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연재, 조선왕조 성공을 가져온 핵심 키워드 12가지] 
(2) 조선왕조의 왕세자 교육과 왕위계승

 “태교에서 인성교육까지!!”

조선이 장수국가로 발전하고 오랜 기간 국가 경영에서 성공한 두 번째 이유는 ‘왕세자 교육’에서 상당 부분 성공한 덕분이다. 왕세자 교육은 다음 보위를 어떻게 세워갈지를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 된다. 선거제가 아니라 핏줄로 물려받은 차기 왕위 계승자가 자질과 역량이 나면서부터 탁월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조선 왕실은 왕위 계승교육 즉, 왕세자 교육이야말로 다음 세대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겼다. 

조선의 군주들이라면 누구나 왕위 승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져 나라가 태평하고 자신의 핏줄이 국태민안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욍실의 왕세자교육을 살펴보는 기획이다.(편집자 주)

 

왕세자입학도첩,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왕세자입학도첩,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당대 석학의 총동원, 세자시강원 

조선 초기에는 왕세자를 서연(書筵)에서 교육했다.  서연은 왕세자를 가르치는 교육 장소로도 의미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왕세자에 대한 교육 과정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는 이 기능을 아예 <세자관속>이라는 관제를 설치하고 기관을 세워두었다. 이것은 후일 세자시강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여기에 정1품 사(師)와 부(傅) 밑에 종1품 이사(貳師)를 두고 세자를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이 때 사(師)는 영의정이, 부(傅)는 좌 우의정이, 종1품 이사직은 좌우찬성이 겸임했다. 이밖에도 정3품부터 정7품까지 다양한 직제를 두고 세자를 가르쳤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특히 사내아기가 태어나면 가장 큰 경사로 여겼지만 정작 당사자 즉, 왕자들은 그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었다. 왕세자로 인정받지 못하면 자기 형제가 왕이 되었을 경우, 대단히 심한 핍박과 심지어 죽음을 불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에서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다”라는 말이 두고두고 전해져온 까닭이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는 늘 왕권을 노리는 경쟁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기 중에서 원자(元子, 국왕과 왕비 사이에 출생한 왕세자 책봉 전의 맏아들)는 태어나면서부터 과외 공부를 죽자고 시켰기 때문에 하루라도 쉴 틈이 없었다. 테어나서 말을 하기 전까지 유아시절을 제외하고는 왕으로 사망할 때까지 보양청(輔養廳), 강학청(講學廳), 시강원(侍講院), 경연청(經筵廳)에서 끊임없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조정에선 삼정승들이 왕세자를 압박했다. 
‘위로는 역대 선왕들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의 안위가 달려 있는 중직'이라는 것이 왕세자에게 쏠리는 압박이었다. 한 마디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왕세자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었기에 삼정승과 왕실은 미래 권력인 국왕이 될 왕세자에 대한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세자에게 하는 강의를 서연(書筵)이라 했는데 이는 임금이 신하들과 하는 강의 수업인 경연(經筵)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연은 오전, 오후, 저녁 하루에 세 번 삼각 체제로 열렸으며 주로 ‘논어’ ‘맹자’ 같은 유교 경전과 ‘춘추좌전’ 같은 역사책을 배웠다. 역사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역사 속 군주들의 잘잘못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에선 왕세자 뿐 아니라 사대부 학자들도 당사 송사 등을 즐겨 읽고 외웠다. 서애 류성룡은 당송사를 줄줄이 외울 정도였다고 전한다. 

정조도 왕세자 교육을 잘 받았고 역사관이 뚜렷해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했다. 거기다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조정 관료들의 역사관을 바로 세우고 각종 제도와 문물을 재정비하였다. 

