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를 읽을 줄 아는 자가 진정한 리더

국제 정세이든 국내 정세이든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여말 선초에도 그랬다. 구세력이 물러가고 새로운 세력이 정치를 시작했지만 우군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세력 교체기간이었고 한반도에서는 묵은 중세가 지나가고 근세가 시작되던 대전환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울 때가 난세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많아도 너무 많이 나타난 신진세력과 기득권 세력이 대 충돌을 일으키며 사생결단을 노리고 있을 때 이성계는 조용히 판세를 읽고 있었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어떻게 난국을 헤쳐나갈 것인가? 그 선택에 따라 흥할 수도 가문이 몰살할 수도 있는 위태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그는 신세계 창건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위 이성계의 창업 리더십의 실체를 살펴보자. (편집자주)

고려말에는 위대한 선각자들이 대거 나타났다. 가정 이곡은 학문과 정치를 아는 균형감 있는 선각자로 원나라가 고려 처녀들을 강제 선발해 가는 과정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편지를 원나라 황제에게 보내 정책 자체를 취소시켰던 인물이다. 그의 제자 중에 소위 고려말의 식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학자가 목은 이색. 그는 가정 이곡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뛰어넘는 대학자로 후일 조선 개국 때 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포은 정몽주가 있다.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여기에 야은 길재를 포함하여 고려 3은(高麗三隱)이라 불렀다.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 

그리고 문익점이 있다. 목은 이색과 함께 이정 선생에게서 배운 문익점은 사대부로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모습을 측은히 여겨 목화씨를 들여보고 재배 기술을 퍼트린 실사구시의 유학자였다. 여기에 늦게 삼봉 정도전이 다시 합세한다. 

이들은 내로라 하는 유학자였지만 노선이 달랐다. 가정 이곡은 친원, 목은 이색도 친원, 정몽주와 정도전은 친명파였다. 문익점은 백성이 먼저였고 정치권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여기에 다시 유학자는 아니지만 우왕에게 딸을 주어 외척이 된 천하를 호령하던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신진 사류들은 새로운 사회로의 개혁과 부패 무능 정치의 일신을 꿈꾸고 있었다. 이 무리들 가운데 정계와 조정의 여론에 깊이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로는 당대 최고의 석학 정몽주와 무장 출신의 이성계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정적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했던 두 사람 사이는 위화도 회군 이후 갈라지기 시작해 한 사람은 불귀의 객이 되고 한 사람은 조선의 창업주가 되었다. 이성계가 선택한 창업 혁명의 길은 멀고 험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었고 조선 왕조 5백년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조선 태조 이성계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지지세력도 미약했고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해 위태로웠다

힘을 잘 쓰는 이들은 지혜가 달리는 법이다.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 조정에서도 신통한 대접을 받아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나라 치하에서 동북면 변방에 나가 있던 일개 장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고려로 귀환한 후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자력으로 동북면에서 무술로 이름을 얻었고, 고려의 철천지 원수였던 왜구를 차례차례로 물리치면서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럼에도 중앙정계에선 여전히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한 아웃사이더였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인 최영과 정몽주 같은 엘리트 출신 세력들이 중앙에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성계로서는 불리하기만 한 형국이었다. 자신은 변변한 책사 하나 거느리지 못하고 있었다.
 
위협 요인(threat)
: 지는 해 원나라와 뜨는 해 명나라 사이에 끼어 견제를 받았다

중앙의 로케이션이나 가문의 약점 말고도 이성계가 염려할 위협요인들은 너무나 많았다. 특히 원나라는 비록 지는 해였지만 아직도 막강한 무력을 소유한 데다 최영과 같은 친원파들이 조정 안에 가득 차 있어 이성계의 선택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한편 가까이 하고 싶은 명나라 역시 아직은 막 뜨는 해라 강력한 지원세력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게는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어려움이 상존하고 있었다.

강점 요인(Strength)
: 사람을 잡아끄는 강한 흡인력과 스타성을 갖추고 있었다

최영이나 정몽주에게 없는 부드러운 인간성과 사람을 잡아 끄는 흡인력이 그에게 큰 강점이었다. 최영은 자신감이 넘친 데다 딸을 왕에게 바쳐 외척으로서도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소유했지만 이성계에 비해 부드러움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절개와 고집은 있었으나 사람을 잡아 끌 힘이 부족했다. 

