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군주들로부터 배우는 역사의 교훈 '제왕의 리더십']

바끄로뉴스는 2022년 신년을 맞이하여 [성공한 군주들로부터 배우는 역사의 교훈 '제왕의 리더십'] 을 연재한다. 이번 연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역사에서 성공한 제왕들이다. 왕좌에 올랐던 인물들인만큼 충분한 칭송을 들을 만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결코 가볍고 쉽게 군주의 자리를 붙잡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번 바끄로뉴스의 역사 연재에 등장하는 이들은 남보다 더 노력하고 애쓰며 그 자리를 지켰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이들이 다 갖추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타고난 기질과 자질을 계발하여 원하는 목표를 거머쥐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처세와 경영 기법을 보고 배움으로써 경쟁의 파고 속에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받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소서노
소서노

소서노 (1) ‘과감한 결단의 리더십’
             : 큰 길만 보고 달려간 창업자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기원전 6년?)는 우리 역사에서 두 번의 창업 왕국을 세운 위대한 리더다. 그는 2천 년 이전에 이미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한 위대한 멘토였다. 2000년 만에 새롭게 주목받은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왜 그동안 역사에 파묻혀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한반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21세기 여성의 위상이 단군 이래 가장 높아진 지금, 고대사에서 한토막에 불과한 소서노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후대에 전해주는 소서노식 리더십과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SWOT 분석 

약점 요인(weakness) 
: 남편도 없고 자식이 둘 딸린 여인

백제의 시조 온조와 형인 비류왕의 어머니가 소서노다. 그녀는 북부여왕의 서손 우태에게 시집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는데 우태가 죽어 미망인이 되고 난 뒤 혼자 살았다는 것이 백제본기에 전하는 그녀의 기록이다. 말하자면 과부였다. 그것도 자식이 둘이나 딸린. 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그녀는 슬피 울며 남은 인생을 한탄하고 살 팔자(?)였다. 여염집 여인이라면 두건을 쓰고 베옷이나 지으며 자식을 길렀을 터였다. 그것이 소서노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였다. 약점 투성이의 여인, 그녀가 바로 소서노였다. 그 극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해 낸 이가 소서노다. 약점을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은 담대함, 그것이 그녀에게 있었다. 

위협요인(threat)
: 주몽의 둘째 부인, 토사구팽 당할 팔자?

주몽이 여덟살이나 연상이던 소서노와 결혼한 까닭은 무엇일까? 솔직히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배경 때문이었을 게다. 특히 소서노의 아버지가 계루부의 족장이자 상인 출신으로 경제력이 튼튼하다는 점이 컸다. 주몽은 두 번째 남편으로 소서노에게 들어간 과부 결혼이었다. 이것은 주몽이 힘을 얻으면 언제든 토사구팽당할 우려가 상존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우려는 실제로 나타났고 아들 비류와 온조의 생명도 담보받지 못하는 위협요인으로 다가왔다. 소서노로서는 모든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죽은 척 하고 살든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든지 해야 하는 위기 국면에 직면한 것이었다.

강점 요인(Strength)
: 인재를 살피는 예리함과 긍정적인 자신감을 가진 여인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 부여의 계루부 족장이었다. 그는 국경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쥐게 된 기회포착의 대가였다. 그런 아버지 밑에 딸 셋이 있었는데 둘째 딸이 소서노였다. 첫째를 두고 연타발은 왜 그녀에게 대를 이어 상권을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을까? 대부족의 생사권을 쥐고 국경무역단을 운영해 갈 막중한 자리를 둘째 딸에게 쥐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서노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며 진취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소서노의 강점은 바로 넘치는 자신감과 상단간에 무역으로 승리를 쟁취하며 살아온 그녀만의 소통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술이 뛰어나고 상대를 설복시키는 능력도 갖추었다, 거기에 아버지와 주몽이 설득당하고 아들 비류와 온조가 설득당했다. 위대한 협상가의 탄생이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고조선 멸망 후 밟는 곳이 내 땅이 될 수 있었다

고조선 멸망 후 백가쟁명처럼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부족국가들이 힘의 저울추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쟁패의 시절이었다. 고조선 멸망 후 용기와 지혜만 있다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개척의 시기였다. 물론 아무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 죽음을 맞게 되거나 기존 세력에게 밀려 포로가 되어 망할 수도 있었다. 
기회는 움켜쥐려고 노려보는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소서노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주저하지 않았다.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를 단숨에 잡아낼 투지가 그녀에게 있었다는 점은 역사의 창업 기회를 두 번이나 불러 내게 만들었다.

