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를 준비한 승부사 태종 이방원
‘피와 눈물과 비난은 내게 돌려라’ 

지난 연말부터 TV드라마 시장에 정통 역사 드라마가 소개되면서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받은 작품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대체로 필자의 <제왕의 리더십>은 연대기순으로 집필해 왔는데 이번 호에는 특별히 관심을 모았던 조선 태종 이방원의 삶을 재조명해 보고 드라마로서 피할 수 없는 허구적 전개를 벗어나 진실에 가까운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태종 이방원(1367-1422)은 조선왕조의 창립이라는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그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게 하고 2차례나 왕자의 난을 벌여 피를 나눈 형제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바람에 잔인한 군주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전후사정과 조선 초기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그로서는 경쟁자들을 이기고 왕조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역동적인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진면목을 살펴 보자.(편집자 주)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능 - 헌인릉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능 - 헌인릉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정통성이 부족했던 군주, 힘으로 뺏은 왕위가 아니었던가 

태종 이방원의 한계는 이방원의 쿠데타를 근거로 한다. 특히 정국을 주도해 오던 태조 이성계의 공신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왕은 왕이되 충심으로 굴복하지 않는 신하들을 데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태종의 정치 싸움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신민과 백성들 사이에 생기게 했다는 것은 스스로 왕위에 오른 성공한 쿠데타의 주체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이자 약점이었다.

위협요인(threat)
: 정적 앞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도전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이방원의 결정적인 위협요인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점이다. 그는 고려 충신 정몽주를 주살하는데 앞장섰기에 고려의 부흥세력으로부터 암살 순위 1위에 올랐고 정도전이 주도하던 신권세력을 압살해 공포의 대상이 됐다. 2차 왕자의 난으로 다시 골육상쟁을 일으켜 피비린내나는 정쟁을 벌인 것도 그이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처남들까지 모두 죽여 없애고 맏아들 양녕대군조차 폐위시키는 강수를 던졌다. 
그러면서 의심도 많았고 정적이 많음에 따라 노심초사하면서도 이를 감추려고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 성격이었다. 

강점 요인(Strength)
: 전략가적 기질, 승부사의 집념이 넘쳐 흘렀다

태종 이방원의 강점은 문과 급제자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무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어릴 적부터 많은 사병들을 통솔하고 이들을 손발처럼 부릴 수 있는 리더십이 있었다는 점이다. 흔히 이방원이 무식한 싸움꾼이라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타고난 전략가였고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승부사 기질도 농후했다.

정몽주가 말에서 떨어진 아버지 이성계를 병문안 왔을 때 그는 이미 정몽주의 야망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없어지지 않고는 아버지가 왕권에 도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 대신 정몽주를 암살해 버린 것이 그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조차 그의 실력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자신을 잘 아는 아들 이방원을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는 승부를 걸어야 할 때 전력을 다해 올인했다. 그리고 권력을 놔야 할 때 기꺼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국방에 관한 것은 세종의 힘이 클 때까지 상왕이 되었어도 놓지 않았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정무적 감각을 갖춰 명나라와 호혜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여느 사대부처럼 명분에 휘둘리지 않았다. 지금도 중국은 한반도 안정에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건 조선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떠오르는 해 명나라를 무시하고 지는 해 원나라를 좇다가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태조 이래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주의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호혜 관계를 유지했기에 특별한 갈등이 없는 편이었다. 이런 외교적 평안 덕분에 조선은 국내 안정적인 정권 창출과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여진을 비롯한 북쪽 변경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에 태종은 상왕이 된 후 세종으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마도 정벌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타고난 실력

그가 가진 강점은 시대의 변화를 읽을 줄 아는 식견이 있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창업 과정과 영락황제의 집권 과정을 지켜보며, 실력과 힘을 갖추지 못한 군주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현실을 깨달았기에 이복동생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가 넘어가자 왕권의 약화와 창업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아직 고려의 구신들이 호시탐탐 왕씨 정권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고 태조를 둘러싼 외척과 정적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 때 과감하게 일어나 형제와 외척들까지 축출하고 정종을 임금으로 세웠다가 다시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혹자는 그를 아버지 이성계와도 불편해질 정도로 왕위만 차지하는데 관심 있었던 인물이라지만 그것은 일면만 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가 피땀흘려 세운 조선을 흔들리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왕권이 구축되었다고 판단하자 그 스스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8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그는 안으로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 명나라 및 여진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세종의 치적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모를 가려 뽑을 줄 아는 출중한 눈
-이숙번을 버리고 하륜을 책사로 세우다

이방원의 참모 가운데 두 사람의 인물이 눈에 띈다. 한 사람은 이숙번, 또 한 사람은 하륜이다. 이 둘 가운데 태종 이방원을 진정으로 도운 자는 이숙번 쪽이다. 이숙번은 이방원을 도와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공신 중의 공신이다.  

