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도 무기로 쓴 문무왕
외교적 역량과 열정적 집념을 빛낸 군주가 통일을 이뤄내다

언제부터인가 정치권의 얄팍한 말 한마디가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무릇 정치 지도자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거는 실천이 있어야 하고 천금보다 약속을 귀중히 여겨야 하는 법이다. 그게 안 되니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이 난무한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들은 역사책 읽기를 즐겨야 한다. 고전과 역사에서 배울 교훈이 한 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능지탑지 :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서 문무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안에 고문(庫門) 밖 뜰에서 화장하고 상례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근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신문왕릉(神文王陵) 등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문무대왕의 화장지(火葬地)라는 주장이 있다.
능지탑지 :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서 문무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안에 고문(庫門) 밖 뜰에서 화장하고 상례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근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신문왕릉(神文王陵) 등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문무대왕의 화장지(火葬地)라는 주장이 있다.

문무왕(文武王, 626~681)은 신라 통일을 완수한 전설적인 리더이다. 제30대 왕으로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당나라와 힘을 합쳐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함으로써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문무왕으로부터 100년 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져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아랍과 서양에까지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고구려 고토를 채 수복하지 못한 불완전한 통일,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잔꾀 등으로 그를 역사적으로 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를 모르는 이들의 안줏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삼국시대에 도대체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기나 한 줄 아는지... 문무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삼국의 통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백제와 고구려 군주의 통일과업에 대한 열망과 생존 역량이 그보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문무왕의 지혜와 빼어난 리더십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문무왕 감은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55-1번지에 소재한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문무왕 감은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55-1번지에 소재한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망국 백제 유민들의 반란에다 야마토 정권이 동맹군으로 나섰다 

서기 661년 무열왕 김춘추의 태자로서 소임을 다하던 김법민은 드디어 문무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등극 원년 8월에 당나라와 호응하여 고구려 원정을 나갔다가 백제 유민들이 공격하여 진로를 차단당한다. 문무왕은 이처럼 백제 부흥군에 상당한 몸살을 앓았다. 특히 복신 등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불러 올려 왕으로 옹립하고 각처에서 심각한 반란을 일으켰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망국으로 몰고 갔지만 사실 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의 승리에 불과했다. 넓은 백제땅 전체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탓에 일부 지역과 계곡, 요새지역 등을 중심으로 백제의 유민들이 속속 집결돼 있었다. 당나라 소정방의 정예군조차 이들을 이기지 못하여 패퇴할 정도로 군기가 엄하고 질서가 정연했으며 점점 병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으로 왜의 야마토 정권이 대군을 일으켰다. 백제의 옛땅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사이메이(655-661년) 여왕과 태자 덴지(662-671년)는 규슈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 작전을 진두지휘하며 승전을 독려할 정도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위협요인(threat)
: 당나라 군대, 시커먼 야욕을 드러내다

당나라 고종은 휘하 장수 소정방에게 백제 옛땅에 군사를 잔류시키도록 명했다. 원래 나당 연합군이 출범할 때는 백제는 신라가 차치하고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복안이었다. 뒤이어 당 고종은 다시 백제의 주요 거점 지역에 도독부 다섯을 설치하고 왕문도를 내 보낸 후 다시 유인궤를 파견 지휘토록 했다. 게다가 신라마저 병합하려는 의도로 신라를 계림주 대도독부로 편제를 정하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작태를 보였다. 여기에 또 문무왕 4년에는 백제 유민을 무마한다는 명목 하에 백제 왕자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신라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다시 당 고종은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 주요 거점에도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름 하여 7년 간의 나당전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급기야 당나라는 문무왕을 파직하고 동생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세워 군주마저 갈아치우려는 노골적 침략행위를 보였다. 문무왕의 통치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강점 요인(Strength)
: 타고난 전략가, 외교력으로 당나라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문무왕은 군주가 되기 전에 이미 많은 전투를 통해 산전수전의 산 경험을 두루 갖추었다. 그는 이미 진덕왕 시절, 왕의 신하로 당나라에 건너가 활동하며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고 당나라의 국방력과 힘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당나라 인맥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알아가면서 당나라의 약점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신라왕의 장자인 김법민(문무왕)이 당나라 황제를 찬양하는 오언시를 가져온 것에 대해 당나라측 지도부가 그를 좋게 보고 환대한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이미 김법민은 당나라 황제를 세치 혀로 마음대로 주무를 줄 아는 외교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또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진격을 시작했을 때 덕물도로 나가 병부령으로서 소정방과 전략회의를 가졌다. 그 경험은 후일 나당 7년 전쟁에서 당나라 전술전략을 이해하고 미리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또 야전사령관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해 전장의 처참함과 백성들의 눈물도 깨달아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기에 군주가 된 후에도 그는 늘 야전 현장에 나가 군사를 독려하고 승전을 거머쥐었다. 21년의 삶 거의가 전투중이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김유신을 기용, 막강 당나라를 물리치다

