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의 틀을 바꾼 태종의 책사 하륜

조선 태조 재위 당시에는 여전히 고려의 부흥을 꿈꾸는 지방의 세력들과 토호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정종 태종에 이르기까지도 송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 문무관 후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왕좌의 난을 두 차례나 겪고 군주가 된 이방원은 자신의 책사 하륜을 유난히 신뢰했다. 그가 없었다면 이방원은 결코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륜은 과연 어떤 참모였을까?

정도전을 밀어낸 뚝심의 리더십

진양 오양산 하륜 묘역
진양 오양산 하륜 묘역

하륜(河崙, 1347년(충목왕 3) 12월 22일 ~ 1416년(태종 16) 11월 6일)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를 주름잡은 기획자였다. 1360년(공민왕 9)에 국자감시(國子監試), 1365년에는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으니 전형적인 고려 관료였다. 특히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제자로 이름을 날렸고, 1367년에 춘추관검열·공봉(供奉)을 거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된 후 신돈(辛旽)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신돈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1385년에 명나라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고 친명파로서 1388년 최영(崔瑩)이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위화도 회군 이후로 복관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좌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하였다.

이방원과 손잡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능 - 헌인릉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능 - 헌인릉

그는 굵직한 주요 사업을 막거나 추진하여 단숨에 조정의 중심에 서는 듯 했으나 좀처럼 주요 관직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가 한 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새로운 도읍을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 중지시킨 것이다. 이 일로 수도 이전파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때마침 명나라와의 표전문(表箋文) 시비가 일어나자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鄭道傳)을 보낼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일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 납득을 시키고 돌아왔다. 이 때문에 태조 이성계의 실세인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충청도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하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진산군(晉山君)에 피봉되었다. 이 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고 후일 관제를 개혁하고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하는 등 태종의 주요 사업에 크게 관여했다. 관제개혁과 경제 개혁으로 조선을 속히 안정시키려는 꿈을 가진 것이다. 

왕자의 난 이후 이숙번이 실세로 떠올랐으나 부패와 권력을 탐했을 때 그를 밀어내는 숨은 주역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1405년에는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다음 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그 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역임하고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 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고려말 이 곳에서 은둔하며 혁명을 도모하였다. 두 사람의 성을 따 하조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고려말 이 곳에서 은둔하며 혁명을 도모하였다. 두 사람의 성을 따 하조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의 빼어난 국방 기획안 - ‘한 사람은 지키고 두 사람은 군사를 돌보게 하라’

태종은 하륜의 책략에 힘입어 국가의 방어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정확한 인적 자원의 산출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실시한 제도가 호패법의 시행이었다.

호패제도는 조선 백성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호패를 가지고 다니게 하던 제도로 태종 때 처음 시행하여 한동안 없앴다가 세조 4년(1459)에 다시 시행하여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제도는 태종이 하륜의 지원 아래 대신의 의견을 구하고 시행에 들어가 전국의 인구 조사가 실시된 것이었다. 

‘속대전’의 규정을 보면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제서유위율, 위조․도적한 자는 사형, 빌려 차는 자는 누적률을 적용하고 이를 빌려준 자는 장 100대에 3년간 도형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관가에 호패를 반납하였다.

호패법 제도 이전부터 태종의 관심은 왕권강화에 있었다. 호패법과 별도로 그는 강력한 왕권강화책을 준비했다. 사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신임하여 신하들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여 신권정치를 주도하려는 정도전 일파의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을 건 왕권사수파였다. 그는 과감하게 하륜의 도움을 받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권주의자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마련하였다. 

태종은 호패법과 함께 군사제도의 편제를 과감히 개편토록 하였다. 먼저 군기감을 병조 산하로 배속시켜서 군주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태종은 육조의 힘을 키워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왕의 경호와 도성 경비를 총괄하기 위해 당연히 병조의 힘을 키운 것이었다. 즉,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자연 호구를 단위로 군제를 편성하던 것을, 사람수에 따라 바꾸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는 조선국방체계의 중요한 변화였다. 

