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김수로왕, 일본을 가르친 글로벌 리더십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의 국제결혼을 올린 이는 누구였을까? 바로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이다. 

가야는 6개 나라로 느슨하게 연합된 연맹체 국가였다. 요즘 고령가야 등 가야사 복원과 발굴이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다. 하지만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가야의 존재와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했으며 특히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과 해설을 통해 그의 업적을 강조한 바 있다. 6가야 연맹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과연 어떤 리더십의 소유자였을까?

SWOT 분석 

약점 요인(weakness) 

: 후발주자로 생존 경쟁력이 떨어져

가야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정립에 비해 늦은 출범으로 문화와 물자의 소통이 늦었다. 지형적으로도 위로는 지리산과 아래로는 바다가 막혀 경쟁력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상당한 지식층의 인력 유출이 발생하면서 국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는 점도 약점이었다. 철을 생산하고 물자를 나르던 주요 항구가 퇴적물이 쌓이고 뭍이 올라오고 물이 내려가는 지형적 변화로 인해 더 이상 배가 드나들지 못하게 됐다는 점도 약점이 되었다. 

위협요인(threat)

: 고구려 등 경젱국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

강력한 국가가 출현할수록 약소국은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된다. 가야가 약소국으로 후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는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하는 고구려의 지속적인 남하정책이 자리잡는다. 고구려는 후방에 신라 백제를 눌러놓기를 원했다. 더불어 가야는 당연히 복속의 대상으로 쉬운 공격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한창 경쟁이 심한 신라나 백제 입장에선 가야가 손쉬운 병합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적성국의 손에 들어가면 곧바로 짐이 되는 나라이기도 했으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강점 요인(Strength)

: 철을 다루는 철기 문화의 강자

금관가야의 이름과 김해라는 도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특별한 강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철기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는 점이다.  금관가야는 <일본서기>에서 ‘수나라’ 또는 ‘소나라’로 불렸다. 이는 철을 다룰 줄 아는 나라라는 뜻이었다. 가야연맹 특히 금관가야는 김해를 중심으로 철을 생산하는 기술에 있어 다른 나라들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할 때에 초강법이라는 첨단 기술을 적용, 시대를 앞서 가는 제철제련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로왕은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초강법으로 생산해 내는 가야의 철제 무기 기술은 강력한 공격무기였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불편한 바다를 무기로 삼다

약점이나 위협은 반대로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삼면이 바다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절로 해양 항해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꽉 막혔으니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뚫린 길을 더 찾아보자는 적극적인 도전정신이 계발되었다. 지형적으로 뒤로는 막혀 있으니 바다로 진출하여 일본과 손을 잡고 문화와 첨단 기술을 전해주게 된 것이었다. 

글로벌 감성을 지닌 수로대왕의 리더십

김수로왕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다. 출생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1세기 전반에 가야를 한반도 남부에 우뚝 세우고 일본과 교류를 트는 한편, 신라 백제와 대등한 관계를 세우고 심지어 신라를 돕기도 하는 등 강력한 철기문화를 형성한 지도자였다. 

금관가야는 한반도와 중국 남부, 그리고 일본 열도에 이미 이름을 크게 떨쳐 온 해상왕국이었다. 

 

김해 구지봉 : 가락국 탄생설화가 담긴 구지봉
김해 구지봉 : 가락국 탄생설화가 담긴 구지봉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김해 땅 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는데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이 모두 사람으로 화하고 수로가 그 중에서 키가 9자(尺)나 되고 팔자 눈썹에 얼굴은 용처럼 생겨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사료는 가야 세력권에 외부 해양세력이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서기 1세기에 사람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재야 사학자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가락국기 건국설화를 보면 분명 김수로왕은 외지에서 들어온 인물인 것이 분명하며 중국에 들어온 흉노족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주장을 잠시 옮겨 보자.

서기 8년 중국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이라 하여 황제가 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왕망이다. 그는 한나라의 흐트러진 경제 정책과 외교 정책을 정리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치 주도층의 결속력 미비와 리더십 부재로 사회적 여러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15년 만에 망국으로 치달은 이 단명 국가의 리더 왕망에게는 후원자 그룹이 있었다. 