문무왕을 지켜주는 놀라운 지지세력으로 바로 김유신이 있었다. 문무왕의 외숙부 김유신은 무장이었지만 지략과 술수가 대단히 뛰어난 장수였다. 삼국통일의 영웅을 꼽자면 당연히 김유신이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김유신이 가장 먼저이면서 집필 분량도 가장 길다. 그는 가야계로서 신라의 지도층에 편입되기는 어려운 신세였다. 하지만 무열왕 김춘추에게 누이를 시집보내는 도적 혼사 이벤트로 단숨에 무열왕의 오른 팔이 되었다. 그야말로 전투의 신이라 불릴 만한 김유신이 외숙부로 존재하는 한 문무왕은 전장에서 진격과 승리만 외치면 승전을 거머쥘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당나라는 문무왕에게 속내를 번번이 간파당하여 나당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이는 신라 지도부에 결국 당나라는 손을 들고 말았다. 문무왕 김법민에게 드디어 통일군주의 명예가 기회로 다가온 것이었다.  

선천적 재능에 열정을 입히다
-문무 통합형 인재가 문무왕이었다

아버지 김춘추, 어머니 문명왕후, 외숙부 김유신... 그들의 장점을 각각 뽑아내 비빔밥을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김법민, 즉 문무왕이다. 김법민은 아버지 김춘추로부터 교활하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탁월했던 처세술과 사교성을 물려받았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꾀를 내어 일찍이 김춘추와 결혼을 이루어 낸 총명한 지략을 물려주었다. 거기에 외갓집, 가야계의 피를 이어 받아 김유신의 뚝심과 전략적 지혜, 예리한 상황 판단력 등을 전수받았으니 과연 한반도에 그 만한 인재가 더 이상 없었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런 선천적인 재능보다 더 뛰어난 것이 그에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끈기와 열정적 집념, 그리고 해 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문무왕을 문무통합형 인재로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청년 시절을 삼국간 전쟁과 외교전, 정치적 분란 속에서 보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냈다. 특히 650년 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벌여 당 고종에게 대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은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대부경은 차관직 정도의 자리였으니 당 고종은 이미 김법민의 사람됨을 보고 걸출한 자리를 하사한 셈이었다. 이 외교전에서 김춘추의 뒤를 받치며 당나라의 전술적 지원 요청을 성사시킨 김법민은 당나라의 앞선 제도와 문물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그 때만 해도 자신이 통일을 이끌 왕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라가 삼국끼리 싸우는 통에 당나라처럼 발전하고 부흥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삼국 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로 언제 적들로부터 침략을 받아 나라가 위기에 처할지 모르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심진력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열혈 애국 청년이었다. 그러나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위상이 달라졌다. 655년에 파진찬으로 병부령(兵部令)이 된 뒤 곧 왕태자에 봉해졌다. 이제 명실상부한 신라 최고의 지도자가 될 참이었다.

세계 최강 당나라를 붙잡다
- 대당외교전에서 백제를 눌러 이긴 앞서가는 능력

숙적인 고구려와 백제를 몰아내는데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이후 김법민은 660년(무열왕 7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구성, 백제를 공격하기로 하고 자신도 외숙부 김유신과 함께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웠다. 백제군의 맹렬한 저항을 이겨낸 그는 이윽고 백제를 멸망시키자 다시 숨도 돌릴 틈 없이 661년 군사를 정비하여 당나라를 설득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 전쟁의 치열한 와중에 아버지 태종 무열왕이 승하하자 김법민은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숨가쁜 전개 속에 그는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나당 동맹군의 결성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고 무열왕과 문무왕의 외교적 성공이다. 왜냐 하면 백제 역시 당나라와 깊은 외교적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백제와 신라의 분쟁을 조정하려고 나선 적조차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백제는 신라에 비해 당을 설득하는 외교적 노력이 부족했거나 미숙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무왕은 신라와 당은 직접적으로 국경이 부딪칠 우려가 없다는 사실을 당나라 조정에 각인시켰다. 백제와 당나라는 바다를 거너긴 하지만 국경이 맞닿아 있어 언제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될 소지가 컸기 때문이다. 이런 외교적 노력으로 나당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문무왕은 진덕왕과 무열왕 때 이미 당나라로부터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신뢰를 심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당 외교의 성공이 삼국 통일의 초석이 된 것이었고 그 이면에 김법민 즉 문무왕의 개인적인 외교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말 안장에서 21년간 살았다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 선 현장형 리더십

