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을 이루고도 포기한 후회

태종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게 하고 2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들까지 잔인하게 숙청한 철권 통치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인물이다. 드라마 세종에서도 태종은 강하고 고집센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코끼리 다리 하나만 본 일방적이고 편향된 시각일 뿐이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고 무기를 개량했으며 아직 일천하던 조선의 국력을 크게 키워 500년 역사를 활짝 열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세종의 치적은 거의 모두가 아버지 태종이 기반을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 이방원을 동아시아 통사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는 중국의 영락대제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넘어서는 특별한 리더십과 통솔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국방을 정비하다

그가 왕으로 올랐을 때 시기적으로는 아직 조선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미완의 혁명국가였다. 고려의 왕족과 귀족, 충신들이 곳곳에서 아직도 조정을 뒤엎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고려 말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와 여진의 침공도 여전히 변경을 소란케 하는 주범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국방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한 사람은 지키고 두 사람은 군사를 돌보게 하라’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호패제였는데 이 제도는 태종이 참모 하륜의 지원 아래 대신의 의견을 구하고 시행에 들어가 전국의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3정1호의 국방군제를 편성했다. 이는 현역군인으로 입역하는 사람을 정정(正丁)이라 하고, 1인은 솔정(率丁)이 되어 농사를 짓고, 1인은 여정(餘丁)이 되어 군사로 나간 가정을 돌보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고려의 구식 군제를 혁파한 조선국방체계의 중요한 변화였다. 태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려 최고의 무기전문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시에 특별 채용하였다. 

최해산은 아버지 최무선의 화약 제조 비법을 전수받은 유일한 화포전문가였다. 그는 1395년에 아버지의 저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법(火砲法)’을 익혔고 그 비법을 전수받았다. 

조선의 무기는 사실 이 때 최해산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모든 신무기와 구식 무기의 개량에 박차를 가해 태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특히 최해산은 재임동안 동안 화차(火車) ·완구(碗口) ·발화(發火) ·신포(信砲) 등 신화기(新火器)를 개발했는데, 1400년 화약 4근 4냥, 각궁과 화기가 각각 200여 병(柄)이던 것을 18년만(태종 18년)에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 발사군(火砲發射軍) 1만 여 명으로 군비를 확장하여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조선 세종은  초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대마도를 점령했다.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조선 세종은 재임 1년 만에 대규모 군사작전, 그것도 수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초대규모 상륙작전을 지휘한다. 1419년 6월 상왕이 된 이방원의 지원에 힘입어 원정군 총사령관 이종무는 병선 227척, 원정군 1만 7,285명의 어마어마한 육군과 수군의 대선단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을 감행했다.

이 때 왜구 선박 129척을 나포, 20여 척만 남기고 불태웠으며 가옥 1,939채를 태웠다. 적병 11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 남녀 131명을 구출하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조선 수군은 동이사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명나라에서도 조선 수군의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조선 초기 수군의 총 전함 수는 무려 829척이나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 이 숫자는 이후 한 번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가운데 중대형선은 400 척 정도이고 나머지는 보급선이나 연락선 등 병참과 관련된 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 초기의 이 막대한 수군 전력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조선 초기 수군의 가상 적은 일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구였다. 이미 고려 말에 최영 장군이 대선 800척 등 2,000척 건조 계획을 발표하여 의욕적인 수군 확충을 제시한 바 있었으나 재원의 부족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왜구를 막아내지 못하면 국가의 안녕은 물론 이 씨 왕조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꼈기에 전력을 다해 수군을 양성했다.

이 수치는 성종 시절까지 그대로 가감을 보이면서 유지되고 있었다. 성종 시절 펴낸 ‘경국대전’을 보면 총 군선수가 737척, 수군 숫자는 48,800명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줄어들기 전에 사실상 대마도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통치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마도가 원래 계림땅이었고 수확을 거둘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희생을 치르고도 대마도에 주둔군 사령관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태종이 정치를 잘 한 인물이지만 결정적인 실책을 범한 것이다. 그 때 대마도를 점령하고 치리자를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 일본의 파렴치한 정치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 못했을 것이다. 승리를 거머쥐고도 열매를 거둬들이지 못한 우리의 실책을 더 이상 범하지 않도록 역사의 교훈을 두 눈 부릅뜨고 살피고 살필 일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