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까지도 보듬어 안고 개혁을 주도한 군주

정조, 조선의 혁신을 주도한 마지막 개혁 군주
오래 전에 종영되었지만 대하 드라마 <정조 이산>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만큼 정조의 삶은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조선 역사상 정조(1752-1800)만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며 왕위에 간신히 올랐던 왕재는 없었을 것이다. 자객이 궁안 깊숙이까지 침입하여 세손(정조)의 목숨을 노리는가 하면 축출의 위협이 상존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도가들로서는 세손이 군주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도 정조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왕권을 구축하고 국방과 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실현해냄으로써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해 냈다. 정조가 보여준 지혜의 리더십과 개혁정신의 실체를 살펴보자. 

 

정조의 활쏘기
정조의 활쏘기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사방이 적으로,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없었다

채제공과 다산 정약용은 정조 시대 임금이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지혜로운 충신들이었다. 그러나 이 둘 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노릇. 정조의 문제는 중앙정부와 지방의 조직을 이끌고 갈 훨씬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음에도 그들 말고는 마음을 터놓고 무엇을 함께 의논하고 맡길 만한 충신들이 별로 없었다.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거두고 큰 상인과 교활한 장사치들이 이익을 독점하며 관료들이 이를 틈타 자기 배를 채우는 시대‘였기에 국왕이 직접 실무를 챙겨야 했다. 게다가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을 남길 정도로 조선 역사상 가장 학자적인 군주였기에 스스로의 명을 단축하고 있었다. 몸이 정신을 따라가지 못함으로 인해 병마가 정조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홀로 커 오면서 정적의 도전에 늘 직면해 있었기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마음의 병을 키우고 있었다. 여기에 실학을 공부한 관료들과 재야 정치가들, 그리고 보수 관료주의에 빠진 지도층 사대부들의 괴리가 정조의 완벽주의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위협요인(threat)
: 세손 시절부터 목숨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세손 시절을 막 벗어나 왕으로 즉위한 정조를 노려 지붕 위에서 자객이 침입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정조가 밤늦게까지 책을 읽느라 깨어 있어서 범인이 발각된 것이지 만일 자고 있었다면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이날 밤에 호위무사도 자리를 비우고 도승지도 없어졌고 사관까지도 자리를 비웠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이라면 너무도 절묘한 우연이었다.

궁중의 모든 사람들은 주모자가 영조의 정비 정순왕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가 직접 심문에 들어가 조사해보니 궐내의 환관과 궁녀까지 결탁해 역모에 참가한 것을 알게 됐다. 상궁 고수애, 그녀가 종범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녀와 친하게 지내며 사주한 인물이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였다. 게다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도 정조 재위 10년만에 사망했다. 정조가 가장 사랑하던 후궁 의빈 성씨도 갑자기 죽었다. 그해 11월에는 왕의 조카인 상계군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여기에 정순왕후는 은언군도 사사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정순왕후는 열 다섯에 예순여섯의 영조에게 시집와 소생이 없었다. 그러면서 당쟁의 한복판에 들어가 벽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사도세자를 고변하고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하는 데 일조한 정치적인 여인이었다.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그를 치료했던 어의도 벽파의 거두 심환지의 친척인 의원 심연이었다. 정조의 지밀한 곳까지 정순왕후의 손안에 있었으니 정조는 사면초가였다. 

 

거중기
거중기

강점 요인(Strength)
: 자력갱생, 스스로 힘을 키워 적을 물리쳤다

정조가 위대한 점은 그가 어느 시대의 군주보다 학문이 뛰어난 실력자였으며 스스로를 지킬 지혜와 힘을 갖춰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단하는 자세가 그에게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규장각을 세워 자신을 지켜 줄 새로운 신진세력을 구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세워 인재를 구했다면 정조는 규장각으로 새로운 엘리트층을 규합하여 자신을 지키려 했다. 게다가 그는 무술과 병법과 학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전하기로는 태조 이성계 이후 가장 뛰어난 궁사였다는 것이 실록의 증언이다. 게다가 힘을 쓸 때와 적을 피할 때를 절묘하게 아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다.