한편 또 다른 정적 정몽주에게는 높은 학자적인 신망과 절개, 충성심으로 숭상할 만한 요소가 너무도 많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부족한 데라고는 없는 완벽함이 버티고 있어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성계는 그런 거만함이나 완벽함은 별로 없고 오히려 늘 사람을 모으고 가까이 하는 친숙함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는 힘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 나면 병사들의 맨 앞에 나서서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섬김의 정신과 용맹성도 갖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타성을 골고구 갖춘 것이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중원에 절대 강자가 없고 공민왕 뒤를 이을 리더가 보이지 않았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서로 심하게 견제하고 있는 틈바구니에다 고려는 이미 숨이 넘어가는 형국이었다. 둥북아에 아무도 맹주가 없으니 무주공산(無主空山) 아닌가. 고려 왕실 또한 공민왕 이후 카리스마 있는 군왕이 출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외척에 휘둘리고 귀족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다. 리더가 변변치 못하니 민심이 이반하고 지방에선 탐관오리가 들끓어 군주를 원망하고 나라를 욕질해 대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뭔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심리들이 끓어오르는 마그마처럼 폭발 직전의 휴화산처럼 불안정한 상태였다. 위기 국면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라면 성공이 보인다’
-성공할 줄 아는 기획통 정도전을 책사로 붙잡다

도대체 고려의 수많은 신진사류들이 정몽주 같은 최대의 지도자이자 학자를 마다하고 왜 무변방의 무장 출신인 이성계에게 몰려간 것일까? 최영은 고루하고 보수적인 인사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정몽주에 비해 이성계는 어떤 매력이 있어 그에게 사람들이 몰린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성계는 ‘활력’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와 있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것같은 긍정적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벼운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성계의 성격은 진중하고 침착했다. 깊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산과 같은 든든함이 그에게서 발산된다는 것이 그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라면 인생이 즐거워지고 반드시 성공할 것 같은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장점을 가진 것이다. 

성공을 꿈꾸는 이들은 성공형 지도자를 찾는 법이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 것인가.
고려 조정에 밉보여 10년간 야인으로 떠돌던 최고의 기획자 정도전이 이성계를 택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도전은 42세가 되던 1383년 가을, 스스로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이성계의 군대는 질서 정연한 군기와 충천한 사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망국 고려의 실정을 늘 한탄하며 가슴 아파하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를 보자 희망이 솟아났다. 급기야는 속내를 참지 못하고 말을 붙였다.
 
“정말 훌륭하군요.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놀란 눈으로 이성계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 자네 그게 무슨 뜻인가?”
정도전은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 것에 스스로 놀라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 같은 것이죠.”

이성계도 사실 정도전의 속내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기상조였을 뿐이나 언젠가는 두 사람이 속내를 터놓고 말을 꺼내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속설에는 정도전이 군영 앞에 서 있던 소나무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시를 써 두었기에 이성계가 진심을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정도전의 시는 이랬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 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다른 해 아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뜻이 가득 담긴 시였다. 이심전심,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떠돌고는 있지만 최고의 인재가 정도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부족한 책사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맡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인재를 볼 줄 아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던 것이다. 이성계로서는 최대의 결점이던 아이디어와 기획의 실력을 정도전에게서 빌릴 수 있게 되었고, 정도전으로서도 이성계의 든든한 배경이면 지금까지의 견제와 냉대를 벗어나 어떤 기획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은 이로써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조준, 배극렴, 권람 등의 선비들과 여말 최고의 무장이라 불리던 여진족 출신의 장군 이지란 등 혁혁한 인물들 수십 명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특히 이지란은 변방의 위기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수습하고 돌아오는 등 이성계의 오른 팔로 의형제를 맺을 정도의 친밀함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최고의 실천형 지도자이자 기획가 이방원이 그의 아들로 든든히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니 이성계야말로 모여든 인물만으로도 한 나라를 세우고도 남을 최고의 지도자로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와의 생사를 건 사투로 이름을 얻다
-아지발도를 활로 제압한 용맹성과 스타성

