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화타 허준,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그만큼 코로나 바이러스를 물리칠 신의(神醫)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낳은 명의 허준과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사실 서양의학이 독주해 온 상황 아래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가 드라마 <허준>이 1999년부터 이듬해까지 크게 히트하면서 일반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우리 역사를 통해 <동의보감>의 진정한 가치와 허준의 영향력이 어땠는지를 다시 살펴볼 일이다.

당시 전염병이 들끓던 나라 조선의 의료기관 혜민서,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당시 전염병이 들끓던 나라 조선의 의료기관 혜민서,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조선은 전염병이 들끓던 나라였다

사실 <동의보감>은 1991년 9월 30일에 이르러서야 보물 1085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홀대받았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는데 뒤늦게나마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반갑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 세계기록문화 유산에 등재된 것이 7번째인데 나머지는 모두 수십 수백 명의 힘으로 이루어진 협동의 산물인데 비해 <동의보감>은 사실상 허준의 개인 역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기 때문에 그 위대함은 아무리 칭송하고 좋게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특히 <동의보감>은 허준이 평생 역작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이후 조선 백성들의 질병 치료와 의학 기술의 표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허준이 생존해 있던 16세기와 17세기의 경우는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였다.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이 번갈아가면서 전국을 휩쓸었는데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했던 터라 대부분 염병이라 불렸다. 

17세기 초에는 성홍열이 크게 번져 허준이 직접 나서서 이 병을 연구한 끝에 <벽역신방>이라는 역작을 쓰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서민들은 전란과 질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으며 기근이 심해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나타날 정도였다. 

전쟁 중에 먹지 못하니 면역력이 약해지고 질병이 한 번 돌면 여름에 주로 집단발병하여 죽음을 맞았고 환자가 죽고 나면 깨끗하게 시신을 처리하지 못함으로 인해 전염병은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엄격한 관리와 규율로 부대를 통솔하던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차도 그의 장계를 보면 군졸 6,200명 중에 병으로 죽은 자가 10%를 넘어서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일반 백성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내의원,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같은 기관도 사실 지도층이던 양반들에게나 미치고 있을 뿐, 백성들 대부분 비싼 약재와 의료진의 부족, 의학 기술 수준의 미흡으로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와 허준의 합작품, 백성들을 살려내라

16세기말과 17세기 초에 전국적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선조는 이를 심각한 국가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질병에 약한 여성과 소아들의 계속되는 죽음으로 인구수가 줄고 있어 이는 곧 국가 경제력과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총애하던 허준에게 이를 타개할 의서와 의학 기술의 보급을 지시한다. 

그러나 조선은 전란으로 인한 의학 서적의 소실과 함께 마땅히 체계적으로 전해 내려온 의학서조차 변변하게 없던, 한 마디로 의학이 실종된 ‘무(無)의 현실’이었다.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중국의 의서들을 모으고 전란으로 흩어지고 없어진 자료와 책자들을 모아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족한 의료시설에 더욱 소외된 계층에 대한 임상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 있다.

“열 사람의 장부를 치료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부녀를 치료하는 것이 어렵고, 열 사람의 부녀를 치료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어린이를 치료하는 것이 어렵다.”

허준은 이런 열악한 현실 속에서 그의 의료 현장 경험과 일일이 발로 뛰면서 찾아낸 조선의 의약재를 바탕으로 <동의보감>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현장 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전국적으로 의사가 부족했고 치료 기술과 수준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사실 집필과 치료의 현장에서만 존재한 삶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어의로 발탁되기 전부터 그는 종일토록 환자를 돌보고 약초를 캐러 다녔으며 좋은 물을 약재와 함께 중시하는 현장중심형 의사였으며, 밤에는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불철주야의 신의(神醫)였다. 

불굴의 의지로 동의학을 완성한 신의

그러던 중에 선조가 죽자 허준은 위기를 맞았다. 광해군 시절, 선조 때 어의였던 그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사간원들의 빗발같은 비난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신세를 한탄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여 집필을 포기하고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미 60세가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그는 불굴의 의지로 집필을 계속 했다. 오히려 2년 이상 유배와 추방과 복귀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서도 집필 의지는 더욱 돋보여 결국 광해군 2년이던 1610년 그의 나이 65세 때 <동의보감>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5권 25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질병의 치료와 예방, 건강 증진이라는 세 박자를 동시에 수용한 의학대사전의 성격을 띤다. 구체적으로는 허준의 치료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병의 증상, 진단, 예후, 예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동양 최고의 의학서를 편찬해 낸 것이다.

허준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신의(神醫)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방대한 의료 현장의 2천 여 가지 질병 사례와 증상들, 7백 종이 넘는 약물, 4천 여 가지의 치료 처방법과 침구법까지를 총망라하여 이 책에 실어놓았다. 이로써 중국 의학의 아류이자 변방의 무식한 의료수준이라며 홀대받던 조선 의학의 수준을 동의(東醫)라는 독립된 의학체계로 발전시킨 쾌거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동의보감>은 후일 일본 중국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신비의 비급>이라는 호평을 받을 정도로 크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다시금 허준 같은 명의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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