태종, 화포전문가를 특채하다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으로 올라섰지만 그에게는 국방 문제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그는 재위 1년에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시에 특채했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 최고의 무기 전문가 최무선의 아들을 조선 조정에 편입한 것이었다. 하륜의 공로가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최해산은 아버지 최무선의 화약 제조 비법을 전수받은 유일한 화포전문가였다. 그는 1395년에 아버지의 저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법(火砲法)’을 익혔고 그 비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무선의 졸기에 나타난 기록은 해산이 군기소감으로 있는 것처럼 기록하였으나 사실 그가 군기시에 들어간 것은 1401년이었고, 벼슬을 받은 것은 그 해 3월 1일로 문익점의 아들 문중용과 함께 벼슬을 받았다. 

최해산은 재임동안 동안 화차(火車) ·완구(碗口) ·발화(發火) ·신포(信砲) 등 신화기(新火器)를 개발하여, 1400년 화약 4근 4냥, 각궁과 화기가 각각 200여 병(柄)이던 것을 태종 18년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 발사군(火砲發射軍) 1만 여 명으로 군비를 확장하여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각궁은 조선조에 쓰던 장궁을 말하는 것으로 소나 양의 뿔로 만들었던 활이며 중소화통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휴대용 화기다. 한편 태종은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최해산으로 하여금 선보이게 했는데 신기전의 원형을 선보이게 했다. 하륜이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 알 수 없으나 태종은 국방력에 목숨을 걸었다.

신기전의 원형을 만들다

신기전, 태종떄 시작된 조선의 로켓
신기전, 태종떄 시작된 조선의 로켓

태종 9년(1409) 10월 18일에 태종은 해온정으로 나가 새로 개발된 화포의 시험 발사를 참관했는데 그 결과가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해온정은 창덕궁(昌德宮) 동북 모퉁이에 세운 정자로 태종이 이 이름을 직접 지었다. 태종은 이날 화차를 제작하는 데 공이 있는 이도와 최해산 등에게 물품을 하사했다.

일부 학자들은 문종 때 만든 신기전의 원형이 이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쇠화살 수십 개가 구리통에 들어가서 발사되었다는 것은 곧 현대의 로켓포를 연상하는 신기전의 원형이다. 신무기의 개발과 실전배치에 이어 재위 17년만에 군기감의 설비를 늘리고 무기재고량을 대폭 확충했다.

하륜은 태종을 도와 국가 전반적인 역량을 강화하는 데 앞장 섰다. 이 때 늘어난 무기량은 화약이 6천9백80근이 넘었고 중소 화통도 1만 3천5백자루나 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밝히고 있다.

사병을 혁파하여 왕권을 세우다

하륜의 또 한가지 중요한 사업은 사병을 혁파해 혁명의 단초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고려 때부터 권문귀족들이 두고 있던 사병은 여러 가지 역모의 근거가 된다. 역신의 반발들이 대부분 사병들을 둔 권문세가였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태종은 후임 군주에 대한 정권의 안정을 강력하게 꿈꾸고 있었다. 태종은 하륜의 책략에서 도움을 받아 고려 시대 귀족들의 암투에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사병 문제에 대해 확실한 대책을 세웠다. 그는 무엇보다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사병을 혁파하여 반란의 가능성을 잠재워버렸다.

정종 2년 4월 6일 이방원의 주도로 사병이 혁파되자 권문귀족들의 반발이 드세었다. 실제로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분노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조영무  이천우  조온 등도 사병(私兵)을 혁파한 뒤에 사사로 군병을 숨기고, 모여서 음모를 꾀하다가 축출되기도 했다.

태종은 이 모든 반발을 강력한 통치와 카리스마로 잠재우며 한편으로는 권문세가들을 달래면서 일체의 사병들을 정리하도록 종용했다. 그 결과 태종 이후에 사병제도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륜의 작품이었다. 그는 끝까지 태종에게 충성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정도전처럼 제거당하지 않고 상부상조의 리더십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참모의 모습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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