고려의 망국 원인을 이야기할 때 왜구의 침입도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힐만큼 왜구 문제는 고려의 골칫거리였다. 나라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심각한 왜구 문제를 조정에선 쉽게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기습적으로 쳐들어 왔다가 재빨리 빠져나가는 왜구를 막기 위해 상비군을 편성하기에는 나라의 살림이 너무 부족했고 지역 방어군으로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왜구의 침입은 1350년경부터 본격화돼 4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왕 6년(1380) 8월은 최대 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온 달이었다. 이 때 동원된 왜구의 배가 500여 척에 달했는데 금강 어구로 들어온 왜구들은 육지에서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식량과 물건을 도적질했다. 이 때 땅에 흘린 곡식이 한 자나 되었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고려 조정은 화약을 사용하여 왜선을 불사르게 했는데 이것은 더 큰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돌아갈 배가 없어진 왜구가 내륙 깊숙이 들어가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주, 선산 등 깊은 내륙 도시들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함양으로 왜구들이 몰려가자 고려 조정은 하는 수 없이 동북면의 이성계를 내려보내 왜구를 치도록 했다. 토벌군이 편성되었는데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의 3도 도순찰사에, 찬성사贊成事 변안렬을 도체찰사에 각각 임명하고 적을 쫓게 했다. 이성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까지 간 다음  왜구의 주력군 앞 120리가량 떨어진 곳에서 군사와 군마를 쉬게 하였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한 후 운봉을 넘어 황산荒山 서북에 도착했다. 

왜구의 당시 주장은 십대 소년 장수였는데 이름이 아지발도였다. 그가 워낙 싸움을 잘해 고려군은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어 넘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온 몸을 두꺼운 갑옷으로 감싸고 있어서 활과 창을 막아낸다는 소문이 나서 아무도 그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 때 이성계가 이지란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지발도의 투구를 향해 화살을 날렸고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화살을 쏘아서 그를 죽였다. 이에 왜구의 사기가 꺾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는 이 싸움을 ‘황산대첩’이라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숱한 왜구를 죽였고, 말만 1,600필을 노획했으며 엄청난 양의 병장기도 거두어 들임으로써 이후 왜구의 대대적인 공격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힘으로 일궈낸 ‘자주자립’, 
-멋진 참모 이지란을 발굴해 내다

함경도 지역 동북면의 일개 무장에 불과하던 이성계가 정국을 주도하는 리더로 거듭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를 힘입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정몽주가 선비로써 학문과 인품으로 사람을 끌어들였다면 이성계는 무장으로써 군계일학의 실력을 마음껏 드러냈다. 

이렇게 이성계가 무장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배경에는 이지란 장군이 있었다. 이성계는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이지란을 평생 동지로 삼았다. 이지란은 여진족의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여진의 추장과 병사들은 이지란과 평생을 같이 하겠다고 다짐하고 그를 따랐다. 변방에서 여진은 골치아픈 존재였다. 배고플 때는 식량을 얻으러 오고 굽실거리다가도 자신들의 힘이 넘치면 언제든지 변방의 조선 마을을 침략해 야만성을 드러냈다. 그런 여진의 우두머리를 이성계는 자신의 부장으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의 영웅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경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역사를 보면 조선 최고의 궁수로 이성계와 정조를 이야기하는 데 여기에 이지란을 빼놓을 수 없다. 이성계와 이지란은 말 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술로 오래 단련해 왔고 그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성계는 이미 열일곱 살 때 함경도에서 이름을 떨쳐 당시 절도사인 왕준길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두만강의 정장이라는 벼슬에 올렸다. 변방을 지키는 제법 높은 벼슬자리였다.

이지란은 공민왕 17년(1368)에 원나라에 의해 지방 장관의 벼슬을 부여받고 북청의 포청사로 옮겨왔다. 둘은 충정왕 3년 1351년경, 두만강 상류에서 만남을 갖게 되었다.  서로 무술도 잘 하고 성격도 호방해 잘 어울렸다. 이성계는 부드러운 듯 하나 사람을 잡아끄는 흡인력이 강한 지도자형, 이지란은 순종을 다하는 참모형이었으니 궁합이 아주 잘 맞는 만남이었을 것이다. 

