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서둘다 큰 그림을 놓치다

서둘다가 체한다는 말이 있다. 급하게 밀어붙이다 실패하는 사례가 많으니 절로 생긴 속담일 게다. 역사에도 이런 일들이 흔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다. 

'주초위왕' 조광조,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주초위왕' 조광조,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사림의 대표 조광조의 개혁사업이 좌초된 것은 너무도 하찮은 사연에서 비롯되었다. 궁궐 안에 벌레먹은 나뭇잎 하나가 중종의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조광조와 중종은 처음엔 친형제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중종반정으로 권세를 잡은 공신들을 견제하는가 하면 부패한 보수세력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혁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해 결국 두 사람은 서로 건너갈 수 없는 곳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소심한 군주 중종과 개혁자 조광조의 넘치는 카리스마가 불러온 불화의 사연과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7일의 왕비 축출 사건... 공신들의 무리수

중종반정으로 권세를 얻은 공신들은 처음부터 중종을 핍박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땅과 노비를 과다 소유하고 임금의 권한을 넘어서기도 했다. 심지어 중종 취임 일주일만에 부인 신 씨를 왕비자리에서 쫓아내는 패륜도 서슴치 않았다. 신 씨가 연산군 때 좌의정으로 있던 신수근으로, 훗날 친딸 신 씨가 보복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연전에 TV드라마 <7일의 왕비>로 세간에 단경왕후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 사건의 속내는 초짜 임금 길들이기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중종이 개혁적이고 과단성 넘치며 학식이 넘치는 실력가 조광조를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면서 공신 견제에 나선 참이었다. 조광조는 제도와 지침을 개혁해 가는 한편 중종을 훌륭한 군주로 만들기 위한 제왕 교육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주도권은 임금이 신임하는 조광조에게 쏠린 것으로 보였다. 조광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중종 14년 10월, 마침내 조광조와 사림은 상소를 올렸다. 반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정을 등에 업고 부당하게 공신에 책봉된 자들이 너무 많으니 이들의 위훈삭제를 요구하자고 나선 것이다. 공 없는 사람들이 너무 공훈을 많이 받아간 점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중종은 자기가 원하던 일이긴 했지만 그 조치들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사림의 요구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조광조의 기세에 눌려 이를 허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전체 정국공신 가운데 일흔 여섯 명의 명단이 삭제되었다. 조정은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중종은 중종대로 훈구대신은 훈구대신대로 이 일의 파장을 심각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중종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교육해 가는 조광조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경연이라는 임금과 신하의 토론학습장을 심야까지 끌고 가기 일쑤였다. 준비되지 못한 임금 중종에게는 이것이 너무 부담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잘 하자고 시작한 군주의 과외수업이 임금을 지치게 하고 있었다.

하필 그 때 궁궐안에 이상한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돌기 시작했다. 그 글자에는 “주초위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주(走)” 자와 “초(肖)” 자를 합하면 “조(趙)”가 되니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조광조가 왕위찬탈의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조작된 사건이었다.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 놓으면 벌레가 꿀을 파먹으면서 나뭇잎에 구멍이 날 수 있게 한 엉성한 음모였다. 중종이 이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중종은 조광조로부터 다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만 하면 공신의 힘도 약해졌고 자신이 직접 조정을 주도할 수 있는 힘도 생겼다고 본 것이었다.

화순 조광조 유허추모비
화순 조광조 유허추모비

개혁 피로증...서둘다 체하다

중종은 이 나뭇잎 사건을 조광조 축출의 기회로 삼았다. 중종은 1519년 11월 15일 밤, 훈구대신들을 앞세워 그동안 그렇게 신임했던 조광조 일파를 잡아들였다. 조광조는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가 전라남도 화순으로 곧바로 유배됐고 그해 12월 16일 사약이 내려갔다. 

얼마나 급작스럽게 사약이 진행됐는지 기가 막힌 조광조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에게 물었다. “내가 명색이 대사헌을 지냈는데 아무 것도 없이 이렇게 달랑 종이 한 장으로 죽어라고 했단 말이오?”

자초지종을 들은 조광조는 죽기 전에 술을 많이 마시고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 실록의 기록은 그 일을 이렇게 냉정하게 기록했다.

“전일에 가까이 하여 하루에 세 번씩이나 뵈었으니 (두 사람)의 정이 부자처럼 가까웠을 텐데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중종이 변심했다는 이야기고 너무 냉정하게 처벌했다는 지적이다. 조광조의 개혁도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조선의 개혁이 멈춘 사건이었다.

절호의 개혁기회를 차버린 못난 군주

조선시대에 군주는 신하에게 어버이 같은 존재 아니던가. 개혁을 주도한 조광조는 중종이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랐다. 또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임금이 된 중종을 철저하게 교육시켜 세종 같은 멋진 임금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무리수를 두게 되었고 중종이 조광조 집단에 염증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조광조의 임전무퇴식 일방적 개혁주도는 급기야 중종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끝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고 말았다. 조광조는 너무 서둘렀고 중종은 사소한 섭섭함을 큰 벌로 다스린 못난 군주가 되었다. 

두 사람은 군주와 참모로 만났으나 동상이몽의 처지였기에 어느 정도 목표가 달성되자 자연스레 갈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화합하지 못하고 개혁에 실패함으로써 조선의 정치 발전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책임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중종을 믿은 나머지 그의 품성과 속내를 읽지 못하고 국왕을 명분으로 꺾으려만 들었기에 끝까지 함께 까지 못했다. 

‘세 번 간하여 듣지 않으면 물러난다’는 참모의 격언을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종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중종은 사사로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을 위한 개혁을 사소한 앙갚음으로 밀어내는 결정적인 패착을 보여주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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