그는 군주로 즉위하자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여 경쟁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수를 던져 적들을 주춤거리게 한 것이다. 기습을 당한 정순왕후의 세력들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힘을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세우고 수원 화성으로 서울을 천도하려고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혜롭게 처신하여 개혁의 기치를 들고 수구와 폐습을 걷어냈다. 정조가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북벌론이 주춤해지고 민족주의가 강해졌다

조선 후기 사회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며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이 때문에 절대 지존이었던 명나라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청나라는 망해야 하고 명나라가 다시 서야 한다는 이른바 반청복명의 사대주의와 북벌론이 대세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미 세상의 대세였다. 동아시아 절대 강자로 떠 올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강력한 정부로 거듭난 청나라를 이길 힘은 조선에 결코 없었다. 따라서 북벌의 명분은 점점 사라지고 복수보다 실리를 꾀하자는 자력자강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오랑캐 청나라의 것도 배울 것이 많으므로 이를 배우고 익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는 실학론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조로서는 이것이 기회였다. 중화사대주의를 버리고 조선이 중심임을 외치는 사상의 르네상스를 펼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게다가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온 신진 사류들이 앞장 서서 선진 문명을 배우자고 글을 쓰고 소문을 전파하는 문화계몽이 일어났다. 정조가 개혁의 기치를 들고 일어날 명분이 주어진 것이었다.  

살기 위해 힘과 지혜를 기르다

-활쏘기와 책읽기가 그를 지켜준 최강의 무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 이후 발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세자를 죽인 정적들이 세손이 왕이 되도록 두었다가는 언젠가 자신들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조가 세손 시절일 때 죽여야 한다는 것이 정적들의 입장이었다. 이런 연유로 정조는 세손 시절 한 번도 마음 놓고 쉰 적이 없었다. 후일 규장각을 세운 정조는 이런 속내를 드러내게 된다. 

“옷을 벗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 몇 달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며 이제 생각하니 불안하고 고독했던 나날들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가 세자로 있을 때 온갖 어려운 일을 겪었다.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친척인 척리이면서 바르지 못한 자들을 숙청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가장 고심했던 일이었다... 이제는 척리와 내관을 뜻하는 두 글자만 봐도 신물이 난다.”(정조실록 중에서)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최고의 궁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활을 쏘기 시작해 인내심과 집중력, 민첩성과 결단성을 키웠다. 그는 끊임없는 연습으로 최고의 궁수가 되었고 이를 궐안팎에 과시했다. 즉 문무백관 앞에서 활쏘기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정조는 50발을 쏘며 49발을 명중시키고 화살 한 대를 일부러 하늘로 날려보내는 여유를 보였다. ‘자, 따라 할 테면 한 번 해 보지 그래?’라는 여유와 배짱, 그리고 너희들보다 내가 훨씬 낫다는 강한 자주의식의 발로였다. 그는 실력으로 정적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포스터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포스터

강력한 친위부대와 화성 원행으로 정적을 제압하다
-말로만이 아닌 실력을 지탱해 줄 비책을 실현시켰다

정조는 영조 시절부터 계속돼 온 자신의 암살 모의를 이겨내기 위해 강력한 친위부대를 확대 편성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수년에 걸쳐 확대 개편한 결과 기병과 보병의 규모가 모두 5천 1백 52명이나 되었다. 당연히 구 세력들의 입김과 견제가 약화되고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실학파들과 손잡고 한 손에는 병기를 한손에는 농기구를 들고 싸우자는 조선 민방위제도의 창설을 주도하여 국력을 키우는 한편, 수원 화성에 이상적인 자족자립의 정치경제 형태를 갖춘 신도시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는 재위 18년 되던 1794년부터 2년 10개월에 걸쳐 채제공과 정약용 및 민과 군의 힘을 빌어 화성 건설을 완성하였다. 