이지란과 이성계는 함께 어울려 우정을 나누었는데 당시 국제 정세로는 주원장이 일으킨 명明이 건국되고(1368년),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반원 정책으로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원나라의 멸망을 예상하고 공민왕 4년에 고려에 귀순했다. 귀순한 이자춘은 공민왕 4년(1356)에 원의 세력을 함경도 지방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이 전공으로 후일 이성계도 상대적으로 쉽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성계의 영향을 받은 이지란은 북청이 고려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자 공민왕 20년(1371) 2월에 정식으로 고려에 귀화했는데 이 때가 41세였다. 물론 이성계가 그를 귀화시키고 정착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귀순 이래 동북면 병마사가 된 이자춘에 이어 이성계도 동북면 상만호上萬戶라는 제법 높은 벼슬을 얻게 되었고 이듬해 개경에 침입한 홍건적을 공략, 대파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침내 동북면 병마사 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변방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1372년 요양과 심양의 도적들이 평안도 지방을 보복 침입하였고, 그 해 2월에는 산양회 지방에 침입했는데 호발도라는 두목이 이끄는 세력이 만만치 않아 고려 정부는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한 이성계는 자신의 오른 팔 이지란을 보내 막기로 했다. 이지란은 모친 상중이었음에도 상복을 벗어버리고 싸움터에 나가 길주 평야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함경도 지방이 평안을 되찾았다. 이성계는 몹시 기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하는 재주는 이지란을 따라갈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싸움터에서 적을 쳐부수는 일은 도저히 이지란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지란은 이성계가 무장으로 고려 전역에 이름을 떨칠 때 가장 큰 공로자로 곁을 지켰고 후일 네 아들 모두를 고위직에 올리는 등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내부
경복궁 근정전 내부

경제를 아는 무인 출신 군주, 나라의 틀을 180도 바꾸다
1)부의 편중을 막아라

정권이 바뀌고 나니 정국이 시끄럽기만 하다. 이럴 때일수록 역사를 읽어야 한다. 역사의 기록에서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배워야 실패를 줄인다. 그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지금 수권정당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리더로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이성계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경제력의 획득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경제력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경제력을 쥐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는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고 전제개혁 (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고려가 어려워진 중요한 원인 가운데 귀족과 승려의 부의 독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계는 자신과 경쟁하고 있는 고려 귀족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그들의 경제력을 꺾는 방법을 선택했다. 

고려의 귀족들은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는 세습이 가능토록 해 권력의 세습을 만들었고 음서라는 제도를 통해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료가 되는 길을 만들어 한 집안에서 모든 자제들이 과거에 떨어지더라도 한 명씩은 음서로 출세할 수 있게 했다.
이들은 집집마다 데리고 있던 솔거 노비들을 동원하여, 황무지 개간에  나서 고생은 노비들이 하고 소출되는 양식은 자신들이 가져가는 등  부를 가중시켰다. 또 권력층들이 국가기관이나 사원에서 널리 행했던 장생고(長生庫)라는 기관을 통해 곡물이나 면포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부를 쌓았다.

이성계는 이를 원천 차단토록 하여 귀족들의 힘을 빼앗았다. 당시 고려 권력층의 사치는 극에 달해 고려의 망국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빈부의 격차와 위화감이 하늘을 찔렀다. 서민들은 평생에 걸쳐 구경도 해 보지 못한 금 은 동 인삼 등 대송 수출품을 집안 가득 채워놓고 송에서 수입해 온 자기와 서적, 약재들을 독점했다. 