이들 중 한나라 시절에 대장군으로 출세한 김일제라는 흉노족 왕자의 증손자가 있었다. 당이라는 이름의 이 증손자는 당시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제후국의 국왕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이었다. 이 증손자는 ‘신’ 왕조에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다가 갑자기 나라가 망하면서 살길을 찾게 되었고 두 그룹이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바로 후일 신라를 이끌고 가는 경주 김 씨 세력과 김해 김 씨 세력이라는 설이다. 물론 김해 김 씨 세력의 리더는 수로왕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싣고 뱃길로 김해까지 찾아온 것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다, 그 시대에 국제결혼을 했다는 말이다. 

이방문화의 교역으로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

수로왕이 즉위하고 7년 만인 서기 49년 7월 27일에 일어난 그의 결혼 장면은 당시로서는 물론이고 지금 시점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로왕은 해상 여행을 통해 들어온 이민족 여인 허황옥을 만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배필로 정하고 2박 3일을 함께 지낸 후 그 일행에게 많은 쌀과 베를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수많은 의문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의 출신지에 관한 기록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다양한 학자들이 다양한 경로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고 그 결과도 계속 발표되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허황옥은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하여 자신이 아유타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아유타국이 어딘가 하는 점이 연구자간의 쟁점이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어쨌든 이 결혼을 통해 수로왕과 금관가야는 많은 것을 얻었는데 우선 불교의 전래였다. 남방 불교의 전래설을 가져온 허황옥 오빠 장유화상은 불탑인 파사석탑을 함께 싣고 동생과 가야로 들어왔다. 당시의 시대상을 볼 때 불교의 수입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백성의 가치관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정신문화의 개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 수로왕은 새로운 국제무역로를 열게 되었고 연안 항해 기술의 기법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수로왕은 아유타에서 온 허황옥의 배를 돌려보냈다. 당연히 어떻게 항해해 왔으며 뱃길은 어떤 길을 택했는지 풍랑은 어떻게 피해왔는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배를 돌려보낼 때, 그 곳으로 보내는 연안 항해술을 이용, 동남아시아 여러 곳을 들러 가는 뱃길을 택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해상 무역을 자연스레 시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쌀과 베가 공식 무역품으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파사석탑 :김수로 부인인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아유타국의 신비스러운 석탑. 재질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재질이다. 김해에 가면 수로왕릉에서 만날 수 있다.
파사석탑 :김수로 부인인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아유타국의 신비스러운 석탑. 재질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재질이다. 김해에 가면 수로왕릉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증거가 허황옥이 싣고 온 파사석탑과 쌍어문이다. 바끄로뉴스 독자분들께서 김해에 가면 이 놀라운 유물을 만날 수 있다. 파사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과는 재질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재질은 우리나라에선 아예 발견되지 않고 인도 아유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무거운 돌을 싣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은 당시로서는 장거리 항해에서만 채택되던 항해기법이었다. 중심을 잡아 큰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쌍어문, 즉 두 마리 물고기 무늬다. 김해 수로왕릉(납릉) 정문 양쪽에 그려진 이 무늬는 우리나라 건축양식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아유타의 인도 건축양식이다. 그러니 서기 49년 7월27일의 이 결혼식이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할만큼 큰 사건이었다. 

철의 나라, 제련기술로 일본을 정복하다

김수로왕은 김해에선 흔한 철기 제련 기술에 주목했다. 당시 금관가야는 제철제련 기술 하나만큼은 신라 고구려 백제에 비해 월등했다. 천혜의 자연조건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이 흔한 것이었고 제련 기술도 초강법이라는 첨단 기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초강법이란 1,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철을 단련해 불순물을 없애고 주철보다 훨씬 뛰어난 초강을 생산해내는 고도의 철기 제련법이다. 

 

가야 유물 : 말탄 무사모양 뿔잔(가야 기마병 모습, 덕산리에서 출토됐다고 전한다
가야 유물 : 말탄 무사모양 뿔잔(가야 기마병 모습, 덕산리에서 출토됐다고 전한다

우리는 가야 관련 유물에서 가야 연맹체가 매우 뛰어난 철기문화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가야사 전문가로 꼽히는 윤석효 교수는 가야의 철기문화 수준이 대단히 뛰어나 다른 나라로 수출할 정도였다고 단정한다. 김해 함안 동래 창녕 양산 대구 등 가야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전쟁무기들은 투구, 활과 화살 검 갑주 개지극 등으로 고대 신라시대의 무기를 앞지르고 있다. 특히 개지극은 가지가 나와 있는 갈구리창으로, 보병이 말을 탄 기병을 끌어내릴 때 썼던 무기로 추정된다. 