미래의 비전을 품고 업(業)을 세우다  
- 젊은 피 주몽과 결혼을 담판짓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치경제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여러 가지 이설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소서노는 백제 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자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서노의 아버지를 둘러싸고는 여러 가지 이설이 존재한다. 백제의 건국 이야기 중 온조 설화에는 소서노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주몽(朱蒙)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자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졸본부여의 왕이 주몽을 둘째 사위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으며, 부부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류 설화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다가 주몽과 재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후자의 이야기가 정황상 더 설득력있게 보이는 것은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더 자세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남편이 죽으면서 졸지에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소서노.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소서노는 자신에게 임한 삶의 무게와 고통을 안으로만 간직하는 여인은 결코 아니었다. 여느 여인네처럼 살림이나 하고 조용히 파묻혀 있지 않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나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국경무역에 참여하여 이문을 남기고 무역상이 움직일 때마다 직접 현장을 나가 감독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때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피난을 나와 졸본 부여로 망명해 왔다. 기원전 37년 경이었다. 
이 때 활을 기가 막히게 쏘는 신궁에다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젊은이를 보자 소서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두 아이의 엄마이자 나이도 8살이나 많은 연상이라는 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개가를 포기하기에는 여전히 아름답고 가슴에는 혈기가 펄펄 살아 있던 그녀로서는 제 2의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주몽에게서 미래의 이상국가와 강력한 군주에 대한 조감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혈혈단신 남의 나라로 도망쳐 온 주몽으로서는 자신의 배경이 되어 줄 가문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하여 소서노는 주몽과 결혼을 담판지었다.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연상의 여인이 연하의 젊고 팔팔한 총각에게 시집가는 것은 놀랍고 신기한 일로, 입소문을 타고 단숨에 근처 부족들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남편 주몽과 함께 고구려 창건에 뛰어들었다.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안팎으로 비류국 행인국 예족과 동부여 등을 공격하며 정복 전쟁을 수행했다. 주몽도 고구려 건국과 함께 그녀를 어여삐 여겨 왕비로 삼고 그녀가 데려온 두 아들 비류와 온조도 왕자로 삼아 고구려 왕국의 중흥에 힘썼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18년만에 위기로 돌변한다. 이들 부부사이의 문제는 주몽의 첫 번째 부인과 친아들이 등장하면서 불거졌다. 부여를 떠날 때 주몽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던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인 예씨는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임신 중이었다. 주몽은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만일 사내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시오.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둔 유물을 찾아 나에게 오라고.” 예씨는 아들을 낳아 유리라 이름을 지었다. 성장한 유리는 일곱 모로 되어 있는 주춧돌과 기둥 사이에서 부러진 칼 한 토막을 찾아 들고는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이 왕위에 오른 지 19년 되던 해였다. 주몽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예씨가 원후, 소서노가 소후가 되었다. 질서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몽은 소서노에 대한 의리와 신뢰를 생각하면 당연히 비류나 온조를 후계자로 삼았어야 했지만 주몽은 친아들을 내세웠다. 부부의 정치적 갈등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져 왔던 신뢰를 철저하게 깨뜨렸다. 나이 서른에 주몽과 재혼하고 새로운 꿈을 키웠던 소서노로서는 주몽의 처신이 몹시 서운했을 것이고 심리적인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48세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백제 수도의 이전 : 백제는 시대 변화를 적극 수용하여 수도를 세 번이나 옮겼다.
백제 수도의 이전 : 백제는 시대 변화를 적극 수용하여 수도를 세 번이나 옮겼다.

