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여덟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지팡구(Japan)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 서인도를 만나다①

“안방에는 대감마님이 곰방대에 담배를 말아 넣고 피우고 있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서리가 내리면 포기 배추에 벌건 고춧가루를 버무려 겨울 김장을 담근다. 하인들은 쌀밥 대신 서민의 겨울양식인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 먹는다.” 오늘날 우리가 고려나 조선시대 전통적인 선조들의 삶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과연 당시의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정답은 “틀렸다”이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콜럼버스에게 바친 최초의 공물’호세 가넬로 엘다,1892년

담배는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탐험하고 원주민들로부터 선물로 받아 귀국한 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멕시코가 원산인 고추도 1493년 1차 항해 후 귀국하면서 스페인에 처음으로 가지고 왔고 고구마 역시 이때 배에서 식량으로 사용하였다. 앞서 본 작물은 모두 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소위 ‘근대 작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조선 후기에나 들어와 이후 재배되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조선 전기에는 이런 작물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상식을 벗어나는 다른 예를 보자. 인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에 인도의 명칭이 쓰이고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중미 아메리카의 카리브해의 섬들을 일컫는 말로 ‘서인도 제도(West Indies)’가 있다. 또 서부 영화에서 흔히 보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Indian, 인도인)’ 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쓰이는 이런 명칭은 1492년 10월 콜럼버스가 산살바도르섬에 상륙했을 때 이 곳을 인도로 오인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카리브해(Caribbean Sea)’라는 명명도 당시 근처 섬에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식인종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처럼 콜럼버스의 ‘우연한’ 발견은 그가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세계의 문명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바다를 통해 연결된 지구는 하나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퍼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도착한 곳을 인도라고 믿었던 콜럼버스가 오늘날의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를 타고 지팡구를 찾아 서쪽으로 탐험을 떠나보자.  

때는 1492년 4월 17일. 스페인 산타페. 두 사내가 같은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한 명은 국왕의 대리인이고 다른 한 명은 콜럼버스의 대리인이었다. 둘은 다소 무모해 보이는 ‘서쪽으로의 항해 계획’에 합의하는 서명을 했다. 콜럼버스에게는 7년의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산타페 협약에 서명하는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로 알려진 이 문서에는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으로부터 「새로 발견할 땅의 총독이 되고」 「발견한 금, 보석 등 재물의 1/10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교역사업에 1/8 출자할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식으로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는 1451년경 제노바 직조공 집안에서 출생했다. 당시 제노바는 흑해와 소아시아, 이베리아 반도를 연결하며 지중해 중계무역의 핵심 역할을 하던 해상 도시였다. 그는 젊어서 지중해 바다로 진출하여 활약하다가 1476년 우연히 포르투갈에 입국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0년간 서쪽으로의 항해를 구상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데이라를 지배하는 총독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그것은 하층민 출신이던 그가 대양 항해의 경험을 쌓고 국왕에게 가까이 갈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되었다.

마르코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의 애독자이기도 했던 콜럼버스는 1488년 포르투갈의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발견하자 마음이 바빠졌다. 포르투갈보다 지팡구(‘日本國’은 중국에서 ‘지펀구’로 불렸는데,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이를 음차하여 황금의 나라 ‘지팡구’라고 소개했다. ‘Japan’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의 황금을 선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콜럼버스의 달걀_William Hogarth