정조의 뛰어난 점은 도시계획의 우선 순위로 재정적 자립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서울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경제권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수원은 서울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시도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기가 막힌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수시로 화성을 방문, 공사를 감독하는 한편 화산으로 옮긴 아버지의 묘를 찾아 자주 원행을 나갔는데 재위 24년간 66회나 원행을 감행, 정적들에게는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정치적 시위를 보이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에 대한 존경과 조선 르네상스의 부활을 알렸다.

이는 또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조에 선비들을 제외하고는 임금에게 백성들 자신의 의견을 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 앞에 직접 나와 호소하는 상언이라는 제도와 행차 중에 징을 울리고 나오면 볼기를 몇 대 맞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격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정조는 이를 적극 활용하여 무려 재임중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해결했다. 이 격무로 인해 정조 스스로 수명을 재촉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이것은 지방의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직접 실무를 챙겨 관리들의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원행으로 정조는 일거다득의 노림수를 기획했다. 친왕체제의 점검과 국도의 보수, 다리 건설, 군사 훈련, 방위체제 점검, 지방관아의 점검, 지방 인재의 발굴과 지원, 서울과 지방의 격차 해소, 정적들의 견제 등을 가져올 수 있었으며 나아가 백성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정치의 안정을 꾀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다양한 결실을 거두었던 것이다.

특히 1795년 윤 2월9일 을묘원행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 기념을 핑계로 과거를 수원에서 치러 지방 인재를 발굴하는 한편 장용영의 훈련된 병사들과 대규모 병력이동으로 군주의 강한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 행차는 무려 1km에 달했는데, 채제공을 비롯한 대소신료와 호위병까지 무려 1779명, 말은 779필이 동원됐고 현지에 미리 간 관료와 무사들을 합하면 6천 명이 행차에 참여했다. 지금 현재 청계천 방벽에 그려진 것이 이 행차의 그림인 반차도이다.

 

수원화성
수원화성

정적들의 반격에 비장의 무기를 던지다
-오만불손하던 신하들, 금등(金縢) 문서로 고개를 숙이다

그러나 정적들은 개혁에 반발하고 있었다. 수원 화성 천도의 낌새를 차리자마자 상소가 터져 나오고 반발이 거세졌다. 정국은 불타는 화약고처럼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자 정조는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 건이었다.

1762년 윤 5월 21일은 조선 역사상 아버지가 가장 참혹하게 자식을 죽인 사건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영조 임금에 의해 뒤주에 갇혀 있던 사도세자가 8일만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아버지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신이 퍼뜩 들게 되었다. 

당쟁을 미워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던 군주였지만 사실은 영조 자신이 당쟁에 휘말려 사랑하던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서둘러 도승지 채제공과 궁궐에서 나가 있던 세손(훗날 정조)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마저 내보낸 채 이들에게 은밀하게 몇 마디를 당부했다.

“도승지는 짐의 말을 신중하게 들으라. 세자의 죽음은 노론의 당쟁으로 인한 피해였다. 이것은 이미 5년 전부터 은밀하게 준비되어 왔던 것으로 내가 스스로 경솔하여 이 일을 만들었구나.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 이 한 통의 글을 잘 보관하라. 세손이 크면 이 글을 읽어보게 하라. 세자의 죽음에 대한 비밀은 절대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손마저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영조는 한 통의 글을 도승지에게 주면서 자신의 첫 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 신위(神位) 밑에 있는 요의 꿰맨 솔기를 뜯고 그 안에 글을 넣어두게 하였다. 이것이 금등 문서라고 불리는 것으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정쟁에 대해 영조가 쓴 비밀문서였다. 이 문서는 무려 31년간이나 정조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었다.