내 삶에 굴복은 없다!
-주몽과의 이별을 통보한 담대함

소서노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은 채 오뚜기 같은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죄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자신의 장래를 고민하던 소서노는 문제의 핵심이 왕권의 후계라면 차라리 여기서 싸울 것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내려 가서 아들들에게 살 길을 찾아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자신의 운명을 다시 개척해 나가기로 결심하고 이를 주몽에게 통보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당시 상황을 비류의 입을 통해 간단하게 기록했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에서 혹처럼 남아 있는 것은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비류가 온조에게 한 말처럼 되어 있으나 소서노에게 주몽이 보은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대목이며 소서노의 세력이 주몽과 비해도 결코 뒤지 않을 만큼 강하고 결코 굽혀 숙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자신의 첫 결혼이 실패했을 때 그랬듯이 기원전 19년에 두 아들과 뒤를 따르는 열 명의 심복, 추종하는 백성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훨씬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소서노가 주몽과 담판을 짓고 창업을 위한 많은 재물을 받아 떠났다고 한다. 그녀는 그러고도 남을 만큼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소서노는 고구려 남쪽에서 자신만의 이상국가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이상국가의 미래상을 조감도로 그려낼 수 있었다.
당시 고향과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고만고만한 부족국가들 간의 쟁패와 곳곳에 좋은 위치를 선점한 낯선 부족과의 전투가 필경 뒤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서노는 꿈을 품었고 한창 패기충만한 두 아들을 격려하고 이들과 싸워가며 남쪽으로 이동해 갔다. 그리고 바닷가 근처 미추홀에 나라를 세우며 이름을 십제라 했다.  
열 명이 보좌하는 충성심과 형제애로 강력하게 무장한 아름답고 건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옛 마한땅이라 불리던 이 지역엔 적들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온조는 땅이 너무 무르고 사방이 열려 위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 남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류는 더 열린 가능성을 생각하며 이곳에서 버티며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쟁론을 벌였다. 주몽과 결별하고 망명길을 나온 소서노는 이제 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의 편을 들어야 하는 운명의 기로에 섰다.  

 

한성 백제 시대를 보여주는 몽촌토성 (백제 위례성이라는 주장과 반대 주장이 팽팽하다.)
한성 백제 시대를 보여주는 몽촌토성 (백제 위례성이라는 주장과 반대 주장이 팽팽하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온조의 편에 섰다. 그리고 비류를 두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위례성에 정착하고 나라를 백제라 칭했다. 한편 비류는 정착이 어려워지자 바다를 이용해 일본땅으로 방향을 틀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류백제의 일본 기원설이 나온 배경이다. 일본 역사책의 행간에는 비류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어쨌든 당시 소서노는 이미 예순을 넘어선 할머니였으나 청년시절부터 보여온 용기와 기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녀를 가리켜 이렇게 칭찬했다.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었다.”

기원전 6년경에 동아시아 최고의 여걸 소서노가 세상을 떠났다. 온조왕은 “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나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요상한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국모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상태이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며 천도를 강행했다. 여장부 소서노의 죽음은 온조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라의 수도를 옮겨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기로 했다. 또 몇 년 뒤 낙랑이 침입해 위례성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백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을 세웠는데, 이 사당에 모신 인물이 소서노였다. 이는 소서노가 온조왕의 어머니를 넘어 백제를 지키는 영웅으로 추종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 백제의 내공을 보여주는 위대한 예술
익산 미륵사지 석탑 : 백제의 내공을 보여주는 위대한 예술

소서노가 현대 여성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 - 소서노 파워

지금에 와서 소서노가 새로 각광받고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론적으로 그녀가 이 신파적이고 비극적인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당당한 자신감으로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작은 어려움에 주저앉지 말고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했으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대화로 소통을 시도한 그녀의 담대한 자신감이 지금 시대에도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소서노식 리더십이었다.
특히 그녀의 강점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감도로 자세히 그려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 꿈을 현실로 바꾸어가는 대단한 추진력도 있었다. 영국의 대처 수상을 상상케 하는 강한 집념의 여인, 그녀가 소서노였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과부가 된 후 집에 틀어박혀 여생을 울며불며 살지 않겠다고 단연코 일어선 용기가 그녀의 강점이었다. 그리고 주몽에게 배신당한 후에도 운명의 가혹한 저주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금 일어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한 그녀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첫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을 데리고 유능한 엘리트에게 개가한 여인이 남편을 도와 대기업으로 회사를 키웠으나 다시금 남편에게서 버림받는 여인이 소서노다. 신파조에서나 나올 법한 막장 드라마 주제 같은 비극적 여인이다. 그럼에도 이 슬픈 드라마의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실패한 나이 많은 여인은 아들 둘을 독려하여 분연히 일어나 새로운 기업을 다시 창업하고 재기에 성공한 후 숨을 거둔다. 
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대화로 문제를 풀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시작함으로써 담대한 자신감과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 소서노의 역사다. 그것이 조그만 어려움 앞에서도 망설이는 우리를 감동케 해 주는 대목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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