왕세자는 왕이 될 사람이라 세자교육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스승으로 동원되었다. 영의정좌우의정 등 삼정승과 판서들도 여기에 투입되었다. 이들이 스승이 됨으로써 세자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식견과 국가관, 정치적 리더십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들이 바빠서 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종3품의 보덕 1명을 비롯하여 필선, 문학, 사서, 설서 등 총 5명의 문관들이 스승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제십잠발휘(御製十箴發揮)』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내용과 형식, 저자, 저술 배경 등의 고찰을 통하여 왕세자 교육서로서의 의의를 밝히고자 한 것으로 1책 42장의 필사본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당시 교육 상황을 엿보게 한다. 구순옥, 교육사상연구 32. 4 (2018): 1-35에서 요약 발췌.

이 책은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이었던 동애(東厓) 이협(李浹, 1663〜1737)이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를 보도(輔導)하기 위하여 1728년(영조 4)에 편찬한 것이다.

1694년(숙종 20) 숙종(肅宗)은 당시 세자였던 경종(景宗)을 위하여 국왕이 갖추어야할 덕목을 담은 「어제십잠(御製十箴)」을 친히 지어 세자에게 하사하였다. 이협은 숙종의 「어제십잠」을 덕목별로 나누어 먼저 제시하고, 경전(經傳)과 역사서에 담긴 성현(聖賢)의 격언과 역사적 사실 가운데 본받아야할 전고(典故)와 경계해야할 전고 등을 발췌한 190여 개의 전고를 덕목에 따라 나누어 열거하고, “신근안(臣謹按)”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문장을 덧붙여 『어제십잠발휘』를 편찬하였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기존 세자 교육서로 사용하던 중국의 경전(經傳), 역사서 등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세자 교육서라는 점이었다.
둘째, 10세의 어린 세자에게 맞추어 긴요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요체를 모아 1책으로 간략하게 편찬한 교육서였다.
셋째, 중국 경서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주제로 삼아 부연한 기존의 편찬 서적과 달리, 숙종이 세자를 위해 지은 열 가지 잠언을 주제로 삼아 부연하여 매우 자주적이고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넷째, 영조조(英祖朝) 후기에 국왕과 세자를 보도하기 위한 군주학 서적이 활발하게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세자 교육과 교육서 편찬 경향의 일면과 아울러 조선의 교육서 편찬의 흐름이 어떠했는지의 일면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미래 권력인 왕세자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다음 대에 출세를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여기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들어가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았지만 권력의 핵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위험 부담도 그만큼 컸다.

조지서(趙之瑞, 1454년 – 1504년)의 경우는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지족(知足), 본관은 임천이다. 그는 1474년 과거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했다. 성종에 의해 허침과 함께 연산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지만 너그러웠던 스승 허침과 반대로 연산군을 엄격히 대해 연산군의 미움을 샀고, 결국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관직은 1495년, 창원부사에 이르렀다. 왕자의 스승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월오봉도,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일월오봉도, 사진=국립고궁박물관

고달픈 왕세자의 하루

왕세자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요즘처럼 일찍 학원에 가는 어린이들보다 더 바쁜 삶을 살았다. 온 몸과 옷을 치장하고 문안인사를 다녀오면 아침식사 후, 조강이 시작된다.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가르치는 것이 조강(朝講) 즉 아침 학습이었다. 맨 먼저 어제 배운 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왕세자는 책을 덮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는데 제대로 못 외우면  호된 질책이 따랐고 때에 따라서 세자를 돕던 내시들이 매를 맞기도 했다. 

이후에 교수들이 일과에 따라 학습교재의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풀어주고 고사성어를 이야기해 준 다음 이를 암기토록 했다. 질의응답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후에 이를 익힌 세자가 교수를 따라서 낭독했다.

낮 공부, 즉, 주강(晝講)도 있었다. 수업 내용이나 방식은 조강과 같았다. 점심 공부가 끝나면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을 했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부모님께 밤새 안녕히 주무시도록 인사를 했을 정도니 피곤하고 바쁜 일상이었고 몸이 귀찮다고 피할 수 없는 반드시 해야 하는 절차였다. 

세자시강원의 경우 본격적인 제왕 교육이 이루어진 곳으로 태조가 시행하던 <세자관속>을 세자시강원으로 바꿔 체계화했다. 세조가 그 시발점이었다.