정조는 이 문서를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도세자 죽음 30년 후에 폭로하게 했다. 더 이상 수원 화성 건설과 군주의 원행을 막아서면 나도 끝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파헤쳐 관련된 이들은 모두 죽이겠다는 엄포요 위협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정조가 화성유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는데 이것은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영의정에 오른 채제공은 직첩을 받은 문건의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도세자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자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참모였다. 그가 갑자기 승부수를 던지듯 정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발언을 하고 만 것이다. 

당시 채제공은 ‘동호지필(董狐之筆)’이란 말로 상소를 올렸는데 이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바르게 기록한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사도제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솔직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가려보자는 정치적 도전이었다. 

깜짝 놀란 정적들은 선왕인 영조가 절대 발설 말라던 일을 들고 나온 채제공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그들로선 사도세자를 죽인 책임 때문에 목숨을 건 것이었다. 조정은 누가 죽느냐 사느냐의 양단간의 결판이 날 상황이었다. 그 때 지혜로운 정조가 솔로몬의 심판을 내렸다. 양쪽의 책임을 물어 노론의 영수 김종수와 영의정 채제공의 옷을 벗긴 것이다. 채제공이 영의정에 오른지 열흘만이었다. 정조는 1793년 8월8일 2품 이상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금등의 문서에서 직접 베낀 두 구절을 승지를 시켜 보여주었다.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사도세자를 간절히 아끼고 사랑하던 아비 영조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글을 읽은 중신들이 숙연해지고 눈물을 훔치며 더 이상 이 문제를 시비걸지 못하게 되었다. 

정조의 노림수는 이러했다. 기존 보수적 정치권들이 수원 화성에 대해 시비를 걸면 나도 금등의 문서로 사도세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두 책임자를 처벌, 이만 끝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 절묘한 승부수로 정계가 폭풍 전야에서 안정되었던 것이다. 

정조의 개혁수, 채제공의 바람몰이
-부창부수의 리더와 참모

채제공은 정조의 실세로 올라서면서 그는 임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사실 채제공은 정조가 세손 시절 일 때 그의 교육을 맡았던 사부였다. 정조는 이 채제공을 통해 그가 제시한 개혁 '6조 진언'을 받아들여 신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바로 세울 것
2.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3. 당론을 없앨 것
4. 의리를 밝힐 것
5. 백성의 어려움을 돌볼 것
6. 권력기강을 바로 잡을 것

이것이 정조의 개혁실체였다. 이로써 북학파들을 대거 기용, 남인의 정약용, 이가환 북학파의 박제가 서얼출신의 유득공, 이덕무 등이 실력자로 올라섰다. 

1791년 정조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신해통공’이었다. 이것은 숙종 때부터 당시까지 유지해 왔던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시킨 사건이다. 금난전권이라는 제도는 상업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시전 소속이 아닌 사사로운 상인계층들의 장사를 방해하여 난전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을 말한다. 시전상인이 조선 조정의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자신들만의 상권을 확보하면서 시전을 독점체제로 이끌고 가는 대신 사대부들은 이에 대한 대가를 받아왔으니 민관이 합작한 사기극이었다. 다른 이들은 장사를 하고 싶어도 이들에게 밀려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정조는 이를 일거에 뒤집어버린 것이다. 시장에 자유경쟁체제를 도입했으니 기득권층이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인사권을 제한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한 정조
-탕평책으로 정적에게도 기회를 주다

채제공은 정조의 집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조의 속내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붕당정치의 한 원인이던 전랑법(銓郞法)을 철폐하자고 제안했다. 
전랑이란 관리 선발을 전담하고 있던 정랑(正郞:정5품)과 좌랑(佐郞:정6품)을 전랑(銓郞)으로 합칭한 것을 말한다. 전랑의 임직은 장관인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도 관여하지 못하고 전랑 스스로 후임자를 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연히 줄서기가 일어나고 떼거리 정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에 전랑제를 철폐하도록 하여 노론측의 대를 이어가는 전랑 독직을 막아버렸다. 그의 개혁이 이제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지혜로운 군주였다. 빌미를 주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만천하게 선언한 그는 철저히 범인을 가려내 숙청했다. 그러나 그런 무력위주의 분위기를 계속 끌고 가지 않고 탕평책으로 인재를 공평하게 선발했다. 규장각을 통해 나라를 이끌고 갈 싱크탱크들을 키우고 과거제도의 혁신을 통해 좋은 인재를 찾아냈다. 또 북학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뽑아 실학을 전면배치하고 채제공을 신뢰하여 그에게 개혁을 추진케 했다. 정약용 이익 유성원 등이 이 때 등용되었다.

