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연재▮

조선왕조 성공을 가져온 핵심 키워드 12가지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겸임교수

조선왕조는 500여 년의 장구한 역사(1392~1910)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장수 국가였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일부 받아온 나머지, 조선왕조가 실패한 나라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사실 곰곰이 뜯어 살펴보면 조선왕조만큼 제도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완비된 국가체계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2024년 새 기획연재는 조선왕조의 성공을 가져온 핵심 키워드에 대한 필자의 글이다. 주관적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최대한 사료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전개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연재 중에 조선왕조의 패착과 실수를 짚어야 하는 부분이 나올 수도 있다. 이 연재 후에 이 부분은 따로 모아 조선이 무너진 이유도 정리해보고자 한다.(필자의 변) 

1회. 조선왕조 통치매뉴얼 경국대전(經國大典)
     “정도전. 왕조의 성공 설계도를 그려라”

조선은 매뉴얼 국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바로 경국대전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가 정탁과 같은 충신들의 항변과 읍소 끝에 선조는 그를 백의종군토록 풀어준다. 그 때 이순신은 지금의 종로 1가 의금부에서 출옥하여 서울 시내를 거쳐 사당동을 지나 남태령 고개를 넘어갔다.

 

남태령 고개, 종로 1가 백의종군로 기념비
남태령 고개, 종로 1가 백의종군로 기념비

그냥 그리로 가면 빨라서 간 것이 아니고 국법으로 정해놓은 죄인의 유배길이 따로 있었기에 그 매뉴얼대로 백의종군로를 걸어간 것이었다. ‘경국대전’은 이처럼 모든 조선왕조 통치 항목들을 매뉴널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 씨줄과 날줄처럼 조선 왕조의 기틀을 갖추게 한 근간이 되었다.

 

경국대전
경국대전

조선왕조 매뉴얼의 창시자는 사실상 조선의 기획자 정도전이다. 정도전이 사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조선경국전’(1394년)과 공동편찬한 조선 최초의 법전 ‘경제육전(經濟六典)’(1397년)이 사실상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제도의 근본을 세운 초기 매뉴얼의 이론적 바탕이 된다. 

그 출발은 중국의 ‘경세대전’과 ‘주례’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국을 일방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독립적이며 유기적인 국가체계로 세우기 위해 ‘경제육전’ 및 ‘경국대전’(1485년)의 기초를 마련한 이가 정도전이다. 따라서 그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국가체제와 독자적 이념을 담은 가장 기본적인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마키아벨리를 앞서가는 국왕 견제론

특히 ‘조선경국전’의 총론은 국왕의 이상적 지위와 성격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주례’를 칭송하다 못해 학문적인 아부까지 서슴지 않는 친중학자들을 부끄럽게 하고도 남는다. 그의 독창적인 신권(臣權)주의는 주로 재상들 고급관료들의 처세와 권한 의무를 기록한 ‘주례’의 재상론(宰相論)과 달리 국왕의 지위를 구체적으로 기술했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별성을 갖는다. 

특히 국왕의 지위를 초월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절대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덕적 인격을 구현해야 하고, 아직 그런 성인의 인격에 이르지 못했다면 현인(賢人) 재상과 학자관료의 제왕학수업(書筵·經筵)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로 그렸다는 점이 놀랍다. 정도전은 신하의 자리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바로 잡아 임금을 바르게 세워주고 인재를 등용하여(知人) 온갖 실무를 잘 처리하는(處事) 것을 재상의 핵심과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이론은 이방원의 무력 진압으로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경국대전 편찬의 기본 뼈대로 살아 남았다. 정도전에게 칭송을 거듭해도 부족함이 없는 이유이다.

