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식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했던 전술전략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다!!
한반도 최고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5~413)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꿈을 펼쳤고 실제로 가장 큰 영토를 거느렸던 군주는 광개토대왕이다. 

한반도의 영역을 만주에서 중국 본토로까지 확대했던 광개토대왕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반에 걸쳐 동아시아에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거대한 영토와 병력, 물자, 인구를 자랑하던 만주와 중국대륙의 숱한 제후국들을 거친 말발굽과 칼바람으로 잠재우고 스스로 천하의 주인이라고 외쳤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중국이 온갖 거짓과 왜곡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있지만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은 지워질 수가 없을 것이다. 연재 4회는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릉 : 가까이 가 보면 그 규모와 웅장함에 놀라게 된다. 동북공정의 여파로 중국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고 공공연하게 중국 역사속에 편입하려 하고 있지만 남북한 역사학계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릉 : 가까이 가 보면 그 규모와 웅장함에 놀라게 된다. 동북공정의 여파로 중국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고 공공연하게 중국 역사속에 편입하려 하고 있지만 남북한 역사학계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 독립기념관의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의 탁월한 업적을 기리고 동북공정을 시도하는 중국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국내에서도 이 비의 실체를 살필 수 있게 독립기념관에 그 모형을 새로 세운 것이다. 높이 6.39m 무게 38톤에 이르는 이 비는 고구려사의 위대한 역사적 증거가 되고 있다. 원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세워져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 독립기념관의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의 탁월한 업적을 기리고 동북공정을 시도하는 중국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국내에서도 이 비의 실체를 살필 수 있게 독립기념관에 그 모형을 새로 세운 것이다. 높이 6.39m 무게 38톤에 이르는 이 비는 고구려사의 위대한 역사적 증거가 되고 있다. 원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세워져 있다.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끝없는 전쟁에 고립무원 식량난까지 겹치다

광개토대왕이 등극하기 전만 해도 동서남북으로 사방이 적인데다 민심은 술렁거리고 엎친데 덮친다고 가뭄이 계속돼 식량 사정이 최악이었다. 소수림왕 8년에는 가뭄이 극심하여 서로 사람끼리 잡아먹는 참상이 나타났고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 6년에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이러한 거듭되는 식량난과 무관하지 않다. 곡창지대의 확보가 없으면 당장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은 태자 시절부터 이런 참상을 바라보며 부국강병의 꿈을 간절히 키워왔다. 

위협요인(threat)
: 혼란에 빠진 동아시아, 절대 강자가 없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무렵에 동아시아 정세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중국은 전진이 멸망하고 난 다음이라 절대 패자가 없는 형편이었다. 후진 후연 서진 서량 등 중국의 북방은 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전란과 쟁패가 끊이질 않았고 남쪽에선 동진이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세를 떨치고 있었다. 백제는 가야와 왜와 손잡고 고구려의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일어서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강점 요인(Strength)
: 강온 양면 전략을 적절히 구사하다

광개토대왕은 멀티 플레이어였고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그는 육군의 지도자였지만 수군을 너무도 잘 아는 리더였다. 이 때문에 수륙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전략가로 직접 전쟁의 최전선에 나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이끌어가는 기관차형 리더십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평화를 생각하여 양손에 강온 양면 전략을 적절히 구사했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가 무력만 사용하여 정복전쟁만 수행한 무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오히려 문을 숭상하여 글과 제도와 시스템을 우선했다. 그는 이런 보기 드문 전방위적 리더십을 소유한 영웅이었기에 한반도 최고의 정복 군주가 된 것이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후방의 신라를 적절히 활용했다 

광개토대왕은 4국 가운데 가장 늦은 신라를 협력 파트너로 삼았다. 빛나는 선택이었다.
신라는 왜와 가야가 손잡고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신라와 백제는 대놓고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왜는 신라를 대놓고 압박하고 있었고 백제는 이를 후원하는 모양새였다. 신라 역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다보니 남하정책을 간절히 원하는 고구려와 동병상련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손을 내민 것은 신라가 먼저였다. 신라는 고구려마저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적극적으로 화친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서는 신라를 치지 않고도 협력하는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충주 중원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로 높이 203㎝, 너비 55㎝이다. 
충주 중원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로 높이 203㎝, 너비 55㎝이다. 

