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 균형 잡힌 외교감각으로 통합의 리더십 보여주다

한 나라를 이끌고 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통치는 내치만 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외교만 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문종(재위:1046~1083)은 고려 474년의 영욕의 역사 가운데 37년간 나라를 가장 평안하게 유지했고 문화의 꽃을 피웠던 지혜로운 군주였다. 이 때문에 그의 통치시기는 고려의 전성기라 불리었다.

그는 유학과 불교 확산이라는 양 날개를 통해 고려의 균형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군사력을 키워 법제 정비와 송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문화와 대외적 위상을 크게 키워낸 리더로 평가받았다. 물론 태평성세의 군주가 공짜로 얻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거듭된 훈련을 통해 강력한 국방력으로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나라를 지켜야 했으며 유학자와 불교 지원세력 간의 내부 분열을 보듬어야 했다. 사학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싸우기도 했다. 평화를 위해 오히려 더 치열하게 싸웠던 문종의 통합의 리더십을 통해 오늘의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해 낼 지혜를 배워보자.(편집자 주)

 

국자감의 모습. 고려 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 국자학ㆍ태학ㆍ사문학ㆍ율학ㆍ서학ㆍ산학 따위의 전문 학과를 두었는데, 성종 11년(992)에 종래의 경학(京學)을 개편하여 설치하였다가 뒤에 국학ㆍ성균감ㆍ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국자감의 모습. 고려 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 국자학ㆍ태학ㆍ사문학ㆍ율학ㆍ서학ㆍ산학 따위의 전문 학과를 두었는데, 성종 11년(992)에 종래의 경학(京學)을 개편하여 설치하였다가 뒤에 국학ㆍ성균감ㆍ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인텔리들의 사학이 극성을 부리며 왕권을 약화시키려 했다

국자감은 성종 때 창설된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고려 시대의 대학교육 기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교육의 흠은 사학의 치열한 시장 경쟁이었다. 사학이 국가교육기관을 위협하고 때로 과거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등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해 왕권과 과거제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던졌다. 요새 말로 하자면 사교육 아닌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과거 시험 출제자나 감독관을 사학의 교장으로 영입하고 출제 예상 문제를 뽑아내 공부시키는 등 갖은 병폐마저 드러났다. 광종 이후 약해졌던 신하들의 권리(신권 臣權)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찍기 과외선생의 스카웃 열풍이 불고 무조건 과거에 급제만 시켜주면 된다는 식의 과열 과거과외가 불붙고 학부모들의 그릇된 교육관도 사회문제화 되었다.

신권의 강화로 인해 문종은 송과의 교역이나 외교관계 회복, 인재 발굴과 추천, 국방력의 증대 등에서도 신하의 눈치를 보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고려가 어느 정도 국방력이 안정되고 무장이 쇠퇴하고 문치 시대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기에 개경과 경기도를 근간으로 하는 실력자들이 권력을 사유화 세습화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면서부터 사학 설립이 대유행으로 번지는 사태가 시작된 것이었다. 문종에게는 강력한 집권을 방해하는 약점요인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위협요인(threat)
: 거란과 동여진의 출몰에 해적떼까지 위협했다

문종 8년과 28년에 거란은 고려를 심각하게 자극하여 변방이 위태로워졌다. 압록강 연변에 요새와 관문을 설치하여 남쪽 고려를 넘보는 군사적 적대 행위와 무역을 위한 고려측 반응을 떠보는 등 전쟁과 평화의 양면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이 모습은 21세기 들어 북한이 남한에 보여 온 숱한 강온 양면 작전의 교란양상과 흡사하다. 전쟁을 하자고 덤비다가 금방 다시 평화나 무역을 원하는 등의 이중적 외교책을 보여줌으로써 대응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거란이 큰 위협이었다면 여진은 작지만 고질적인 위협이었다. 여진은 고려시대 내내 변경을 소란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이들은 고려와도 거래하면서 거란과도 거래하는 등 거리 외교책을 통해 자신의 민족을 지켜왔다. 당연히 고려나 거란은 이들의 지배권을 놓고도 서로 쟁패를 계속해 왔다. 여진이 강성해지면 곧 고려의 변방이 소란해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동여진족을 중심으로 한 해적떼가 변방에 들끓으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나라를 원망하고 도적으로 둔갑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문종 때만 2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져 동북해안 지방에 편한 날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문종 34년에는 3만 명의 대군이 여진 정벌에 나서는 대규모 토벌전까지 벌여야 했다. 