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당나라를 움직여서 재위 6년째인 666년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 668년 한반도 최고의 국력을 가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한반도 구석에 자리하여 가장 문물의 발달과 국력이 약했던 신라로서는 놀라운 변신이었다. 문무왕은 삼국 통일과 신라만의 자주적 한반도 운영이 최종 목표였고 당의 힘을 잠시 빌린 것뿐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신라는 통일을 준비한 나라였고 백제와 고구려는 통일을 이루기에는 내분이 겹친 데다 정치적 준비와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당 전쟁은 7년간 치러졌다. 당나라는 백제가 망하자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시커먼 속을 드러냈다. 우선 백제 유민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기 시작해 백제의 옛땅을 차지하려 들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 후 671년 문무왕 11년 드디어 나당 간의 대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문무왕은 당나라 군의 약점을 파고 들었다. 먼 길을 배를 타고 육지로 들어온 당나라 군은 보급이 문제였다. 병참루트가 너무 길어서 곳곳에 위험 요인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이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육로와 해로로 쳐들어온 온 당군은 4만 여 병력으로 육로로 평양을 거쳐 황해도 지역으로 진입케 하고 또 해로로는 70 여척의 대형 선단을 보내 이들의 식량을 조달케 했다. 이에 맞서 신라군은 수군이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다가 적을 쳐부수고 식량을 태웠으며 인근 주둔지의 벼를 태우는 소이 작전으로 당군의 먹거리 조달을 없애버렸다. 

크게 패한 당군은 물러 갔다가 다시 대군을 이르켜 왕 12년에 쳐들어 왔는데 문무왕은 패색이 보이자 얼른 화해책을 내밀었다. 이전 전투에서 사로잡은 장수와 사병들을 귀환시키고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며 조공사신을 내보내 전투를 끝내게 했다. 문무왕 15년과 16년 당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22회나 계속 벌이는데 결국 많은 손해를 입고 물러났다. 드디어 677년 한 손으로 칼과 한 손으로 화해를 내민 문무왕의 시도가 받아들여져 당나라 군은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만주로 옮겨가면서 신라와의 전쟁을 끝냈다.   

백성을 하나로 묶어 내는 지도력
-위대한 승려와 대형 불사로 신라인의 혼을 하나로 통일하다

민심이 갈라지면 하려는 모든 통치력이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첫째는 백성들의 정신무장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불교를 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로 몰아갔다. 여기에 문무왕을 돕는 큰 도우미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의상과 원효라는 한반도 불교사에 길이 기억될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문무왕의 지지세력이었다.

난세에 국민들은 뭔가 의지할 곳을 찾는 법이다. 나라가 온통 전쟁중이고 도처에 죽어자빠지는 군사와 부상병들이 가득한 신라였다. 일이년 전쟁이 아니라 수 십년 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구차하고 절망밖에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젊은 시절부터 전장에서 참혹한 광경을 자주 보고 백성들의 절망을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해 줄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을 제시할 그 무언가를 반드시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때마침 필요에 따라 나타난 두 사람의 승려가 있었으니 바로 의상과 원효였다.  의상과 원효는 신라 불교의 양대 기둥이자 산맥과 같은 존재다. 여기서 의상이 주류였다면 원효는 이단이고 비주류였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길에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깊은 깨달음을 얻은 후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세상을 떠돌기도 하고 요석공주와 합방하여 신라 최고의 석학 설총을 낳았다. 그의 가르침은 서민들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 신라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문무왕은 이들 두 승려의 불교 확산 아래 사찰과 국방력을 한데 묶어 호국 불교로 활용하게 했다. 그는 끊임없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만들어 이를 비축하게 했는데 경주 사천왕사지와 무장사지 등이 그런 용도로 쓰였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나와 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생전인 675-679년, 애초부터 나당 전쟁의 전초기지로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라에서 전쟁이 가장 많았던 7세기에 사찰들은 정신무장의 터전 뿐 아니라 식량 보급소였고 전투의 전진기지였다. 승려가 첩자로 나서고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군사들이 묵기도 했다. 사천왕상을 조각한 전을 내세운 사찰은 이미 그것 만으로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명랑 법사 이야기는 삼국유사가 전하는 호국 불교, 전투 불교의 백미다. 통일 후 675년 당나라 대군이 신라를 노리고 쳐들어오자 왕의 명령으로 명랑법사가 우선 경주 낭산 아래 절터를 잡고 12명의 스님들과 '문두루 비법'을 설파하여 풍랑으로 당나라군을 모두 물리쳤다는 것이다. 679년 문무왕이 이곳에 사천왕사를 준공한 이유란다. 
또 경주 감포의 무장산 계곡속에 문무왕의 무기들이 감추어진 무기고를 두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에 '무열왕이 이곳에다 무기와 투구를 갖다 두었다.'고 나와 있다. 승려와 왕과 백성이 혼연일체가 된 결과 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100년 평화를 만들어 내다
-사후에까지 통일 왕국의 안정을 기원하고...