지혜로는 당할 자 없는 전술전문가 정조

정조의 리더십은 이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군주보다 더 탁월하다. 그는 한마디로 문신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뛰어난 전술가였다. 24기를 기본으로 하는 훈련무예도통지를 만들어 이를 교본으로 장교와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궁내에서 대신들과 장교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연습을 계속했다.

현장을 직접 나가 보다 보니 그는 느끼고 깨닫는 것도 많았다. 정조는 이런 경험을 국방전략에 흡수하여 보병과 기병 포병 등 세 병과의 전법을 정리한 ‘병학통’, 군사의 조련을 요약한 ‘병약지남, 진법과 전차의 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악기도설‘ 등을 간행하여 전략전문가로서의 업적도 높이 쌓았다.

정조는 이처럼 힘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통해 정치적 규합과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고 르네상의 실현자로 길이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그를 전략가로 부르지 않고 전술가라고 부른 것은 정조가 동아시아의 흐름을 읽는데는 부족한 면을 보였기 때문이다. 남해에는 이미 수많은 네덜란드의 선단들이 무역을 하러 다녔지만 정조는 이를 살피지 못했다. 그가 글로벌리즘에 대해 눈을 뜰 수만 있었다면 조선의 부흥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정조대왕 왕릉인 건릉(수원)
정조대왕 왕릉인 건릉(수원)

아직도 진행중인 정조 독살설

과연 정조는 독살된 것인가? 정조의 측근이었고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다산 정약용은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당시 백성들 사이에 한 정승이 심연이라는 어의를 시켜 임금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돈다고 적었다. 익명의 대자보도 붙고 수상한 소문들이 줄을 이었으니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그것은 정조가 어의의 약재를 제대로 듣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약재를 쓰기까지 하며 아무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어의조차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모든 개혁조치를 뒤로 돌리고 폐지한 조치를 보면 적어도 그녀가 깊이 개입한 뭔가가 있을 거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현대 의학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가 나와 여러 가지 가정 하에 추론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 쪽도 독살설의 지위를 가려내지는 못했다. 독살의 징후나 추정은 가능하지만 과연 감시의 눈이 시퍼런 궐내에서 설마 당대의 군주를 살해하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반대 입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정조의 개혁조치 이후 설 자리가 없어져 가던 정순왕후와 그의 측근들이 승부수를 던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과학적으로는 미필적이든 고의적이든 간에 한방약재의 쓰임새에 문제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수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후일 더 정확한 고증과 고고학적 유물이 나온다면 몰라도 현재까지는 추론에 불과한 것을 사실로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정조의 개혁수와 승부수를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쿠데타가 일어나는 후진적 나라가 아닌 상황에서 정조 시절의 극단적 사건을 현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기업이나 작은 조직에서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대표이사를 갈아치우고 경쟁자를 제거하거나 적대적 M&A로 경쟁사를 넘어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조의 노림수와 승부수는 그래서 돋보인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필살기를 한 가지 반드시 갖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기업 현장이다. 그리고 창업주라 할지라도 자신을 지킬 힘과 지혜가 없으면 패한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은 가르쳐 주고 있다. 

정조는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을 차곡차곡 실천하려는 의지와 여론(백성들)을 자기 편으로 끌고 가는 강한 실천력, 그리고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경쟁 속에서 자신을 키우고 지켜나가고 싶은 CEO나 팀장들이라면 마땅히 정조의 실천적 지혜를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