 

이숙번 묘소
이숙번 묘소

이숙번은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1398년 안산군지사(安山郡知事)로 있을 때 이방원을 도와 경복궁에 병력을 출동시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이방원의 정적을 제거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1400년 박포(朴苞)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출정, 진압해 명성을 떨쳤다. 그는 후일 의정부지사, 지공거, 1413년의 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 좌찬성까지 거침없이 승진했다. 그러나 태종은 그를 버렸다. 심지어 탄핵을 하고 1417년 경상도 함양에 유배했다. 

 

하륜 묘소
하륜 묘소

하륜은 고려 공민왕 14년에 열 아홉에 급제, 고려와 조선을 다 섬긴 인물이다. 고려조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하륜은 이방원의 혼인잔치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를 필요한 인물로 알아 봤다. 

후일 하륜은 정도전이 태조를 설득, 한참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하륜은 멀리 충청도에서 왕자의 난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무력을 행사하는 거사의 핵심인물은 이숙번이었다. 1398년 8월 26일 밤, 그믐에 가까워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이방원은 이미 서울에 올라와 있던 이숙번과 그의 수하 및 처남과 종자들을 데리고 거사를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방번, 매형 이제 등을 모두 숙청했다. 세자의 자리는 제 2왕자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에게 넘겼지만 정국의 주도권은 이방원이 잡았다.

그런데 이숙번은 자신의 힘을 믿고 거들먹거리며 권력을 즐긴 반면 하륜은 더욱 겸손하게 처신했다. 두 사람의 공을 보면 이숙번 쪽이 더 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운명은 둘을 갈라버렸다. 이방원은 이 두 참모를 세심하게 살핀 후 후일 이렇게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다.

“하륜은 결코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숙번은 도성에조차 들이지 말아라.”

그 말대로 이숙번은 교만과 사치를 일삼다가 유배당해 죽음을 맞았다. 하륜은 평생 태종의 오른 팔이 되어 정치와 경제에서 큰 일을 이루어 냈고, 한 번도 임금을 넘어선 일이 없었다. 하륜이 죽자 태종이 이렇게 슬퍼했다.

“이제부터 이후로 조정의 대사를 염려함에 얼굴색이 변하지 않으며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을 인물을 어디서 바라겠는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임금을 보필해 줄 참모를 그는 스스로 매같은 눈으로 찾아냈기에 안정되게 보위를 지킬 수 있었다.

시스템을 개혁한 군주
-제도와 법률, 구조적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쳐 내다

 
고려의 망국 요인 중에는 신하들의 권한이 너무 커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방원은 신하들의 권한이 커지면서 고려가 흔들렸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도전을 숙청했고 스스로 적극적인 시스템 개혁에 나섰다. 

우선 사병 혁파로 병권을 중앙에 집중시켜 왕권을 위협할 소지가 있는 경쟁자들을 철저히 제거해 나갔다. 군주와 왕성을 지키는 병력 말고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도록 제도를 고침으로써 미래의 역모 세력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그는 또 권력구조 개편을 시도했는데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며 왕권을 제약해 왔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대부분의 정무를 이조 병조 등 6조에서 보게 해 3의정 6판서 시스템으로 대체했다. 

이 구조는 조선 내내 지켜지게 된다. 호패제, 신문고의 설치, 농경사업의 대대적인 국가 지원과 확충, 사원 재정의 국고 환수로 재정문제 해결 등 굵직굵직한 국책의 줄거리를 선보이며 연약하고 힘이 없던 나라를 강한 나라, 강한 조정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은 인재를 중요시하여 인재가 들어가 일 할 자리를 제대로 정비하고 기능을 부여하는 제도를 먼저 개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재를 들어앉힘으로 시스템의 개혁을 이루어 나갔다.

특히 국방 시스템의 개혁이 이방원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여기서 왕권과 국방 지휘권을 일치시킨 점이 특기할 만하다. 최영이 군통수권을 쥐고 있을 때 고려 왕들은 최영의 허락없이는 군대 통솔이 불가능했다. 그러던 것을 이방원이 군주->의정부->3군부로 이어지는 직통 통수권을 확립하게 하여 왕이 실질적인 군 통수권자가 되도록 한 것이다. 이제 왕은 자신의 명령 한 마디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됐으니 명실상부한 왕권 강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개편한 군 통수권 제도를 제대로 감시하고 이끌기 이해 그는 상왕이 된 후에도 군사통솔권한만은 자신이 붙잡고 있을 정도였다.