그는 1485년부터 포르투갈 왕실과 스페인 왕실을 넘나들며 ‘아시아 사업계획’을 제안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렇게 산타페 합의를 이끌어내기 까지 콜럼버스는 많은 일을 겪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의 부부왕 페르난도와 이사벨라를 설득했지만 검토위원회에서 기각되었고, 결국 프랑스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그 절망의 순간에 부부왕은 마음을 바꿔 그의 사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저 유명한 ‘신대륙 발견’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를 통해 그를 알고 있다. 달걀을 깨서 세우듯이 기존의 질서를 혁신적으로 바꾸고 모험심에 불타서 신대륙으로 떠난 항해인으로 그를 기억한다. 하지만 달걀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다. 또 탐험정신으로 무장하고 아메리카를 발견한 위대한 항해가라는 이미지는 후대 유럽인이 인위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먼 바다를 통하여 서쪽으로 항해하려했는가? 당시 유럽인은 태평양, 대서양 등 대양을 항해했던 경험이 없었고 장기간 배를 타는 선원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모험심과 탐험 정신’과 같은 말은 후대 사람들이 만든 추상적이 수사였지 당시 선원들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주검이 흔했던 전인미답의 탐험길을 기꺼이 떠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1241년 동쪽으로부터 홀연히 나타난 몽골족이 폴란드와 헝가리를 초토화시키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후 오랜 십자군 전쟁과 세계 제국 몽골이 만들어 놓은 무역 네트워크는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었다. 동쪽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아랍을 거쳐 유럽까지 문명과 물자의 통로가 막힘이 없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쿠빌라이칸으로부터 패자를 받는 마르코폴로_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속의 쿠빌라이 칸의 이야기나 황금의 나라 지팡구 이야기는 유럽 사람에게 동방을 향한 호기심과 신비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도자기와 비단, 인도나 몰루카에서 오는 향료는 엄중한 회색의 유럽을 호화롭고 생기발랄하게 바꾸는 신비한 물건이었다. 대항해 시대에는 동방에서 유럽 귀족의 손에 까지 12단계를 거친 후추는 원산지 가격의 60배에 이르렀다. 유럽의 귀족들은 비단의 화려함과 향료의 향취에 끝없이 매혹되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_ 메메드2세(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비잔틴제국) 함락

이러한 물건들은 지중해-홍해-아라비아해를 잇는 바닷길을 통하거나 중앙아시아 초원길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1368년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는 외부세력으로부터 빗장을 걸어 잠궜다. 한편 1453년 서아시아의 오스만투르크는 껍데기만 남았던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렸다. 흑해와 지중해는 이제 무슬림의 바다로 변했고 동쪽으로부터 오는 매혹적인 물품과 이야기가 끊겨 버렸다. 이렇게 동서 교역이 차단되자 유럽은 아직 가본 적이 없는 먼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제 육지의 나라와 국경은 무의미해진 반면 바다에서 자연의 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보다 중요해졌다. 

탐험가를 동방으로 이끈 다른 하나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중세적인 믿음이었다.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은 중세 유럽에서 어느 일보다도 중요한 사명이었다.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있었던 십자군 전쟁이나 1492년 끝난 레콩키스타(Reconquista, 711~149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벌인 실지회복 운동)는 이러한 사명의 실천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원받아야 하는 것은 유럽뿐 아니라 동쪽의 나라에도 해당되는 진리였다. 칼 대신 성경을 든 평화의 십자군이 바다로 나갔다. 

콜럼버스 머릿속 한 곳에는 지팡구의 황금이 어른거리고 다른 곳에는 불쌍한 동방의 영혼을 구원할 염원이 불타올랐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악한 이슬람을 피한 서쪽 먼 바다로의 탐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항해한 적이 없는 서쪽의 대양을 어떻게 항해할 것인지 그리고 서쪽으로 계속해서 항해하면 과연 황금의 나라 지팡구나 향료의 나라 인도가 나올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5세기 콜럼버스가 오늘날과 같은 최신의 항해 장비를 갖추고 사실적인 해도에 근거해서 항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중해를 드나들며 마데이라 제도에서 아일랜드와 아프리카로 항해해본 경험이 많았지만 ‘서쪽으로의 항해 계획’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중세적이었다.  

▲ 자료출처:더자유일보_ 1492년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구의(마르틴 베하임)

콜럼버스가 지구를 보는 시각은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의 생각과 성경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지구표면은 주로 육지로 이루어져 있어 대양을 합쳐도 지구 표면의 1/6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기초하여 서쪽으로 멀지않은 바다를 건너면 지팡구와 인도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토스카넬리(Paolo Toscanelli)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다. 즉,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바다는 좁으며 서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항로보다 8000km 가깝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동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먼 바다 한가운데 ‘프레스터 존((Legend of Prester John’, 이슬람권 너머 동쪽에 강력한 기독교왕이 존재한다는 중세 유럽의 전설)이 다스리는 섬에 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객관적 현실 인식보다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다분했지만 당시는 누구나 믿는 상식에 속했다. 
지팡구로 가는 항로에 대한 콜럼버스의 생각은 다소 비현실적이었으나 이를 위한 여건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700년 이상 공존해오던 교류의 장이었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가 맞닿아 있고 지중해의 끝인 동시에 대서양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해상도시를 통해 아랍과 아시아와도 연결되던 곳이었다. 때문에 대양항해에 가장 유리한 지역이이도 했다.

드디어 정확한 방향과 거리를 측정하는데 미흡한 항해 장비와 미지의 바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은 선원들을 데리고 먼 바다로 나아갈 순간이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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