대동강 원산만 이남의 땅만을 차지하는, 부족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사후에도 100 여 년 간, 국내외적으로 안정된 평화의 시기를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영민한 군주였다. 무엇보다 그가 뛰어난 점은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던 반란 세력을 말끔히 잠재웠다는 점이다. 이는 당나라와의 영토 전쟁에서 백제와 고구려 부흥 운동에 나선 세력을 적극 지원하여 전쟁에 임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적절히 포상하여 불만 세력을 잠재움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인 무량수전과 조사당(祖師堂)이 있고 아미타여래 좌상, 삼층 석탑 따위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인 무량수전과 조사당(祖師堂)이 있고 아미타여래 좌상, 삼층 석탑 따위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또한 당나라의 군사적 정치적 제도를 도입하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함으로써 하드웨어적인 통일의 외부적 기둥을 튼실하게 만들어 두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삼국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원한을 잠재울 뭔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676년 의상(義湘)대사로 하여금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는 등 불교를 적극적으로 권장,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여냈다. 

그리고 껄끄러운 당나라에는 견당사를 파견, 당과의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생애까지 통일 신라의 사수에 목숨을 걸었고 681년이 되자 자신의 생애가 다한 것을 알고 화장할 것을 명한 뒤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安葬)토록 하였다.

 

문무왕 수중릉 – 감포 앞 대왕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을 보여준 문무왕 수중릉으로 전해진다.
문무왕 수중릉 – 감포 앞 대왕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을 보여준 문무왕 수중릉으로 전해진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대왕암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가 되어 있다. 지금 동해 바다에는 한국 최초의 스텔스 구축함인 문무대왕함이 2003년 진수돼 삼국통일을 이루고 동해의 용이 되어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의지를 계승하고 있으니 그의 유언은 1천 4백년만에 현실이 된 셈이다.

핫 이슈
최종 해결사 문무왕

삼국통일의 의미를 되새길 때 가장 큰 공헌자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진다. 필자도 마찬가지고 독자 분들도 보통 김유신을 떠 올린다. 김유신도 큰 공헌을 한 리더임에는 틀림없다. 무장으로서 지혜와 용맹을 두루 펼치고 계백의 백제군을 물리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으며 소정방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주체성을 지킨 장수다. 특히 가야계로서 자칫 홀대받을 수밨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문무왕의 외숙부로 무열왕의 동지로 삼국통일에 기여했다.

무열왕은 또 어떤가? 그는 당나라와 협상하러 들어갔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고구려에 붙잡혀 갖은 고생을 치르기도 한 인물이다. 실제적으로 삼국 통일의 기치를 세워 많은 것을 이루어냈고 백제를 멸캉시켜 통일의 첫 발을 떼게 했다. 

그러나 문무왕이 없었다면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문무왕이야말로 진정한 통일의 리더였다. 앞의 두 사람이 분위기를 만들고 첫 발을 뗀 인물이라면 문무왕은 이를 완수한 최고의 리더다. 무열왕 김춘추가 실패한 대당 외교를 성공으로 마무리지었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몇 배나 국력이 앞선 당나라의 야욕을 꺾고 무력과 외교의 적절한 혼합으로 화해를 얻어냈다. 그야말로 전투와 외교의 전문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에서 왜구를 막겠다고 기염을 토했던 용기와 도전의 리더였다. 그가 서쪽이나 북쪽을 경계하지 않고 동쪽을 경계하려던 의도는 무엇일까? 더 이상 당나라나 백제 고구려의 유민이 신라를 넘보지 못하게 자신이 확실히 정리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 아마도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문무왕이 직접 병력을 끌고 일본 열도를 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무왕, 그의 도전 정신과 용기, 자주적 리더십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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