익숙한 것은 모두 버려라 !!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데 길들여진다. 4세기 중반 동아시아 거의 모든 나라는 중국에 복속됨을 당연히 여기고 중국을 천자의 나라라 불렀다. 중국은 천자의 나라로 모든 제후국을 다스리는 위치로 올라서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달랐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익숙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갔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만 봐도 천하주권 사상이 고구려 지도층의 자랑이고 긍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체의 철학으로 무장한 그를 당할 자는 없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대왕의 위력이 사해四海에 떨쳤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 천하 주권사상이야말로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에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하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의 생존 시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정복전쟁을 즐거이 받아들여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전사적 이미지와 내정에서의 안정을 거두어 낸 평화적 이미지를 함께 담은 말이다. 

18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39세 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평화로운 궁궐보다 말안장에서 적과 싸우며 지냈다. 그는 결코 한 곳에 머무르며 평안함에 익숙해지려 하지 않았고 적과 타협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청야작전을 전개, 적들이 공략해 오면 식량과 물자를 모두 없애버리고 보급로를 끊어 장거리 작전에 피로한 적들을 쉽게 공략했다. 다시 말해 광개토대왕은 이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리더였다.

 

구리시 고구려유적박물관 : 구리시 아천동 시립 고구려유적 박물관
구리시 고구려유적박물관 : 구리시 아천동 시립 고구려유적 박물관

안장서 내린 적이 없을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아버지 고국양왕은 맏아들 담덕을 12살에 태자로 세웠다. 6년째 되던 해 고국양왕이 지병으로 숨지자 광개토대왕은 18세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주변 4국과 중국을 상대하기에는 어렸지만 그는 준비된 군주였다. 

그가 먼저 내치의 안정을 주도한다. 정복전쟁의 수행 과정 전에 내치부터 중시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다고 기록이 나타나 있다. 체격이 큰 점은 고대 전쟁 수행에서 가장 큰 장점이다. 뜻이 고상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여색을 밝히거나 명예를 좋아하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할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검약하고 학문과 무술을 숭상하며 나라의 안녕에 도움이 되는 일에 전력을 다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나아갈 때 물러갈 때를 아는 지도자

그는 어떤 제왕보다 전쟁을 시작하고 멈추는 타이밍을 제 때 맞추어냈다. 그것도 기존 전술적인 관행을 버리고 늘 새로운 전법과 진로를 택했다.

미처 적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직 적들이 준비되지 않은 시기에 진군 나팔을 불었다. 비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보라가 날리는 날 오히려 전쟁을 시작했다. 광개토대왕은 그런 때일수록 적의 긴장이 풀어지고 준비가 무디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기습전을 벌였고 그 때마다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이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했다. 이 전쟁에서 그가 돋보이는 것은 전력의 적절한 배분이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략한 것은 북방의 적과 싸울 때 후방의 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신라에서 백제 와 가야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할 조짐이 있다며 도와달라고 요청해 왔던 것이다. 392년 7월 왕은 과감하게 군사를 일으켰다. 자칫 남진정벌을 시도하다가 북방의 적에게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군사를 동원했다. 

광개토대왕은 이 때 전광석화처럼 백제를 공략하여 10개 성을 함락시키자마자 주둔군 일부를 남겨둔 채 병력을 서둘러 북진토록 명했다. 4만의 군사 가운데 대부분을 휘몰아치듯 북쪽으로 몰고 가는 대왕의 리더십을 상상해 보라. 

아마도 참모들이나 군사들은 승전의 기쁨도 누리기 전 포상도 해 주기 전에 병력을 급하게 올려보내는 왕의 처사가 섭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 싸움에서 광개토대왕은 한 수 위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미 거란족들이 고구려 주력군의 남하를 알아차리고 변경에 들어와 1만 명이나 되는 고구려인을 잡아간 것이었다. 거란 본토로 고구려군이 빠르게 진군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자 거란군은 전쟁도 해 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수가 아니던가. 광개토대왕은 거란군에 맞서 싸우지도 않고 잡혀간 포로들을 다 찾아온 동시에 거란인 포로 5백 명을 얻는 승전을 거두었다.

놀라운 것은 다음 수순이었다. 9월에 거란을 치러 올라온 고구려군을 광개토대왕은 다시 서둘러 남하시켰다. 몇 달 사이에 한반도를 남북 종단시키는 지독한 강행군이었다. 백제군은 거란과 싸우러 올라간 고구려군이 다시 내려오려면 반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두 달만에 관미성으로 내달아 온 고구려군은 쉬지도 않고 한 달음에 성을 공략, 20일 만에 함락시켜버렸다. 