 

신기전, 태종떄 시작된 조선의 로켓
신기전, 태종떄 시작된 조선의 로켓

-힘이 아니면 왕권과 나라를 지킬 수 없다

태종은 고려가 망한 이유를 부패 관료의 등용과 귀족들의 사병 보유, 부패한 권력의 남용 등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정종 2년 권력의 중심에 서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모든 귀족, 권문세도가들의 사병들을 다 뽑아내버렸던 것이다. 
왕권 강화에 치명적인 적이 사병이었으니, 이들을 모두 국가 소속으로 변환시켜버린 것이었다. 국방력은 커지고 귀족들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하고,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눠 장악하게 했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했다. 1409년에는 11도에 도절제사를 파견하고, 영진군 수성군을 정비했다.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속선을 10척씩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고, 1415년에는 거북선을 개발했다. 

태종은 이에 앞서 혁신적인 국방 기획안을 제시했다.
한 사람은 지키고 두 사람은 군사를 돌보게 하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호패제로 이 제도는 전국의 인구를 조사한 후에 3정1호의 국방군제를 편성하고 현역군인으로 입역하는 사람을 정정(正丁)이라 하고, 1인은 솔정(率丁)이 되어 농사를 짓고, 1인은 여정(餘丁)이 되어 군사로 나간 가정을 돌보도록 한 것이다. 조선 국방체계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태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려 최고의 무기전문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시에 특채했다. 

최해산은 재임동안 동안 화차(火車) ·완구(碗口) ·발화(發火) ·신포(信砲) 등 신화기(新火器)를 개발하여, 1400년 화약 4근 4냥, 각궁과 화기가 각각 200여 병(柄)이던 것을 태종 18년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 발사군(火砲發射軍) 1만 여 명으로 군비를 확장하여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409년 10월 18일에 태종은 창덕궁의 정자 해온정으로 나가 새로 개발된 화포의 시험 발사를 참관했는데 그것이 신기전의 원형이었다. 실록은 이 대포에 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에 넣어 발사했다고 기록했다. 철로 만든 화살 수 십개를 한 번에 장전한 후 화약으로 발사하는 움직일 수 있는 자주식(自走式) 무기였다. 

태종은 이런 신무기들을 해전과 육전에서 화통을 통해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기본 무기로 활용토록 해 왜구의 출몰이 잦은 울릉도 등 섬지역에 먼저 실전배치했다. 1416년의 9월의 일이었다. 세종 원년(1419)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크게 왜구를 응징했다. 이후 왜구의 출몰이 크게 줄어 조선의 변방이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민심은 자연스럽게 보위에 있는 세종에게로 돌아갔다. 

세종을 위해 모든 것을 추려내다
-목표는 다음 보위의 안정이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쫓아내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과 견제를 겪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세종만이 조선을 제대로 안정시킬 수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여 세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407년에는 불충이라는 죄명으로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했고 1415년에는 역시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서인으로 폐했다가 이듬해 사사했다. 왕자의 난에 힘을 보탠 이숙번을 축출하고, 1414년에는 나머지 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일제히 은퇴시켰다. 처남 넷을 쳐낸 옹고집. 그게 태종이었다. 이로써 그의 말년과 세종 초기에는 더 이상 왕권을 위협할 모든 반대 세력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내치에도 힘을 기울여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확립하고 간쟁을 맡은 문하부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이는 전제정치를 견제하려는 효과적인 견제 시스템이었다. 이른바 언로를 연 것이다.

그리고는 충신 황희를 세종 앞에서 불러내 세종의 오른 팔로 추천하는 등 인재를 선택하고 추천하는 남다른 역량도 보여주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태종은 당시 비만 오면 물난리를 겪었던 시내 하천을 정비하여 지금의 청계천을 만들었고 경인 운하와 태안반도 운하를 준비하기도 했던 전방위적인 개혁 군주였다. 이토록 치열하게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는 그가 있었기에 세종의 안정적인 치적과 문화정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 세종이 쓸 인재를 추천하고 보증수표를 써주다

세종의 오른 팔 왼 팔은 누구였을까? 바로 황희와 맹사성이다. 이 두 사람은 한평생 세종의 참모로 조선의 부흥기를 만들어 낸 최고의 참모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 모두는 태종이 발굴해 내고 엄격한 테스트를 거친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은 모두 고려 충신으로 조선 조정에 참여할 사람이 아니었다. 

황희는 고려 조정에 출사했다가 조선의 이 씨 왕조에 충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눈에 띄어 역량을 인정받았기에 태종은 그를 이뻐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세종을 세자로 앉힐 때 황희는 결사 반대하고 나섰다. 적통 승계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황희는 이 일로 무려 5년간이나 지방으로 유배를 가 있어야 했다. 이방원은 이 때 수하의 감시자를 황희에게 붙여 그의 마음이 변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충성심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세종이 즉위하고 나자 그를 풀어주도록 세종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1422년 2월 귀양이 풀려 상왕이 된 이방원에게 황희가 인사 올리러 들어오던 날, 하필 새 임금 세종이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준비된 만남이었을 수도 있는 이 우연한 마주침에서 상왕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주상, 황희를 눈여겨 봐 뒀다가 잊지 말고 중용하시오. 주상에게 큰 역할을 할 사람이라오.”