한편 연산군의 이복 형제이던 중종의 경우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해 성인이 된 후 조강부터 한밤중에 하는 야강까지 하느라 너무 피곤했다. 야강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나머지 공부였다. 중종이 힘들어 하는 내색을 보이자 이를 비난하는 일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소장품이 남아 전하고 있다. 시강원 명패, 춘방 현판, 왕세자입학도 등이 전해 온다.  

성공한 왕세자와 그렇지 못한 경우

조선 초기에는 세종이 당시 충녕대군 시절 왕세자 교육을 제대로 받았고 또한 이를 통치에 제대로 활용했다. 문종도 마찬가지였지만 등극 전 세종 말년에 그는 능력을 발휘했으나 등극 후 오래 살지 못하고 다음 보위를 튼튼히 세우지 못해 계유정란의 참극을 맞았다. 단종은 그 피해자였다.

세조(수양)의 아들 예종은 오히려 7세부터 좋은 교육 체계 아래 왕세자 교육을 받았으나 재위 1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빛이 바랬다. 

성종의 차세대 권력 연산군 이야기를 해 보자. 조선 시대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왕세자라면 연산군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태어나 정식으로 왕세자 교육을 받았음에도 스승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않고 왕이 된 후 방탕과 권력 남용, 왕실 혼란을 일으켜 폐위되었다. 

연산군은 1476년에 태어나 1506년 30세에 사망했으며 12년간 통치했다.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2년간 통치하면서 각종 사화를 일으키며 사람을 핍박하고 수많은 오점을 남긴 왕이다. 왕세자 교육을 가장 많아 받은 이로써 가장 악행을 저질렀으니 역사적으도 조선 역사에 악영향을 미쳤다. 

초기 4년간은 정치를 잘했지만 1498년 22세 무오사화때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사림파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능지처참했으며 궁중에 들어 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불러 끌어들이면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도 부패했다. 

연산군의 사치로 국고는 거덜나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심지어 금표(禁標)를 설치하고 왕의 사낭터를 함부로 넓혔으며 공신들의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했고 간신 임사홍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으로 갑자사화마저 일으켰다.

소가 농사의 중요한 수단이던 시절이라 전국적으로 소를 잡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정작 자신은 매일처럼 궁궐에서 소고기를 즐겼다. 또 친모인 폐비 윤씨 관련 사림 세력과 중신들을 모두 제거했다. 연산군의 폭정에 직언하는 환관 김처선을 활로 쏘아 죽일 정도였다.

그 피해는 왕세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성종의 2남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올라서면서도 한동안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중종도 기묘사화를 일으키며 조광조 등 새로운 개혁자들을 대거 축출했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4대 사화의 가장 큰 피해는 똑똑하고 어진 선비들이 대거 탈락한 것이라고 말한다. 수 백명의 선비가 죽음 또는 유배로 사라졌으니 요즘 같으면 고위공직자 후보 수 백명이 사라진 셈이다. 국정이 크게 펑크가 날 것은 뻔한 일이다. 

조선사에서 가장 제대로 왕세자교육을 받은 이는 정조였다. 그는 왕세손의 신분으로 영조의 감독 아래 다음 보위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에 탄강하여, 8세에 왕세손 책봉례, 10세에 입학례와 관례를 치르고,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고나자 왕세손이자 동궁으로 추대되었다. 24세에 왕위계승자의 실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대리청정 수행을 거쳐 25세에 등극하기 전까지 그는 철저한 세자교육을 받아 가장 성공한 왕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군왕으로서의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특히 영⋅정조대에는 왕실교육을 확대 강화함으로써 왕실의 위상제고와 왕권강화에 주력하였으며, 의례정비를 통해 국가기강과 통치질서를 확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조 이후에는 제대로 된 왕세자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익종(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8세에 왕위에 올라 순원왕후 섭정을 받았으나 외척들간의 정치 싸움에 휘둘리기만 했고 결국 스물 셋의 나이에 단명했다. 이후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철종과 이하응 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 모두 왕위계승 자체가 불안정했기에 교육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 제대로 된 왕세자교육이 없을 때는 나라도 바로 설 수 없었다는 것을 역사는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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