강점 요인(Strength)
: 강력한 국방력과 탁월한 외교술로 무장하다

문종의 강점은 어느 군주보다 지혜로웠던 점이다. 그가 37년간 끊임없는 대내외의 격렬한 도전을 받았으나 가장 태평세월을 이룩해 냈다는 점에서 재평가받아야 할 만하다. 그는 유학을 알고 불교 문화에도 심취한 인물이었으나 명분에만 매달리는 바보스러운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신하들의 견제 속에서도 그는 국익을 가장 우선으로 앞세운 실리적인 군주였다. 국익을 우선하겠다는 군주에게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또 문종은 최대의 위협 요인이던 거란의 무력 위협을 물리치고 송과의 교역을 회복시켜 복수적인 국제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동아시아 속에서 한반도의 위상을 크게 높인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바로 국방력의 강화 덕분이었다. 각지의 요새를 보강하고 축성을 계속하여 적이 함부로 넘볼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또 무기 제조와 병참기지의 증대, 적절한 인재의 배치 등 군주가 마음먹은 대로 국방력을 활용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적국의 욕심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노렸다. 문종은 게다가 홍보 전문가였다. 그가 지혜로웠던 것은 숨길 것은 적극적으로 숨기고 알리고 싶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림으로써 고려가 가진 국력 이상으로 실력을 드러내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신하의 의견을 듣고 귀 기울여 그에 응대하거나 조정해 주는 조정자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했다. 군주이지만 명령만 내리는 군주가 아니라 협상가로, 각 부분과 대소신료간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자청하여 대화를 주도하는 군주였다. 이로써 융통성 있는 법의 적용과 인재발굴 등에서 특별한 감각을 갖추고 스스로 실력을 키워갔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거란의 견제속, 대송(對宋)무역과 대일교역을 늘려 자주국의 위치를 지켰다

동아시아 속에서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중국의 지배자와 늘 마찰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거란은 송나라를 압박하고 고려를 견제하여 강력한 국가체제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 시절 고려는 거란의 견제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송상(宋商)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문물의 거래가 활발해졌다. 특히 송나라 황제는 고려와의 통교(通交)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무역 사무역의 활발한 증가를 이루어냈다. 보수적인 신하들이 거란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으나 문종의 질병 치료를 위해 송나라 명의가 들어오면서 양국 관계는 활발해졌고 급기야 문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말년에 대송 외교를 회복하여 양국의 국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또한 문종은 할 수 있으면 폭넓은 외교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애썼는데 그것은 동아시아의 역학관계가 절대 패자가 없는, 이른바 백가쟁명의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과의 교류도 신라를 계승한 고려였기에 그동안 소원하였으나 문종은 이를 극복하고 양국 교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등거리 외교가 꼭 필요한 지금 우리에게 모본이 될 군주

서기 1046년 서구에선 동로마 제국이 망국의 길를 걸어가고 있던 시절, 동아시아에선 거란과 송(宋), 하(夏)의 패권 다툼이 한창 치열해 지고 있는 가운데 고려의 국력 신장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치열한 군사 외교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고려의 안정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당대의 평화적 관계가 외교적 승리 가운데 얻어낸 일시적 평화였기에 고려인들로서는 항상 긴장과 경각심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평화로울 때 긴장을 늧추다가 나라나 조직이 망하는 결과를 역사는 수도 없이 보여준다. 문종은 평화로울 때 더욱 고삐를 죄어 나라의 안정과 국력의 강화를 시도하는 한편 외교전을 통해 위협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해 갔다.

