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걸 장군과 이순신,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조선의 정걸 장군과 이순신,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노소합작, 팔순의 정걸 장군 이순신과 손잡다

음력 9월 1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9월 초하루 이날은 우리 해전사에서 길이 기억될 만한 날이다. 이순신과 그의 참모 조방장 정걸이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에서 주목할 이가 바로 정걸 장군이다. 물론 임진왜란하면 성웅 이순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밖에 권율 곽재우 정문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충신과 의병장, 장수들이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이들 말고도 임진란의 공적을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용맹한 장수가 바로 정걸(丁傑 1514-1597) 장군이다.

그는 78세의 늦은 나이로 이순신과 손을 맞잡아 해상에선 이순신을 도왔고 육지에선 권율을 도와 왜군을 물리쳤다. 이순신보다 한 세기 앞선 조선 최고의 전술전략가였지만 역사의 평가에선 뒤로 밀려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로부터 배울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순신에게 해전을 가르친 역전의 용사

정걸 장군은 1514년 출생으로 이순신 장군보다 무려 31살 위니 한 세대가 차이 나는 인물이다. 그가 무과에 급제하던 다음 해에 이순신이 태어난 것이다. 정걸 장군은 급제 후 훈련원 봉사(奉事)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고 1553년(명종 8)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1555년 을묘왜변 때 달량성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南桃浦) 만호가 되었다. 이후 부안현감 온성도호부사, 종성부사 등 전국 곳곳에서 여진을 정벌하고 변방을 지키며 이름을 알렸다. 

또 이후에도 경상우도와 전라좌우도 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을 거침으로써 전술 전략의 최고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1591년 이미 그의 나이가 일흔여덟에 이르렀을 때 현직을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였음에도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았다는 사실이다. 일흔이면 중앙정부에선 임금이 칠순이 된 조정 대신에게 궤장(지팡이와 의자)을 내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정걸은 백전노장으로 전장에 다시 나섰으니 그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경륜과 패기의 조화, 이순신의 오른 팔이 되다

사실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에게 해전의 전술 전략을 충고하고 직접 현장에 나가 전장을 리드하는 영웅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장수보다 돋보이는 면은 조선 수군의 핵심인 임진란을 앞두고 판옥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장착해 실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연습시킨 점이다. 정걸은 당시 판옥선 11척과 정병 1,000명 이상의 실전 가능한 병력을 키워내 이순신을 도와주었다. 그가 있었기에 전라좌수영은 실전에 투입돼 승전을 거둘 수 있었고 이순신도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고 충정도 전라도의 수비가 긴박해지면서 이순신은 여러 참모와 부장들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때였다. 이미 팔순에 가까운 노장 정걸은 사실 이순신보다 20년 앞서 수군절도사를 여러 번 했으며 육전과 수전에 익숙한 최고의 전술가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명분을 중시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후배의 지휘를 받으려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걸은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참전하고 공을 세우며 나라를 지켜냈다. 물론 자신보다 무려 31세나 연배인 정걸을 불러내 함께 참전토록 한 이순신의 용병술도 대단했다. 

그는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7월의 한산도 대첩에 이어, 9월 1일의 부산포 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와 함께 전투를 치룬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의 진중에 머물렀다”며  ”그에게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할 것이다“라고 치하했다. 당시 왜군들은 정걸 장군이 전선의 갑판을 궁(弓)자형으로 만들고 철로 만든 불화살과 큰 대포 등을 만들어 공격하자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놀라 도망갔다고 전한다.

권율의 행주대첩 승리를 돕다

정걸은 이 후 조정의 공훈을 탐하지 않고 또다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1593년 2월 행주 전투에 뛰어든다. 그는 평양에서 퇴각한 왜군 3만여 명의 병력과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 병력이 서로 밀고 밀리면서 대혈전속에 들어가 있을 때, 권율을 결정적으로 도와주었다.

실록은 이렇게 그 당시를 기록했다. “그 날 묘시에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 주었다” 그가 배를 몰고 달려가 화살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권율은 패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임진왜란의 육지전투는 또 어떻게 변했을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정걸 장군 위패
정걸 장군 위패

정걸 장군은 1595년에 모든 관직에서 퇴임하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다음 해 2월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니 조선은 조선의 명장 두 사람이 나란히 세상을 등지는 큰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걸의 아들 정연과 손자 정흥록도 정유재란 때 목숨을 잃어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3대가 순절하는 투혼으로 조정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후에 어떤 역사 기록에서도 이 같은 아름다운 노소합작은 없었다. 나라보다 자신의 체면과 명분을 앞세운 이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진대사와 패기만 찾느라 지혜로운 경륜 있는 이들이 홀대당하는 사회가 되었다. 역사는 말한다. 우리 사회의 큰 병폐인 조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경륜 있는 젊은 노인들의 지혜를 들을 때라고 말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 일러스트레이터 : 임경선 동화 작가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