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의 자전거 여행(16) - 성산대교~왕숙천~광릉수목원 일주

고프로 카메라를 분실했다 다시 찾으며 깨달은 무소유의 미학

▲ 눈이 내리는 가운데 강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라이딩을 즐겼다.

폭설 속에 강했던 한강 자전거길 여행은 버림과 무소유의 개념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더불어 잃어버린 장비들을 다시 찾을 수 있어 즐거웠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강변 풍경이 아름다웠던 왕숙천 풍경과 광릉수목원 라이딩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토요일 오전 11시 반에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날씨가 포근하고 맑아 괜히 무거운 여행용 자전거에 스노타이어를 달고 나온 것이 아닌가하고 후회할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다. 건강검진을 받고자 서교동의 병원에 잠시 들렸다가 절두산성당 아래의 자전거도로로 나오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오후에 많은 눈이 내린다는 기상대의 예보가 맞은 셈이다.

이에 스노타이어로 무장하고 나온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눈 내리는 한강변의 멋진 설경을 감상하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양화대교를 출발해 이촌동 부근의 강변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설경 사진을 찍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덧 서울시와 구리시 경계에 도착했다.

▲ 서울과 구리의 경계선을 알리는 표지판.
평소에는 자전거에 무거운 트레일러를 달고 집에서 구리시민공원의 국기봉 앞까지 가는 데는 2시간 정도면 도착하곤 했는데 눈발이 짙어지면서 길도 미끄럽고 앞을 보기 힘들어 라이딩의 속도는 점점 떨어지기만 했다. 그래도 아직은 스노타이어 덕분에 별다른 걱정이나 위험 없이 달릴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왕숙천이 나올 것이다. 꽤 오래 전부터 언젠가 왕숙천을 따라 올라 광릉수목원까지 가보려 했었는데 오늘에야 그 소원을 풀게 되었다. 이번 라이딩은 설륜악(雪輪岳)이라는 자전거 동호회의 1박 2일 송년회 모임에 자전거를 타고 가보겠다고 결심한 것에서 시작됐다. 때마침 눈이 오니 설경을 즐기며 라이딩을 할 수 있어 금상첨화가 되었다.

밀리터리 MTB인 허머를 투어링용으로 튜닝 및 업그레이드한 결과 어느새 여행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언제 어딜 가도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될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해준 솔라 배터리가 있어 마음 든든하다.

▲ 겨울철 든든한 힘이 되어준 솔라 배터리.
▲ 고프로의 동영상 촬영 카메라.
이렇게 눈이 오는 흐린 날에도 미약하게나마 태양의 축복을 받아 미세 충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멋진 라이딩 영상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프로(GoPro)의 카메라는 내가 아끼는 고귀한 여행 장비 중 하나다.

최근 와이파이 어댑터가 옵션으로 출시되어 찍고 있는 동영상을 스마트폰에서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다니 조만간 어서 구입해서 사용해 봐야겠다. 제기랄! 수입은 대폭 줄었는데 얼리 어댑터의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니….

허머 산악자전거는 미국의 공수부대원들이 조립, 포장해 공중낙하 후, 적진 정찰이나 침투에 활용되는 훌륭한 밀리터리 산악자전거다. 미 국방부 군납용은 허머와 똑같은 스펙으로 국방색의 녹색으로 도장돼 ‘PARATROOPER’라는 모델로 납품되고 있다.

▲ 왕숙천 스노 라이딩을 함께한 허머 자전거.
한강 위에 눈발이 내리며 무채색의 뿌연 경치로 다가와 마치 안개 속의 풍경을 보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왕숙천의 퇴계원 부근에 진입하자 날은 어두워지고 눈발은 더욱 세졌지만, 아직은 눈이 그다지 많이 쌓이지 않아 큰 어려움 없이 여유롭게 스노 라이딩의 낭만을 즐기며 달릴 수 있었다.

날도 저물고 눈발이 더욱 강해지자 자전거 라이더도 산책하는 사람들도 보기 드물어졌다. 게다가 배도 고프고 허기져 라이딩 속도는 더욱더 더뎌만 간다. 처음 가는 초행길이고 더구나 밤길이지만 스마트폰의 내비게이터 덕에 현재의 위치 파악은 물론 목적지로의 방향 설정에 어려움은 없었다. 배고파 지치고 힘들어도 이 멋진 스노 라이딩을 맘껏 즐겼다. 드디어 광릉수목원을 조금 지나니 송년회의 목적지다. 목적지에 도착해 오랜만의 정든 얼굴들과 맛난 음식에 술잔을 나누며 프로그램대로 선물도 교환하고 각자의 애송시를 읊기도 했다.