거란은 계속 해서 후방의 고려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송과는 전쟁과 외교적인 대립으로 날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문종은 즉위 후 이 힘의 대치 상황 속에서 걸출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우선, 강력해진 고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거란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많은 신하들이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반대했지만 그는 거란에 굽실거리기만 해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 문종은 거란과 기본적인 외교관계만 유지한 채, 압록강 동부지역의 거란군 철수를 요구하는가 하면, 거란의 침입 준비를 강력하게 항의하는 사절단을 내보내기도 했다. 문종은 또 거란이 힘으로 밀어붙여 단절시킨 고려와 송의 국교를 회복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이 역시 신하들이 거란이 보복전쟁을 가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반대했지만 문종은 과감하게 등거리 외교를 감행했다. 이것은 고려의 국력에 대한 문종의 자신감의 발로였으며, 한편으로는 거란의 배후에 고려와 친밀한 송이 언제라도 거란을 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함부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하는 치밀한 외교전략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국의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국제적인 위상도 높이고 당분간 전쟁의 위협을 피하게 되어 내치의 안정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종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외교전이었다.

나라와 외교가 강해지려면 국방력이 강해야 한다

문종의 외교력은 강력한 국방력으로 인해 출중한 능력으로 위치할 수 있었다. 고려는 왕건 이후 상당한 군사력으로 중앙 정부를 지켜왔지만 문종 때는 국방력이 최전성기였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수준으로 올라 서 있었다.

문종은 특히 축성을 계속 하여 천리장성 외에도 동해로부터 남해로 이르는 긴 국경선에 보를 설치하여 적을 감시케 했다. 이것은 동여진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여진족은 문종이 설치한 보를 보고 쉽게 고려 국경을 넘보지 못했다. 특히 문종은 각 지역 사령관급인 수령이나 진장의 책임 아래 보와 성의 수리와 보존을 엄격하게 명했다.

그는 또 병참용으로 보관해 둘 무기도 크게 양을 늘려 유사시에 전쟁에서 무기가 모자라 적과의 전쟁에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손으로 쏘는 화살과 전차에서 쏘는 화살 각 6만 개를 서북면에 보낸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전투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은 식량이라는 점에서 문종은 군사용 식량을 충분히 준비케 하고 예성강의 선박 107척을 징발하여 식량을 각 병기창에 보급하는 식량보급 루트를 확보케 했다. 또 군사나 무관들에게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되, 무신들에게 많은 특전을 줌으로써 장수나 군사들이 전장에서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어 국가에 충성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데 최선을 다했다.

고려사를 보면 문종 23년에 전시과를 통해 파악해 보는 병력 규모가 중앙군 4만5천 명, 주진군과 주현군을 합해 9만 7천 명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15만 명의 규모다. 당시 인구수에 비해 대단한 규모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조선 임진란 때 가용 전투 병력이 이 정도였으나 실제 병력은 8천을 모으기도 힘들었으니 고려의 문종 당시 국방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규모였다.  

문종의 외교력은 이런 국방력으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 붙을테면 붙어보자는 식의 강한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국방력이 그만큼 튼튼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국방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성들의 단합도 중요하다. 문종은 불교 행사를 크게 일으킨 후 백성의 정신 문화를 통일시키고 호국 불교의 정신을 깊이 심어 유사시 온 백성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문종 관련 사진,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윤관의 묘. 윤관은 고려 왕가의 자존심을 지켜 준 맹장이었다.
문종 관련 사진,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윤관의 묘. 윤관은 고려 왕가의 자존심을 지켜 준 맹장이었다.

황금기를 이끌어 낸 탁월한 통치력
-시스템을 정비해 안정을 이뤄내다

한반도의 역사는 문종의 재위기간을 고려의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된 황금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문화면에서 불교와 ․유교를 비롯해서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문물의 발전은 고려와 송, 고려와 일본, 고려와 아라비아 등 전세계로 뻗어가는 고려 문화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노계현 박사에 따르면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 때까지 송나라 상인이 고려에 온 것은 67회, 약 1천 6백명 규모나 되는데 그 가운데서 문종 때만 43회, 1천4백 명이 다녀갔다고 하니 얼마나 대송무역이 활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일본과는 문종 때만 14회나 공식 교류를 계속했으니 다른 군주 때에 비해 대 여섯 배 이상의 교류를 나타내고 있다.  

