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민족의 성웅이라고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사실 그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가 판옥선을 개조해 만든 거북선조차도 실제 모습과 다르게 알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글은 이순신 장군의 숨겨진 리더십과 거북선의 실체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가 일본 수군과의 싸움에서 행한 세 가지 전술전략의 강점을 살펴 오늘의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경제위기를 이기는 전기를 마련해 보자.

이순신 장군은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의 약점을 거북선으로 대체하였다.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동화 작가

'판옥선의 약점을 거북선으로 대체하다'

1592년 5월 29일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미 1차 출동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동원하여 왜선 26척을 물리쳤다.

일본 수군은 당황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자신들을 이긴 수전의 명장이 누군지도 아직 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원균은 5월 27일 일본 수군의 이동을 알리는 급박한 공문을 이순신에게 보냈다. “적 함대 10여 척이 사천 곤양 등지로 육박해 오고 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진 것을 직감한 이순신은 23척의 함선을 이끌고 거북선을 앞세워 적을 공격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하여 만든 당시로서는 최신식 돌격함이었다.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만들었는데 전진 후퇴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함선의 주포가 전진 후퇴가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용머리 밑 부분에 도깨비 모양의 충격용 돌기를 이용해 적선을 들이받고 용머리를 내밀어 함포를 쏘면 적의 배가 순식간에 격침되도록 발명한 장치였다.

이순신은 왜 판옥선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을까?

일본 수군의 함선은 누각을 싣고 있는 모양으로 대중소 세 가지 함선으로 선보였다. 140명 정도 타는 대선 아다케는 조총을 주무기로 한 60명 정도의 저격수 및 전투병이 타고 있었다.

주력인 중선 세키부네에는 노군을 포함, 70명 정도의 날쌘 저격수와 전투병이 탔고 돌격선인 소선 고바야는 전투 요원 10명에 수군 20명이 탔다. 이들은 조선 판옥선에 비해 민첩하고 조총 사격으로 조선 판옥선의 수군을 해치운 후 조선 함선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핵심 전략이었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은 속도는 떨어지고, 백병전에는 약한 반면, 대포를 사용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문제는 적의 저격수로부터 발사되는 조총과 백병전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판옥선에 뚜껑을 달고 올라서지 못하게 칼과 창을 꽂았으며 정면에 용머리 대포와 충격용 돌기를 붙여  들이받으며 곧바로 적선을 해치우는 공격 전법을 채택한 것이었다.

부족한 점보다 장점을 강조하다 승승장구하던 이순신의 함대에 문제가 생긴 것은 그가 모함에 빠져 선조로부터 내침을 당하고 백의종군 하면서부터다.

이순신이 칠천량의 대패를 처음 들은 날이 1597년 7월 18일이었다. 조선 수군은 전날 원균의 지휘하에 전투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군이 궤멸하고 탈영한 배설의 12척만 간신히 살아남은 상태였다.

선조는 급한 나머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순신에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다시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드디어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널리 알린 명량해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13척 대 130척의 싸움. 그럼에도 이순신은 “제게 지금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적은 감히 저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13척의 부족한 숫자를 탓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13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긍정적인 전략가였으며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열세를 극복하는 것은 철저한 준비다

넬슨은 프랑스의 영국 침공을 시도하던 나폴레옹의 군대를 트라팔카 해전에서 물리친 서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며, 도고는 러일전쟁에서 극적인 승리를 일궈낸 일본 최고의 해전 영웅이다.

넬슨, 도고, 이순신을 세계의 3대 해전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넬슨과 도고에 비하자면 이순신은 해전 경력이 절대 열세다. 해군 경험이라고는 지금 전남 고흥 지역의 발포만호로 잠시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국가의 지원측면에서도 이순신은 혈혈단신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며 조선 조정은 육군을 위주로 준비하여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서면 그때 가서 적을 몰살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을 가진 이순신이었으나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는 성격이었다면 13척으로 130척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신념은 ‘준비된 자가 승리를 거머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이길만한 싸움이 아니면 나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준비하는데 더 시간을 투자했다. 그 결과 이겨야 할 싸움에선 반드시 이겼다.

첫 싸움인 옥포, 합포, 적진포, 당포, 사천, 당항포, 울포 부산, 한산, 명량, 노량 등의 해전에서 그는 백전백승으로 적을 이겨냈다. 그가 이긴 것은, 부족한 조선 수군의 문제점들을 미리 살펴 보완했기 때문이며 부하 장병들을 최고의 전사로 훈련시킨 결과였다.

여기에 현지 백성을 다독이고 관리하여 수군이 지형지물을 최대로 이용하도록 숙지시키는 한편, 정탐전과 수색전, 첩보전에는 백성들의 도움을 구했다는 점이다. 이런 탁월한 능력으로 이순신은 한중일 삼국의 동아시아 전쟁사를 새로 쓰게 한 영웅이 되었다.

수백 년 후, 일본 제독 도고가 승전한 후 돌아오자 공식 석상에서 누군가가 그를 넬슨 제독과 비교했다.  그 때 도고의 대답이야말로 이순신을 보는 객관적이고 진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나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다. 만약 조선의 이순신 제독과 비교한다면 나는 도저히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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