▲ 충전 걱정을 없게 해준 솔라 배터리.

난 스마트폰을 열고서 김춘수의 ‘꽃’을 한국어로 그리고 불어로 읊으며 32년 전의 애인이 핸드백에 넣고 다녔었던 김춘수 詩集을 떠올렸다.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눈덮인 강변도로를 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밤새 오랜만의 폭음과 담소로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창밖엔 눈꽃이 활짝 피었다. 누구를 위한 눈꽃이련가, 눈물이 되어 흐르려는가! 바람이 불면 나무에 쌓였던 눈발들이 반짝이는 은빛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게 황홀하기까지 해 창밖의 숲속 풍경에 넋을 잃었다.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해 광릉수목원 길로 접어드니 쌓인 눈에 도로가 장난이 아니다. 길은 1차선뿐이라 평소에도 자전거 라이딩은 위험했는데 이처럼 눈이 수북이 쌓여버리니 도로 폭은 더욱 좁아져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타다 끌다를 반복하며 내려갔다.

붉게 단풍든 봉선사를 본 게 벌써 2년 전이었다. 그 때 시간이 있으면 하얀 설경도 여유롭게 감상해 보고 싶었지만 오늘도 자전거로 먼 길을 가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그냥 스치고 말았다. 아마도 언젠간 봉선사 설경을 놓치고 지나친 것을 엄청 후회할 것이다.

어제 밤에 왕숙천을 오르는 자전거 길에서 눈밭에 가려진 도로 턱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자전거에 부착된 고프로 카메라가 떨어져 사라진 사실을 지난밤 뒤늦게 발견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나 멀어 일단은 포기하고 말았다. 넘어졌을 때 즉시 자전거에 이상이 없는지 잘 살펴보았다면 고프로 카메라가 떨어져나간 것을 발견했을 수도 있을 텐데. 내 꼼꼼하지 못한 성격과 아울러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급한 마음에 훌훌 털고 일어나 확인도 하지 않고 라이딩을 재촉하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워갈 수도 있고 산책하는 이들의 발에 밟혀 부서질 수도 있다. 또한 눈에 덮여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혹시 못 찾거나 부서졌다면 이것이 내 운명이려니 하면서도 일단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되찾고 보자는 생각을 하며 기억을 되살려 어렴풋이 넘어졌던 장소를 찾아가니 뜻밖에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란 생각에 앞으로는 쉽사리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안될 땐 내 운명이려니 하며 마음을 깨끗이 비우자!

▲ 밤이 되자 눈발이 더욱 거세져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잃어버렸던 카메라를 찾고 나니 긴장감이 풀리면서 눈 쌓인 자전거 길을 헤쳐 나갈 생각을 하니 막막한 느낌이다. 스마트 폰의 지도 앱을 열어보니 바로 옆의 작은 다리만 건너면 차도가 나오고 그길로 이십분 정도 내려가니 퇴계원역이 나왔다. 차도는 갓길도 없는 눈 쌓인 1차선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염화칼슘이 뿌려져서 달리기엔 거의 지장이 없다.

다소 위험하더라도 조심해서 가면 빨리 전철역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지쳤던 느낌은 사라지고 갑자기 원기 백배해진다. 마침 차도를 건너자마자 슈퍼마켓이 보여 그곳에서 빵과 우유로 간단히 요기를 해서 기운을 차린 후, 잠시 달리니 곧바로 퇴계원역에 도착했다. 경춘선 상행을 기다리며 시간이 남아 자전거에 묻은 눈뭉치들을 떼어내다가 보니 아뿔싸 알루미늄 물통에 든 물이 지난 밤새 얼면서 팽창하여 급기야 터져버리고 만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 박주하자전거 여행가노마드자전거여행학교 운영
어젯밤 기온이 꽤 낮기는 낮았나 보다. 그래도 값비싼 고프로 카메라를 되찾았다는 생각에 그까짓 거 하면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여행은 사람들을 보다 긍정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키워주며 반성도 하고 겸허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새삼 깨닫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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