아라비아 상인들도 자주 다녀갔는데 동시에 1백 명이 다녀간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동서교류가 당시 상당히 활발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문화를 한 번 더 발전시켜 만들어 낸 것으로 세계에 고려의 우수한 문화가 전달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해동공자 최충의 모습
해동공자 최충의 모습

참모를 골라 쓰다
-최충과 이자연을 양팔로 삼다

문종의 리더십 가운데 특별히 주목할 것은 유능한 참모의 발굴과 무한 신임이었다. 그는 보위에 오른 다음 해인 1047년 최충을 문하시중으로 앉혔다. 최충은 ‘7대 실록’을 편찬한 당대 최고의 실력가였지만 이미 만 63살의 노신이었다. 은퇴할 나이라고 비난이 나왔음에도 문종은 그를 최고위직으로 뽑아 내부 안정의 지도자로 삼았다. 이 신임에 힘입어 최충은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고,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 나아가 농번기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이를 시행하게 했다. 또 국방 강화에도 힘을 써 동여진이 고려를 넘보지 못하도록 경계를 강화했다. 이에 문종은 1053년 궤장을 하사했다. 궤장이란 임금이 70세가 된 노신에게 내려주는 지팡이와 의자다. 더 머물러 임금을 보필하라는 총애의 표시인 것이다. 최충의 기용을 통해 문종은 토지법, 녹봉제도, 과거제도 등의 법제 정비를 완수해 내치의 안정을 이룸으로써 강력한 고려를 건설하여 재위하는 37년 간 태평성대를 이루어냈다. 

경원 이씨 출신 이자연을 정책실현의 오른팔로 세워 국가의 안정을 이뤄내도록 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최충과 이자연은 문종의 양팔이 되어 고려의 안정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문신 세력을 대표하던 최충은 이후 은퇴하고 문헌공도라는 사립학교를 운영, 유학자를 양성하는데 진력했다. 보이지 않는 왕과 신하간의 견제와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최충 이후 사립학교 출신의 많은 유학자들이 대거 등용되고 요직에 앉음으로써 신진 유학자들과 흥왕하던 불교 세력과의 마찰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문종은 최충을 정적으로 여겨 제거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수하에 있던 문신들을 끝까지 돌보고 지켜주었다. 이 점이 문종의 특별한 인재관리 노하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은 왕권을, 최충은 신권을 강조했으나 서로 물고 무는 식의 혈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며 법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함으로써 목표를 서로 달성해 간 것이다. 신사도의 정치 대결이라고나 할까? 문종의 군주다운 면모가 그의 재위동안 그대로 나타나면서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군주를 신뢰하게 된 것도 문종의 돋보이는 리더십이었다. 

유학과 불교의 갈등을 잠재우다
-갈등은 해소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낸 조정자적 리더십

문종은 고려 제11대 왕으로 등극했는데 혈기왕성한 28세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초창기에는 신하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기에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의견을 깊이 들어 심사숙고하며 정치를 펼쳐 가는 경청의 리더십을 선보였다. 그 배경은 사실 문신들의 과도한 정치적 견제가 그 배경으로 있었다. 

사실 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고 사리에 밝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형제 상속으로 이어진 왕위 등극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송나라의 문물을 사모하고 거란과 여진을 무시하는 문종의 태도를 신하들은 못마땅해 했다. 문종은 그럼에도 자신의 성향을 스스로 잘 파악하여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않고 상대의 의견이 설득력이 있으면 그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들어주었다.