<고려도경>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귀족의 여인들은 능라와 악기, 남방산인 향료, 지필묵의 문방구들, 각종 노리개들로 사치를 부렸는데 특히 귀족들은 금으로 만든 노리개를 즐겼다고 적었다. 또 여인들은 허리띠에 오색의 찬란한 금방울을 매달았고, 사향을 넣은 금낭을 차고 이를 많이 가진 것을 자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속치마를 많이 입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겉치마가 당연히 길어져 8폭이나 되었으며, 치마 한 벌 만드는데 옷감이 7,8필이나 들 정도라 서민들의 위화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승려의 폐해 또한 극에 달했다. 사원에겐 면세로 혜택을 주었고 승려들은 병역의 의무도 없었으며 많은 승려들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등 재물과 명성을 누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의 명문가는 모두 한 자녀 이상을 승려로 출가시키려 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귀족과 승려가 한데 엉켜 특권층을 양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이런 불교의 폐단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귀족들의 힘을 뺏는 동시에 불교를 억압하여 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길 원했다. 그래서 정도전에게 세금 제도를 손보아 개성과 지방의 귀족들 힘을 뺏는 동시에 새 왕조를 세우자마자 곧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세금 제도의 개편은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만 이것은 수도 천도와 함께 기존 귀족들의 힘을 빼앗은 가장 확실한 공격이었다.   

이성계는 또 귀족이나 왕실 측근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모두 해체시켰다. 물리적으로도 반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돈과 사병이 없는 고려 귀족은 사실상 무장해제된 셈이었다. 그리고 귀족 승려가 매년 더 차지해 가던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을 막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경제력을 아는 군주 이성계는 드디어 대적할 적이 없어지면서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건설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있는 자보다 없는 자를 배불리는 정책을 채택하다
역사 이래 가장 큰 경제제도의 변혁을 시도한 인물이 이성계였다. 이 점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을 불러 고려의 편중되던 경제력을 해소하고 서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고려는 제도상의 허점으로 귀족이 양민들을 마음대로 사전(私田)에 부려먹어도 제지할 길이 없었다. 사원도 이 점에선 수탈기구가 되어 양민들을 착취하는 기관이었다. 특히 함경도 등 개성에서 먼 동북지방 등은 탐관오리에다 승려와 귀족의 후손들이 마음놓고 일반 백성을 수탈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것도 대대로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이런 폐습을 낱낱이 살펴온 이성계는 새 나라에선 있는 자보다는 없는 자를 위한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로 제도를 손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민생 안정이 제일이요 그 다음은 국가재무의 건실화, 그 다음은 국방력의 강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려말에 이미 처음 실시한 것이 과전법의 전국 실시였다. 이 제도는 지금 생각해 봐도 혁신적인 제도였다. 이성계와 그의 참모들이 처음 구상한 계획은 아예 모든 전국의 토지를 몰수하여 인구비례로 나누어 주고 재분배하여 국가 수입을 늘리자는 계획경제식 토지 혁명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 근현대사이니 이성계의 구상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나누는 것을 반대하는 법. 이 계획은 지주들의 반발로 인해 최종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토지 공개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국민에게 심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전국 토지에 세금을 거둬들이는 혁명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이를 지금 시점에서 말하자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싶겠지만 고려시대 때는 귀족과 승려라면 누구나 면세를 받아 세금을 내는 사람이 바보이던 시대였다. 면세 기관이 너무도 많아 국가 재무는 바닥인 때가 많았으니 국방이든 무역이든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전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제도 하에서 세금을 거두려 할 때 전국의 토지는 60-80만 결에 불과했다고 학자들은 증언한다. 당시 1결은 어느 정도 되는 땅일까? 소출하는 양에 따라 1-6등급 땅으로 나누기 때문에 정확한 면적은 계산하기 어렵다. 그러나 1등급 땅이라면 대략 3천 평보다 좀 적은 땅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좋은 땅에서만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짐작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태조 이성계가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 농사 소출량이 크게 늘어나 정종시대를 잠시 거쳐 태종 이방원 시절에는 무려 120만 결, 세종 때는 172만 결로 늘어났다니 대략 3배 이상의 생산성 증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세종말기에는 고려 말보다 농업생산량이 40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은 농사지대본의 나라였다. 1차 산업이 전부인 나라에서 400% 소득 증대가 일어난 것이다. 이성계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더불어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윤택해졌을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흔히 태종이 세종의 보위를 지켜주기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으로 기평가하지만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정치적 선택이 대단히 유용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전국을 네트워크로 엮어 조직화하다
이성계는 정도전이라는 걸출한 기획자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 획기적인 중앙과 지방의 네트워크를 형성토록 했다. 물론 당대에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전국 네트워크의 형성은 정치 관리와 조세의 집중이라는 일거양득의 장점을 붙들 수 있게 했다.