세종의 세자 즉위를 목숨을 걸고 반대한 황희를 세종에게 맡기고 중용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방원. 그에게서 우리는 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세종도 나이가 무려 예순이나 된, 남들은 은퇴할 나이의 황희를 불러 올려 요직에 앉혔고 9년 후 69세가 되었을 때 영의정으로 중용해 18년 간이나 오른 팔로 활용했다. 맡기는 이방원이나 맡은 세종이나 대단한 군주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맹사성은 어떤가. 그는 자신과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가 고려 조정에서 출사한 고려 충신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정몽주와 동문수학한 막역한 사이였다. 그래서 고려가 무너졌을 때 조부와 부친은 고려 두문동으로 들어가 이성계의 조선에 충성하지 않기로 맹세한 절개파 충신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 초기의 학자 권람이 맹사성의 영민함을 아껴 그를 불러 올린 것이었다. 이방원은 그의 충성심을 살펴보고 변절한 자가 어떻게 조선에 충성할 것인지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조대림의 역모 사건이 터졌을 때 맹사성이 법대로 집행한 것을 두고 트집잡아 사형 선고를 내렸다가 중신들의 만류로 장형 100대에 처한 후 간신히 목숨만 살려주었다. 그 와중에도 맹사성은 조선에 대한 충성심과 왕조에 대한 변치 않는 신하의 입장을 지켰기에 태종은 맹사성도 세종에게 적극 추천해 중용케 했다. 

황희와 맹사성은 결국 영의정 좌의정으로 세종의 오른 팔 왼 팔이 되어 조선의 부흥기를 이끌어낸 명 참모가 되었다. 이는 모두가 아버지 이방원의 인재를 보고 훈련시킬 줄 아는 탁월한 능력에 힘입은 바 컸음을 보여준다.  

 

청계천,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청계천, 일러스트레이터=임경선 작가

태종은 정적에게는 모질게, 백성은 눈물로 껴안았다

태종 이방원은 정적을 제거할 때는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도 봐주지 않았다. 심지어 처남들 넷을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외척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사랑과 눈물로 대했다. 

태종은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다. 수도 한복판을 흐르는 개천이 해마다 범람하는 홍수 문제였다. 개천이 범람해서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대궐문앞까지 물이 차 올라 피난을 나가는 난리가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이 운하 계획을 이야기하자 그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였다. 절대군주시대에 유능한 군주는 치수에 목숨을 건다고 할만큼 치수 관리는 국가 흥망에 관련된 중요한 일이었다. 

태종은 왕명으로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케 하고 비교적 풍년이 든 경상도 전라도의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둑방을 돌로 쌓으며 홍수에 대비한 수방책을 세웠다. 후일 이 둑방이 바로 청계천이 되었다. 

실록에는 이 공사에서 태종의 백성 사랑 이야기가 따뜻하게 전해온다. 1412년 태종 12년 겨울에 청계천 공사를 강행했다. 왜냐하면 농번기에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면 원성이 늘고 경제생산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 때 태종은 백성이 얼어 죽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하고 음식을 충분히 먹이도록 수차 하달하는가 하면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제생원(濟生院) 등의 의약사로 하여금 미리 약을 만들게 했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서울의 날씨가 추웠고 입을 것도 덮을 것도 부족하던 시기였기에 병이 든 자가 너무 많았다. 태종은 이에 천막을 치게 하여 병자가 발생하면, 치료케 하여 생명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써 주었다. 멀리서 공사에 동원돼 걸어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오는 도중에 각 고을에서 이들의 구호를 책임지게 했으며 공사가 끝나자 한시라도 빨리 가족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한강을 앞 다투어 지나가다가 사고가 날까 염려하여 순차로 떼를 지어 귀향하도록 하는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는 등 백성들을 깊이 생각해 주는 임금이었다. 
 
한 가지 이방원의 강점은 차세대를 준비했다는 점이다. 
요즘 정치권에선 도저히 보기 어려운 일이다. 태조 이성계도 못한 일을 이방원은 해 치웠다. 여기 저기 피를 흘려 많은 욕은 먹었지만 다음 보위가 안정되었기에 스스로도 지킬 수 있었다. 조선의 초기 안정은 거의 모두가 태종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리더는 당대만 바라보는 눈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 점이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이방원이 오늘의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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