. 

시대의 관찰자였으나 정조의 눈에 들지 못하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발표 직후 수구세력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으나 후대의 실학파들을 길러내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최신 정보는 조선 조정의 주요 정책 수립에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열하일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는 것을 본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여 박지원의 문체를 바로잡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따끔하게 지적했고 결국 박지원은 마지못해 속죄의 편지를 보내고 이를 속상해 했다. 

박지원은 후일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경륜을 베풀어 각종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했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어 건축 기술도 국내에 보급했다. 후에도 벽돌로 총계서숙을 지었고 면천군수에 제수되자 농서인 <과농소초>도 지어 올렸다. 그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안,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으니 사대부 지도층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렸을 것은 분명했다. 

관료주의를 경계하다
잭 웰치(Jack Welch)는 관료주의를 가장 싫어했고 소위 지휘부라고 할 수 있는 경영진의 목소리보다 현장의 소리를 더 즐겨 들은 경영자였다. 
“관료주의는 적이고 지독한 낭비다. 느린 의사결정과 불필요한 결제 절차, 경쟁정신을 죽이는 모든 행위도 내겐 다 적이다.” 
그는 오로지 변화를 추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팀 미팅에서 같은 답이 나오지 않도록 다채로운 질문으로 기발한 답변을 유도했으며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가치관을 ‘변화’에 맞추었고 6시그마 운동을 통해 혁신을 추구했다. 이 기법으로 제조업들은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걷기 시작했다.  

만약 연암을 중용해 그의 정책을 받아들였다면 19세기 조선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그의 정신은 고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은퇴한 후 사랑방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김홍집 등 당대 최고의 개화파를 배출해 낸 연암의 손자 박규수로 이어져 조선 개화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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