이것은 강력한 철기 문화의 상징적 병기이자 유물이다. 청동기 위주의 무기류들은 철제 무기 앞에서 맥을 출 수가 없었다. 이런 무기들은 한반도를 벗어나 멀리 일본으로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에서 출토된 무기류나 철제류가 일본에서도 유사하게 출토되고 있어 가야의 일본 진출설을 강력하게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빼어난 항해기술로 현해탄을 정복하다

 

일본 나라박물관 쇼쇼인 전시장 : 쇼쇼인은 일본의 국보급 보물을 모두 모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한반도의 유뮬이 수두룩하다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매년 몇십점씩만 공개하고 그것도 연구자용으로는 내놓지를 않아서 궁금증만 불러일으킨다. 을 주장한 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스진천황은 가야(伽倻)에서 일본에 건너 온 정복왕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듯 가야계의 일본 진출은 너무도 활발했다. 
일본 나라박물관 쇼쇼인 전시장 : 쇼쇼인은 일본의 국보급 보물을 모두 모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한반도의 유뮬이 수두룩하다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매년 몇십점씩만 공개하고 그것도 연구자용으로는 내놓지를 않아서 궁금증만 불러일으킨다. 을 주장한 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스진천황은 가야(伽倻)에서 일본에 건너 온 정복왕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듯 가야계의 일본 진출은 너무도 활발했다. 

가야의 지도자들은 당시 빈약한 일본의 문화문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왜)는 통일 국가도 없고 아직 제철제련 기술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수로왕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 지도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철기를 수출하고 가야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역시 같은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따르면 한반도 남해안에서 일본으로 나가는 길은 구야한국에서 쓰시마-이키섬-이토국-규슈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보이는 구야한국은 김해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금관가야국이다. 가야가 일본으로 철기 기술을 수출하면서 이 항로를 이용한 것이다.

이미 국제 항로도 갖추었던 수로왕은 가지고 있던 쳔혜의 자원과 제철제련 기술을 효과적으로 경쟁국에 전파하면서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거의 500년 간 가야 사직을 흥왕케 하는 선도적 지도자로 이름을 높였다. 

이러한 수로왕의 지혜는 특출했다. 지혜와 경륜으로 험한 세파를 딛고 금관가야를 성공리에 정착시킨 그였기에 그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주변국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파사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 때가 서기 102년이었는데 수로왕은 이미 나이가 한참 많아 국가 경영에서 은퇴했을 지도 모를 나이였으나 수로왕이 신라의 영토 분쟁에 개입할 만큼 국제적인 지도자로 이름나 있었고 그의 정치적 외교적 역량이 뛰어나 신라가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무기는 대화와 소통만은 아니었다. 힘을 써야 할 땐 쓰게 하고 진퇴를 지혜롭게 하도록 가르쳤다. 

서기 77년 기록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가야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신라는 이미 국가적인 틀이 어느 정도 잡혀 있던 나라였고 금관가야는 수로왕의 서기 42년 건국 이후 30년 정도의 짧은 기간만 지난 상태였다. 이 두 나라가 대등한 전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수로왕의 통치가 이미 무르익을만큼 무르익어 강성한 나라로 건설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후일 서기 94년에도 가야는 신라의 마두성을 공격하여 포위한 바 있고 서기 97년에는 신라의 남쪽 변경을 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인 바 있었으니 가야의 위세는 신라 고구려 백제에 조금도 뒤지 않았던 것이다.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놀라운 도전 정신의 소유자 김수로왕

 

김수로왕릉
김수로왕릉

금관가야는 신라 고구려 백제에 비해 건국연도도 늦고 벼농사나 고대 문화가 한참이나 늦은 나라였다. 그런데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개국하고 약점을 보완하며 가야국이 보유한 강점을 잘 살린 결과 삼국에 못지않은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약점 때문에 미래의 포부를 갖지 못하는 조직과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약점은 보완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 약점은 지금 나를 열세로 있게 하지만 나만 더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강점으로 바꿀 수 있다. 

수로대왕의 강점은 그런 내부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내고 열린 의식으로 세계로 나아간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21세기 지금 시대에 부활해 어떤 조직을 이끈다 해도 강한 조직, 자생력 있는 조직으로 이끌 수 있는 리더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김해 지방을 여행하려는 분들은 반드시 김수로왕릉을 한번 가보길 권한다. 역사적 유물의 보고 가야 문화를 체험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 말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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