문종은 표면적으로는 유학을 증진하는 한편으로 호국 불교의 정신도 함께 배양해 나갔다. 유학과 불교는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갈등 요인을 갖고 있었으나 문종은 이를 일부러 도외시하고 양자간의 균형을 꾀했다. 아니, 어쩌면 불교에 더욱 치중하여 문신 위주의 정부가 되는 것을 견제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승려가 되는 것은 곧 출세의 한 방편이었다. 불법을 닦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국가의 중요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승려는 군역에 면제를 받고 사찰에 소속된 전답을 통해 먹거리를 해결받으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어 많은 백성들이 앞 다투어 자제를 승려로 내보냈다. 

고려의 조정을 지배하고 유지해 나가는 틀을 유학으로 삼아 나가던 유학자들은 문종의 이같은 불교 우대정책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세법과 녹봉정책 등에서 지나친 불교 편애와 우상숭배를 문제 삼았으나 문종은 동생 셋을 승려로 내보내 그중의 하나를 대각국사 의천으로 키워내는가 하면 성종 때 그만 두게 했던 팔관회와 연등회를 부활하고 흥왕사를 창건하는 등 불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후일 문종의 동생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종한 고려 최고의 승려가 되어 문종의 뜻을 받들게 된다.

이렇게 되자 왕을 제외한 지도층은 유학에 경도되어 사회 지도이념을 유학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 내지 절제케 하려는 경향을 보인 반면 서민들은 불교에 경도되어 이를 숭상하고 전폭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양자간의 균형이 깨어질 경우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문종은 불교와 유학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오히려 견제와 균형으로 잡아냄으로써 고려 발전의 양날개로 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사학, 문종의 왕권강화에 대들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이 선을 보였다는 것은 교과서에서도 나와 있다. 왜 하필 문종 시대에 사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을까?  

기록을 보면 대사(大師) 중서령(中書令) 최충이 후진을 모아 교육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그의 집과 마을에 가득했다고 했다. 최충은 학문의 수준이 대가에 이르고 인격이 드높아 해동공자라 불렸으며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문헌공 최충이 세운 구재학당이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시초였다.  
9재(齋)란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에 다니는 학생들을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 불렀다. 최충의 문헌공도는 사대부의 자제들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들러 학문을 연마해야 하는 필수코스로 선택되었다.

왜 최충 등 사학에 학생들이 몰렸을까?
그것은 국가의 공인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선발 기준이 까다로웠던 데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보려면 국자감에 3년이나 출석하고 까다로운 수학 기준을 감당하며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귀족 자제들은 이런 까다로운 규정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과거시험 출제관이자 감독관이었던 최충 등 사학 설립자 밑으로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12공도는 강남의 명문 학원쯤 되는 사적 교육기관이었다. 

이런 사학들은 매년 여름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요즘의 섬머스쿨 같은 하과(夏課)를 했는데 일종의 족집게 과외, 즉 과거준비 특별과정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충은 배우는 학도들중에 급제하여 학문이 우수하고 재능이 많은,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택하여 담당 교도(敎導)로 삼아 학습을 지도하도록 했다. 이른바 조교였다. 

고려사 권 74는 간혹 선배들이 참관하러 찾아오면 촛불로 시간을 정하고 한정된 시간에 시를 짓게 하고, 그것을 평정하여 우수한 시는 그 차례대로 방(榜)을 붙이며 이름을 불러 들어오도록 하여 성적순으로 좌석을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배우는 이들과 앞서 공부한 선배들이 술상을 받드는데 나아가고 물러섬에 예의가 바르고 장유의 질서가 지켜졌다. 해가 지도록 시를 읊어 주고받으니 보는 사람마다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무릇 과거에 나아가려는 이는 9재에 이름을 올리게 되니 구재학당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은 학문과 담소, 술과 예의를 지키는 선비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누구나 다 흠모하게 되었다.