관미성의 위치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백제가 경영하던 변경의 요새로 중국에 있었다는 설부터 파주의 오두산성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파주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지목한 바 있다. 한편 강화도를 지목한 학자들도 많은데 교동 근처를 관미성으로 보아 백제가 이 싸움에서 크게 기가 꺾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광개토대왕은 유난히 수전水戰을 잘 활용했는데 백제의 관미성 싸움이 그 대표적인 전투였다고 평가된다. 전하기로는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이며 바다로 에워싼 곳이라 천하제일의 수비성이었으나 광개토대왕은 정예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동력 있는 육군과 날렵한 전함을 주축으로 한 수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파상적인 공격 끝에 20여 일만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관미성의 수성전략으로 백제를 밀어붙이다 

관미성을 빼앗긴 백제로서는 턱밑에 적이 주둔하는 데 대한 두려움에 몇 번이나 관미성 수복 전쟁을 일으켰다. 백제 아신왕은 393년 8월에 1만의 병력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다음 해 7월에는 수곡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수곡성은 황해도 신계 땅이다. 관미성의 후방을 끊어 숨통을 죄겠다는 생각이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광개토대왕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아예 7개의 성을 더 쌓아 백제군의 진입자체를 막아버렸다. 대왕은 다시 직접 친정에 나서서 다음 해에 백제군을 공격, 패수에서 8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파했다. 백제는 역부족을 느끼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항복하고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백제는 쉽게 굽히지 않았다. 백제는 회복을 위해 왜(倭)의 병력을 동원하고 399년에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또 404년에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하며 도발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모든 도전을 광개토대왕은 쉽게 물리쳤다. 백제의 도전에 5만의 병력을 신라에 파견하여 몰아냈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고, 나아가서 407년에도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굴복시켰다. 
이 전쟁으로 그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 남쪽의 후환을 덜어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내다본다

높이 더 멀리 내다보는 이가 세상을 더 크게 지배하는 법이다. 광개토대왕은 스스로의 정복전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정복전쟁이 멈추면 적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들이 기습한 전쟁은 반드시 보복전을 펼쳐 함부로 적이 기동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눈앞의 적보다 더 멀리 있는 적을 경계하고 이들을 공격해 무릎을 꿇렸다.

광개토대왕은 그가 정복하기를 꿈꾼 곳마다 정복의 깃발을 꽂았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전쟁 기사 마지막에는 그가 수많은 정복전쟁 후에 1,400개 촌락을 지배한 위대한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은 북방 공략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국내성에서 서쪽으로 후연을 공략하고 이보다 훨씬 먼 거리에 있던 거란을 공략, 정복전쟁을 수행했으며 북쪽으로는 숙신을 공략하여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 동쪽으로는 동부여를 공략,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기습적인 침략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구체적으로는 서쪽 전쟁에서 397년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하고 410년 동예를 통합했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희가 쳐들어오자 이를 반격하여 신성新城과 남소南蘇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했다.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했다. 

동쪽 전쟁에서도 410년,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격, 성을 파괴하고 점령함으로써 동부여 지역 전체를 장악했다. 407년 2월에는 평양의 동환성 및 평양성을 증축하고 백제의 공격 의지를 크게 낮추었다.

이로써 그가 정복한 지역은 남쪽의 예성강 충주 영일만을 잇는 경계선, 동쪽으로는 연해주 지역 전체, 북쪽으로는 흥안령 산맥 북부지역의 흑룡강까지를 아우르는 북만주벌판 전체, 서쪽은 요하의 넓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제왕들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장악한 영웅으로 길이 남았다.

외정 못지 않은 내정을 완성한 지도자 

흔히 외정을 성공한 군주나 장군들에게 공격적 리더십만 조명하는 습관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런 면에서 내정도 성공적으로 리드한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재위 2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많은 세월을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에 내정은 맡기고 내버려두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내정에 관심을 갖고 주요 정책을 수행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서 내정은 반드시 안정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업적은 광개토대왕비문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광개토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평양천도를 준비하게 했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정비의 성공을 증거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광개토대왕은 또 적이었으나 귀순한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410년 국력이 쇠약해지던 동부여를 정벌하고 조공을 약속받았으며 이 때 귀순한 주요 귀족들을 모두 품에 안았다. 위서(魏書) 고구려 전에는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 장수왕 대에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기록한 보고서가 눈에 띈다.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 여리 떨어진 곳으로 동쪽으로는 책성(柵城),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민호의 수는 전 위나라 때보다 세 배나 많았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 여리이며 남북은 1천 여리가 된다.” 

대단한 강역을 영토로 만들어 낸 한반도 최고의 영웅, 동아시아의 알렉산더로 불리던 광개토대왕, 그는 이렇게 열린 가슴으로 나라를 이끌다가 413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갑자기 죽음을 맞음으로써 그의 꿈을 접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못다 이룬 꿈은 맏아들 장수왕이 이어받아 고구려 최대의 강역과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영웅의 이름은 이렇게 길이 역사에 남았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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