이성계는 향 소 부곡이라는 고려시대에만 존재하던 특수 부락을 없애버렸다. 소위 천민들이 일하던 곳이 이 세 곳의 지방제도였다. 노비를 제외한 천민제도가 드디어 조선에선 없어진 것이다. 또한 전국을 8개 도로 나누어 약 350개의 군현을 두도록 했다. 이는 군주가 최소한 하루에 한 고을씩만 살피면 일 년이면 전국을 다스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제도다. 이 가운데 주요 지역에 조세집결지를 두고 조세 물류의 중심지로 활용했다. 소양강창, 공진창, 흥원창, 법성포창, 영산창 등이 그것이었다.
여기에 과거제도로 실력있는 관리를 뽑고 그들을 교육시켜 고을 수령으로 발령했다. 이제 군주는 앉아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전국의 고을 수령을 활용하여 친정 정치가 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이성계의 노림수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다. 

원 샷 원 킬의 집중력을 발휘하다 
-기회가 왔을 때 절대 놓치지 않은 과감한 승부사 

그는 뛰어난 공격수였고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투견 같은 집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남들이 버린 정도전도 책사로 받아들인 이성계가 아니던가. 그의 더 큰 강점은 기회를 잡으면 놓치지 않는 과감한 집중력과 승부사 기질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구신舊臣들의 정치적 견제와 방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과전법을 실시했다. 이로써 부를 지나치게 쌓아 빈부간 격차를 갈수록 벌려놓았던 고려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힘으로가 아닌 기획 싸움에서 그는 이미 고려 구신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또 난국에서 그가 보여준 전쟁터에서의 모범적이고 희생적인 지도자의 모습은 백성들에게 깊이 다가서게 되었고 이런 호의적인 여론은 장차 그의 역성 혁명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예로부터 국제정세에 민감한 인물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이성계는 비록 무장 출신으로 정국의 지도자가 되면서 원과 명이 세대교체를 이뤄가던 중원의 혼란기에 단연코 명나라의 우세를 전망하고 고려의 친원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정몽주까지 가해 친명파로 나서 단숨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기회 한 번에 모든 것을 거머쥐는 놀라운 승부사 기질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스스로 개척할 힘이 없으면 아무리 우수한 지도자도 창업은 꿈꿀 수 없다는 진리를 그는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위화도 회군에서 이성계는 강한 결단력과 집중력을 선보인 바 있었기에 조선 개국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왕조를 바꾸는 놀라운 결단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이성계는 전 왕조(고려)의 역사를 새로 편찬하고 이론적으로 왜 조선 왕조가 필요한지, 새로운 세계의 비전은 무엇인지를 정리하는 등 소프트웨어의 정비를 시도하는 한편, 건국 7년안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제도적 정비를 서둘러 완료하게 했다. 이와 함께 권력에서 물러나 새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는 후원자로 들어앉았다. 
이같은 통치 형태는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것으로, 정치적 탐심이나 사욕이 없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00년 역사의 유구한 조선이 그 시대에 탄생한 것은 이성계라는 아주 매력적이고 활력과 확신에 가득 찬 지혜로운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화 정책과 포용정책으로 인구의 경쟁력을 갖추다

이성계는 이민족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 관료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까? 사실은 일찍이 전주 출신으로 변방에 살면서 많은 여진인과 몽고인들을 만나고 중국인들을 접해본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과 부대끼며 싸워 온 경험이 귀화인 정책 수립에 큰 틀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며 그 초점은 여진족의 경제력 부분이었다. 