“조선 건국을 도모한 정도전은 군신을 막론하고 누구든 최고의 도덕적·정치적 인재가 국정운영과 권력의 향배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백민정 <주자학 경계를 넘어 군신의 경계까지 흔들다. 철인왕국의 기획자 정도전>(주간조선 2013.4.15.)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 경국대전이었다. 이 글에서 신복룡 교수(건국대 명예교수)의 논문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됐다. 상당 부분 대학 때 은사님이셨던 신 교수님의 논리를 옮겨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정치학과 사학을 연결한 보기 드문 논문집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다음 법조문의 실례를 찾아 보자.

“서울과 지방의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3품 이상은 3년마다 봄의 첫 달에 각기 3인을 추천하고, 동반 3품 이상 서반 2품 이상은 각기 수령이나 만호(萬戶, 3품 이상) 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추천하되 모두 3인을 넘지 못한다.”

당상관의 임명에 대한 규정이다.

“이조가 관리를 통솔하면서 배려해야 할 사항은 그들을 규찰하고 포상하는 일이다. 그러한 직무로서 중앙정부에서는 그 관청의 책임자인 당상관․제조(提調) 및 소속 조(曹)의 당상관이, 지방정부에서는 그 도(道)의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속관의 등급을 매겨 왕에게 보고한다.” 『경국대전』을 통해서 본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

이조가 해야 할 일을 명기했다. 이 뿐아니라 공조 병조 형조 등 6조의 정부 조직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명기했다. 심지어 지방관의 부패와 사기를 고려하여 임기제를 창안했는데 예컨대 관찰사와 도사(都事)는 근무 일수 360일(1년)이 차고, 수령은 근무 일수 1,800일(5년)이 차고, 당상관(堂上官) 및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 수령과 훈도(訓導)는 근무 일수 900일(2년 반)이 차면 바로 전임시킨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농번기에는 전임시키지 않으며, 춘분(春分) 전에 근무 일수 미만이 50일 이하인 자는 전임시킨다고 정리했다.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한 국가가 빈곤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부가 안정되어야 하고 예측 가능한 법률이 제정되어야 하며 세금이 가벼워야 한다.”

경국대전은 그런 면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최상의 규범집이었다.
임금들은 쉴새 없이 자신이 내린 명령을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제도와 사람이 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셈이다. 신하들은 그런 국왕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제도로 버티며 맞섰다.

조선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수국가로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통치 매뉴얼(성문법)을 초기부터 철저하게 준비해 온 덕분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아주 사전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성문법이란 문서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일정한 절차와 형식을 거쳐서 공포된 법이다. 국가에서 제정하였다는 의미에서 제정법이라고도 한다. 근대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할 목적으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성문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근대국가도 아닌 중세의 조선에서 이러한 제정 성문법을 갖추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 아닌가.

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최고의 법전이다. 조선 세조 대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대에 들어 완성, 반포한 법전으로 조선 500년을 굳건히 지켜낸 기둥과도 같은 존재였다.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

‘법대로 하자’

조선을 건국한 주도 세력들은 고려 말이 혼란하게 된 원인을 법질서의 혼란에서 찾았다. 특히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공적인 국가 권력을 남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법조문을 임의로 적용하여 부정을 자행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 권력의 공공성이 요구되었으며 이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완비된 법체계가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명률에 주목하고 이의 적극적인 수용을 시도하였다. 대명률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며 최신 법률로 이미 고려 말에서부터 정몽주(鄭夢周)의 작업을 거쳐 신정율(新定律)이라는 형태로 실시 적용되고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라고 앞에서 썼다. 그래서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라 고구려 백제 및 고려가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 국가였다면(물론 자연발생은 아니다) 조선은 인위적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생각하여 세운 최초의 국가라는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392년 7월 28일 반포된 이성계의 즉위교서를 보자.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물론 고려 망국의 원인과 책임을 왕씨 군주에게 돌리고 조선은 차별화된 위민 국가로 세운 것이라는 역성혁명의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통치 철학 안에서 가능한 한 군주의 권한을 견제하고자 한 정도전의 의지와 철학이 경국대전 일부에 남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경국대전은 1세기에 걸쳐 그 이전의 세 차례에 걸친 법전 편찬과 본격적인 편찬 작업 및 5회의 수정작업을 거쳐 탄생한 역작이다. 이것은 입법자들이 ‘법을 만들면 뜻하지 않은 폐단이 생기고 법을 만들기는 쉬우나 집행하기는 어렵다’는 정신을 편찬 내내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경국대전의 주해(註解)까지 만들어 법적용을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짧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 그 무궁무진한 법조문과 적용 사례는 두고두고 연구할 가치가 넘친다.