당시 12공도의 화려한 경력을 보면 문헌공도 최충은 문하시중 역임에 목종 8년 장원, 현종 17년 정종 원년에 지공거라는 경력을 가졌다. 지공거는 고시관으로, 우수한 선비를 뽑는 일을 맡은 자리였다. 또 홍문공도(웅천도) 정배결은 문하시중에 현종 8년 장원, 문종 원년 지공거였고 광헌공도 노단은 종 2품의 참지정사로, 문종34년, 선종 2년에 지공거였다. 이렇듯 관료를 역임하지 않은 이는 충평공도 유감과 구산도뿐이었고 나머지 10공도 모두는 지공거나 고위 관료출신이었다. 그러니 창설자들의 화려한 경력과 학문을 이어받으려는 학생들이 줄을 이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학 출신들이 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치게 되면서 대거 궐안으로 들어가 등용되며 일종의 권력 집단이자 여론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학벌이라는 것이 처음 생겨나 과거에 응시하고 관료로 들어선 이들끼리 은연중에 학연을 다투는 일들이 벌어지고 파벌이 나타나기도 했다. 고려 사회의 엘리트들이 시작된 이 사적 네트워크의 결합은 후일 정파간의 정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문신이 무신을 무시하는 사태까지 불러와 후일의 ‘무신의 난’까지 불러오게 되었던 것이다.

문종은 이것을 우려하여 사학보다 국학을 중시하게 하려고 유학과 퇴학의 기준을 새로 정하고 일종의 교수평가제를 통해 교수의 수준을 높였다. 게다가 문종은 신분보다 실력과 능력을 중시했는데 문신 귀족들은 이것이 못마땅해 나름의 자구책으로 사학을 설립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21세기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사교육 열풍이 고려조 사학의 과도한  열풍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사학의 역사가 어언 1천 년에 이른 것임을 알 수가 있고 과도한 사교육 뿌리뽑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연천 숭의전 : 고려 문종 등 고려 왕조 7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971년 12월 28일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총 면적은 540평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이다. 고려 태조 및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목종 ·현종 등 7왕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지냈다.
연천 숭의전 : 고려 문종 등 고려 왕조 7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971년 12월 28일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총 면적은 540평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이다. 고려 태조 및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목종 ·현종 등 7왕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지냈다.

요약

갈등이 가득한 가운데 합리적인 조정자를 자임한 기쎈 리더십 

문종은 사실 불교를 숭상하고 지나치게 불사를 많이 벌려 신하들과 종종 충돌했다. 그러나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자간의 발전을 위한 길이라면 쾌히 이를 승인하고 장려했다. 그리고 양자간의 충돌과 이해관계 대립이 일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체 약한 쪽 편을 들기도 하고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문종은 문신 귀족들의 전횡이 갈수록 강해지고 문신의 세습과 가문의 권력화, 왕권의 견제화가 너무 심해지자 의도적으로 신분이 약하지만 능력이 출중한 자들을 골라 관료로 채워넣었다. 문종 당시 이미 지방 관아에서는 중앙 호족이나 신분이 높은 귀족들과 뇌물로 연계된 탐관오리들이 득세하고 있었던 흔적이 있다. 문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문종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송나라 출신 학자들을 적극 영입하여 외국인 관료를 중용하는 과감한 인재정책도 썼다. 요즘 정부가 외국인을 국내 고위관료로 채용하는 것과 비슷한 조치였다. 

문종은 법조문이나 이념의 원리주의에 매달리지 않고 상황과 과정, 결과를 종합하여 융통성 있는 정책을 시행하고 자신의 주장보다는 주위 전문가들의 의견을 널리 구하는 합리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늘 경계했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왕의 말은 곧 법이었으나 그 스스로 제도를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고 왕실에서도 검소한 모습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 정치지도자들의 탐심과 부정부패를 철저히 경계했다. 심지어 문종은 내관들 숫자도 크게 줄이고 금은으로 되어 있던 용상과 디딤판도 철로 바꾸도록 하였으며 먹는 음식과 의복에까지 검소의 기조를 유지하게 명했다. 

이같은 지도자 스스로의 개혁과 절제로 당대의 고려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중국의 송나라 백성들로부터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꼽힐 정도가 되었다. 문종은 이로써 지도자의 균형감 갖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을 남겨주었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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