고려 때에는 여진족이 동북면 일대에 내려와서 농경생활을 했다.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었다. 당시 원나라의 경계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여진족은 원나라와 조선의 힘의 균형 사이에 병존하는 상태였다. 자신들이 힘이 있으면 영토를 양쪽으로 넓혀나갔고 그렇지 못할 경우 숨 죽이고 살았다. 이 지역의 맹주는 당시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함흥 지역 동북면의 맹주였기에 세력이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을 통솔할 만큼 막강했다. 이미 무장으로서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여진족은 이성계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성계가 이지란과 의형제를 맺고 그를 귀화시키자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이 조선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하자 이성계는 여진족 포용 정책을 더 과감하게 펼쳐나갔다. 정도전을 도안무사로 보내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려 귀화시켰다. 사실 그들은 어느 곳에서 살든지 먹고 쉴 수 있는 곳이면 나라를 선택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이성계는 그들을 편입시켜 조선인으로 만듦으로써 미래의 적을 사전에 없애버리는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고 우리나라 백성들과 여진족의 혼인을 장려하여 하루라도 빨리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당시 이지란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귀화 이후 여진족에 대한 특별한 혜택을 베풀었다. 조선 왕조의 개국 이후 함경도의 여진 문제는 태조 이성계에게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이를테면 태조는 여진 사람들이 머리를 풀어헤치는 습관을 버리고 관을 쓰는 조선 사람의 버릇을 따르게 하였으며 예의를 가르쳐 배우게 했다. 또 여진인과 조선인의 결혼을 허락했고 세금을 바치는 문제도 조선인과 여진인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태조 이성계는 이들이 조선인으로 귀화하는 문제를 적극 추진했고 그 중심에는 이지란이 있었다. 
 
이성계는 적극적으로 이민족의 귀화를 장려했다. 이 때 이성계는 여진족은 물론이고 왜인, 위구르인 등에도 후한 대접을 해주어 명나라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이에 맞서 여진족을 적극적으로 회유했다. 이것은 여진족이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 양국의 국경 문제를 유발하기도 하고 때로 양국의 백성들을 잡아가거나 살육하고 심지어 물자를 빼앗아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북방의 회유정책과 함께 남쪽에서도 회유책을 계속했다. 왜구들을 붙잡아 회유하기도 하고 표류해온 이들을 눌러 살게 해주는 노력도 기울였다.  

귀화인에 대한 정책은 한족을 가장 우대시하였고, 이들은 주로 인력 보완과 제도 마련, 외교 정책 활용 등에 투입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귀화인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객사, 가옥, 의복 및 과거 응시가 가능한 자격 등을 특전으로 주었다. 고위직을 내 준 경우는 드물지만 통역을 위한 역관, 의료를 맡은 의관, 병기와 제조를 맡는 무관직 등에 이들의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조선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국방력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조치였다.

 

태조 욍릉인 건원릉
태조 욍릉인 건원릉

정리 요약

조선 태조 이성계를 역대의 인물 누구와 비견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비교다. 필자는 역사 인물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태조 이성계만한 무장으로서의 실력과 군주로서의 보스기질, 제왕으로서의 카리스마, 혁명가로서의 싸늘한 심장을 가진 인물을 찾지 못했다. 물론 필자의 과문한 탓일 게다. 

하지만 세계사 인물 가운데 이성계 같은 탁월한 리더가 없기야 했을까? 나폴레옹이 있지 않냐고? 한니발이나 시저, 칭기스칸도 있고 조지 워싱턴도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이 살아온 상황에 적합하게 맞추어진 영웅일 뿐이다. 고려말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며 새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만큼 괜찮은 리더가 그 당시로서는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를 억지로 영웅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상황에 그만큼 확실하게 나라와 백성을 이끌 인물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경쟁자를 이겨낸 그의 창업자로서의 이력을 살펴보노라면 그 자체가 대단한 한 편의 서바이벌 게임이었고 그 속에서 그가 권력을 거머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될 만한 인물이 새 왕조의 리더가 되었음도 알 수 있게 된다. 이성계는 14세기말에 그야말로 제대로 된 보스였고 탁월한 리더였다. 시대의 흐름도 읽어냈고 권력을 다루는 법도 알았다. 경제개념도 확실하게 서 있었고 백성을 위한 명분도 있었다. 

그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면 전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랄까? 그러나 그건 지금의 시각일 뿐이다. 그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성계야말로 오랫동안 군주가 되기 위해 성실하게 준비해 온 리더였기에 한 번 기회가 왔을 때 절대 놓치지 않고 그것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원 샷 원 킬의 진정한 승부사였던 것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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