대략의 내용
‘경국대전’은 정치, 경제, 사회를 모두 아우르는 종합 법전이자 통치 매뉴얼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통치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행정법과 군법, 그리고 민간을 다스리기 위한 민법의 가족법, 형법들이 모두 들어 있다.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 순으로 6조의 법전을 통해 그 구체적 기능과 역할을 주문하고 이를 어길 경우의 형벌도 포함했다. 
《이전》 : 국가 통치의 기본인 중앙 및 지방관의 관제, 관리의 등용, 면직과 기본 처신
《호전》 : 국가 제정의 근간인 조세 제도, 녹봉, 호적, 매매, 채무, 상속법까지
《예전》 : 인재 선발의 장인 과거제 시행에 대한 규칙, 관혼상제, 외교, 문서 작성예시 등
《병전》 : 국방법이다. 전란에 대비한 방어제도 및 군사 제도와 징병, 병참, 상비군의 운용
《형전》 : 형벌과 재판
《공전》 : 도로 및 운송, 도량형 등의 규정이지만 조선 경국대전에서 가장 아쉬운 법이다.

지금 시각으로 봐서 아쉬운 점은 ‘경국대전’은 신분법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차별을 고정화하고 신분을 넘어서는 돌출행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우 엄격한 규정을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서민과 노비들에게 특히 불리한 점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사회, 문화, 풍속에 이르는 다채로운 내용들이 들어있어 눈길을 끈다.

조선 태조 이래로 형벌을 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명률을 따랐다. 태조의 즉위 교서에 따르면,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무릇 공사(公私)의 범죄를, 반드시 《대명률(大明律)》에 해당해야만 처벌할 수 있고,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도록" 했다. 

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해 봐서 적용이 불가하면 벌하지 않는 것으로 일종이 무죄추정주의와 일부 비슷한 면도 갖고 있다. 실제 법규 적용 또는 집행 시에도 조선의 실정과 조화되도록 국왕의 전교 등을 통해 수시로 기준을 변용했고 사면 제도를 적용하기도 했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형수에게는 3번의 심판 기회를 제공하는 삼심제가 있었고 국왕이 직접 재판하도록 한 점이 놀라운 일이다.

국왕의 견제와 열공 

신복룡 교수에 따르면 경국대전은 적극적 의미로서 왕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특이하지만 그 반대로 왕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는 과다할 정도로 세밀했다. 

우선 왕은 끝없이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이 곧 경연(經筵)으로 거의 매일 열린 국왕 교육의 시간이었다. 하루에 3회에 열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중종의 경우는 진성대군 시절 준비되지 않고 연산군에 이어 갑자기 왕위에 올랐기에 야강(야간수업)까지 받아야 했다. 

20명에 이르는 경연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숫자가 왕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왕조를 잘 다스리게 하자는 의도도 있었고 군주에 대한 견제 기능도 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장에서 다루겠지만 왕에게는 경연을 시킨 반면 성균관과 사학(四學), 지방 향교를 설치하여 사대부와 서민의 자제도 교육시켜 왕조의 장수를 꿈꾸었다.

서울대 정긍식 교수는 <조선의 법치주의 탐구>에서 조선의 행정체계는 국왕-육조의 행정체계임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이에 대한 견제와 균형은 제도적으로는 의정부 서사제를 통한 원로대신의 통제와 사헌부 사간원의 업무에 의한 탄핵을 통제로 구분할 수 있다고 정의했다. 

조선이 오래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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